[安重根 書] 02
전시를 열며
1909년 10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있었습니다. 1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안중근 의사의 정신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중근 書> 특별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교육가이자 의병이었으며, 격동의 시대에 끊임없이 고민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씨 遺墨를 통해 교육자로서, 군인으로서, 사상가로서 안중근 의사의 삶과 사상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 이후 1910년 2월부터 3월까지 순국을 앞두고 여러 글씨를 남겼습니다. 글씨에는 독립에 대한 의지, 동양평화 사상 등 안중근 의사의 올곧은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전시는 안중근 의사의 글씨와 관련 기록을 안중근 의사의 어린 시절 이름인 응칠 應七을 본 따 일곱 가지 이야기로 구성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로 독립을 염원했던 안중근 의사의 치열했던 삶과 의지, 사상을 함께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歲寒然後 知松栢之不彫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1910. 3. | 보물
안중근의사숭모회
"날이 추워진 후에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안중근 의사와 가문의 절개를 잘 보여주는 글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논어』를 인용한 것으로, 혹독한 시절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와 가문 사람들을 시들지 않는 소나무처럼,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에도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불인자 불가이구처약
1910. 3.
일본 조신지 淨心寺 소장 | 류코쿠대학 龍谷大學 수탁
"어질지 못한 자는 궁핍한 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좋지 않은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어진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힘든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몸 바친 안중근 의사와 가문의 절개를 알 수 있는 구절이라 생각된다.
안중근 生 생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삶은 교육을 중시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가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황금 백만 냥보다 자식에게 하나를 가르치는 게 낫다" 는 글씨에는 안중근 의사, 안정근, 안공근, 안명근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안중근 의사 가문의 교육에 대한 가치관이 잘 녹아 있습니다.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 이라는 글씨에서는 천주교 신자로 살았던 안중근 의사와 가족의 신앙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안종근 의사의 글씨에서 안중근 의사의 교육에 대한 가치관과 천주교인으로서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天堂之福 永遠之樂
천당지복 영원지락
1910. 3.
안중근의사숭모회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천주교인 안중근 의사의 신앙심을 느낄 수 있는 글씨이다. 안중근 의사는 1897년 세례를 받은 이후 독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살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인장에는 "CORÉE AN THOMAS" 라는 세례명과 함께 태극기와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한국인이자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極樂
극락
1910. 3. | 보물
안중근의사숭모회
극락은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종교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의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 안중근 의사의 마음이 표현된 글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1910. 3. | 보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황금이 백만 냥이라도 자식에게 하나를 가르침만 못하다."
교육을 중시하는 안중근 의사의 철학이 잘 녹아 있는 글씨이다. 안중근 의사와 가문 사람들은 학교 설립 등 다양한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
가문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가족에게 이어졌습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 후 안중근 의사 가문은 어머니 조마리아와 두 동생 안정근, 안공근 뿐만 아니라 사촌, 조카까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몸 바쳤습니다. ‘소년 안응칠’ 이 ‘의사 안중근’ 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가풍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몸에 일곱 개의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여 응칠이라는 아명으로 불리던 안중근 의사는 학문을 익히고 사냥을 즐기던 소년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학문을 익히고 사냥을 즐기던 소년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가문과 인연이 있는 백범 김구는 안중근 의사를 사격술이 뛰어난 청년으로 기억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 안중근의사숭모회
1962년 안중근 의사가 추서 받은 훈장으로, 대한민국장은 건국훈장 중 가장 높은 훈격이다. 하얼빈 의거와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의병활동의 공을 인정 받아 추서되었다.
[출처 : news 1]
안중근 의사 가족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안중근의사숭모회
① 어머니 조마리아의 건국훈장 애족장 (2008)
② 숙부 안태순의 건국훈장 애족장 (2009)
③ 5촌 조카 안봉생의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안중근 의사 가문은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안중근 의사 가문은 15명이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2022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이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건국훈장 애족장
건국훈장 애국장
안중근 의사가 없는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1909. 10. 27. | 안중근의사숭모회
하얼빈 의거 다음날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일본 경찰이 쵤영한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이다. 한국 여성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일본 경찰이 연행하여 촬영하였다.
