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重根 書] 03
안중근 義 의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는 글씨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안중근 의사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줍니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 단지동맹 결성과 하얼빈 의거 결심까지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그의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에는 교육가로서, 의병으로서, 장부로서, 지사로서 위태로운 시대를 극복하려 했던 굳건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안위 노심초사
1910. 3. | 보물
안중근의사숭모회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안중근 의사의 국가관과 애국심이 가장 잘 녹아있는 글씨이다. 국권이 침탈당하는 시대속에서 안중근 의사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우며, 애국계몽운동, 의병전쟁, 의열투쟁, 사상투쟁 등 시대가 필요로 하는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모색하였다.
세 번째 이야기
애국
1905년러일전쟁과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강탈되는 모습을 보며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만나 르 각 신부와의 대화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르 각 신부를 만나 실력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여 교육운동에 힘쓰며, 어머니 조마리아, 두 동생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이갑, 박은식,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던 서우학회에도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가족의 국채보상운동
1907. 5. 29. | 국립고공박물관 (복제)
안중근 의사가 동생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기부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대한매일신보』 기사이다. 아래에는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가 은가락지 등을 헌납했다는 기사도 실려 있다.
삼화항에 거주하는 안중근 3형제가
사립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전후 경비를
스스로 부담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 안씨가 학도들에게 격려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다행히 감읍함이
있으면 장차 큰 일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너희들이 성취할 날이 올 것이다"
1907년 5월 31일자 『대한매일신보』
안중근 의사의 삼흥학교 설립
1907. 5. 31. | 국립고궁박물관 (복제)
안중근 의사와 안정근, 안공근 삼형제가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대한매일신보』 기사이다.
곽 신부 (르 각 신부)는 · · ·
"너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
먼저 네가 해야 할 일에 힘쓰거라.
그 일이란
첫째는 교육의 발달,
둘째는 사회의 확장,
셋째는 민심의 단합,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
이 네 가지를 확실히 성취하면
이천만 정신의 힘이 반석과 같이
든든해져 천만 문의 대포를 가지고도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안응칠 역사』에서
르 각 신부
일제강점기 |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르 각 C. Le Gac 신부는 프랑스인 선교사로, 안중근 의사의 애국계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이 도산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일제강점기 | 독립기념관 (복제)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이 안중근 의사 전기 발간과 관련하여 도산 안창호와 상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와 동생 안공근의 근황도 실려 있다.
서우학회 학회지 『서우』
1907. 7. | (재) 현담문고 (복제)
안중근 의사가 애국계몽운동 단체 서우학회에 가입하였다는 기록이다. 서우학회는 1906년 이갑, 박은식, 안창호 들 평안도, 황해도 출신 지식인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안중근 의사와 르 각 신부의 만남
1906. | 한국교회사연구소
상하이에서 안중근 의사와 르 각 C. Le Gac 신부가 만났다는 내용이 담긴 「뮈텔문서」이다. 안중근 의사는 르 각 신부와 만난 후 귀국하여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敏而好學 不恥下問
민이호학 불치하문
1910. 3.
일본 조신지 靜心寺 소장 | 류코쿠대학 龍谷大學 도서관 수탁
"민첩하고 배움을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배움을 중요시 하는 안중근 의사의 철학을 느낄 수 있는 글씨로 『논어』를 인용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는 두 동생과 함께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 ·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네 번째 이야기
의병
1907년 고종이 폐위되고 정미7조약 이후 군대가 해산되자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로 향했습니다.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병으로 변모하였습니다. 하얼빈 의거 직후 스스로를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이라 밝혔듯, 안중근 의사는 의병으로서 독립전쟁에 참가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민심을 모으고 훈련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두 번의 큰 승전을 거두었습니다. 마지막에 패전하였으나 안중근 의사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삽화
1907. 8.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프랑스 신문 『Le Petit Journal』에 실린 삽화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인하여 숭례문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대한제국 군대의 상황을 그렸다.
연해주 한인의 단합을 촉구하는 안중근 의사의 기고문
1908. 3. 21. | 독립기념관 (복제)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에 실렸다.
오늘날 우리 동포가 불합한 탓으로
삼천리 강산을 왜놈에게 빼앗기고
이 지경이 되었도다.
··· 여보시오, 우리 동포, 지금 이후
시작하여 불합 (不合) 두 자 파괴하고
단합 (團合) 두 자 급성 (急成)하여
··· 우리 국권 어서 빨리 회복하고
태극 국기를 높이 단 후 처자
권속 거느리고 독립관에 재회하여
대한제국 만만세를 육대부주
혼동하게 일심단체 불러보세
1908년 3월 21일 자 『해조신문』
『동의회취지서』
1908. 5. 10. | 독립기념관 (복제)
러시아 지역 한인 민족운동단체 동의회 同義會의 취지서가 『해조신문』에 실렸다. 안중근 의사는 동의회가 주축이 된 연해주 의병 우영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미7조약 체결을 알리는 일본신문 호외
1907. 7. 25.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킨 후 이완용 등을 이용해 강제로 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강탈하여,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가 빌렘신부에게 보낸 엽서
1908. | 안중근의사기념관
의병 활동 당시 안중근 의사가 수원까지 갔다가 돌아가면서 고향에 들리지 못했다며 빌렘 N. J. M. Wilhelm 신부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출처 : news 1]
단지동맹 조사 보고문서
1909. 11. 26. | 안중근의사기념관 (복제)
통감부가 작성한 단지동맹 조사 보고문서의 일부이다. 안중근 의사가 활동햇던 연해주 지역 의병 조직의 자금 운영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이범진이 최재형에게 만원을 지원했으며,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1910. 3. | 보물
안중근의사숭모회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군인이자 의병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안중근 의사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글씨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러시아 연해주로 향해 독립전쟁에 투신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의병으로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으며,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으로서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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