김아려 여사, 안준생 (안겨있는 아이), 안분도 (서있는 아이)
『안응칠 역사』
1910. | 안중근의사기념관 (복제)
안중근 의사는 '응칠' 이라는 어린 시절 이름으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진솔하게 담은 자서전을 남겼다.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필사본만이 전한다.
"1879년 기묘년 9월 2일 (음력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한 남자가 태어나니
성은 안이요,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이라 했다.
··· 배와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응칠이라 불렀다."
『안응칠 역사』 에서
두 번째 이야기
신앙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은 안중근 의사의 일생에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습니다. 1897년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후 안중근 의사와 가족은 천주교에 독실했습니다. 도마 Thomas라는 세례명도 받았는데,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이 된 이후 일생을 도마 안중근으로 살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찬미 예수님" 으로 시작해 "도마 올림" 으로 끝납니다. 여기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 중에서도 빌렘 신부와의 인연은 각별했습니다. 독립운동 중에도 틈틈이 엽서를 보내 소식을 정할 정도로 안중근 의사는 빌렘 신부를 믿고 따랐습니다. 빌렘 신부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을 지키려 뤼순으로 향할 정도로 그를 아꼈습니다.
빌렘 신부와 청계동 신자들 (1911. |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고요한 아침의 나라』
1915.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독일 베네딕도 수도회 베버 N. Weber 총아빠스가 기록한 한국 여행기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한 내용과 안중근 의사 가족을 촬영한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축일에
안 진사의 형제가 찾아와 ···
문답과 십이단을 새로 넉넉히
챙기고서는 저에게 자기네 마을에
와서 공소를 열어 달라고 분명하게
청했습니다.
「뮈텔 문서」 에서
안중근 의사 가족의 세례
1896. 12. 6. | 한국교회사연구소
안중근 의사 가족이 청계동에서 빌렘 N. J. M. Wilhelm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의 「뮈텔 문서」는 뮈텔 G. C. Mutel 주교가 한국에 50여 년간 선교사로 재임하는 동안 주고받은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빌렘 신부와 안중근 의사의 형제들
1910. | 안중근의사기념관
빌렘 N. J. M. Wilhelm 신부와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안정근, 안공근, 사촌 안명근이 뤼순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정근, 안공근은 뤼순 감옥 수감 당시 안중근 의사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 가족이 사는 진남포와 뤼순을 오가며 두 형제를 도왔다.
빌렘 신부, 안정근 (앞줄 왼쪽부터), 안명근, 안공근 (뒷줄 왼쪽부터) [출처 : 연합뉴스]
안중근 의사의 장래에 대한 상의
1899. 9. 26. | 한국교회사연구소
안중근 의사가 빌렘 N. J. M. Wilhelm 신부에게 장래에 대해 상의 했다는 내용이 담긴 「뮈텔 문서」이다. 안중근 의사와 빌렘 신부의 친밀함을 엿볼 수 있다.
안 (중근) 토마스는 제게 충실합니다.
그의 온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는 서울, 상하이나 도쿄에 가서
4 ~ 5년 공부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관해 저와 상의했습니다.
「뮈텔 문서」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사실을 확인하는 전보
1909. 10. 28. | 한국교회사연구소
하얼빈 의거 직후 도쿄 대교구에서 한국에 있는 뮈텔 G, C, Mutel 주교에게 보낸 전보이다.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인지 확인하는 내용이다. 뮈텔 주교는 "어떤 천주교인도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음" 이라고 회신하였다.
人無遠慮 難成大業
인무원려 난성대업
1910. 2. | 보물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큰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멀리 내다보며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글씨이다. 안중근 의사는 국권의 회복을 위해 항상 독립운동을 고민하였다. 독립을 위해 멀리 내다보며 애국계몽운동가에서 의병으로, 의병에서 의사로, 의사에서 사상가로 성장해갔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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