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安重根 書] 01

드무2 2024. 12. 2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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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書] 01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15주년 기념 특별전

 

안중근 安重根 書 서

 

2024. 10. 24 ~ 2025. 03. 3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내가 죽은 뒤의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반드시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모두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ㅡ 안중근 의사의 유언 ㅡ

 

 

 

 

 

 

 

 

 

 

 

 

 

 

 

 

 

 

독립 獨立

 

안중근 의사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집약된 글씨이다. 안중근 의사는 "천국에 가서도 반드시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쓰리라" 유언을 남길 정도로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였다. 힘 있고 간결하게 쓰인 독립 (獨立) 두 글자에서 안중근 의사의 기백과 염원을 느낄 수 있다.

 

1910. 2

원본 크기로 복제 (930㎜ × 500㎜)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황금이 백만 냥이라도 자식에게 하나를 가르침만 못하다

 

약 2.5 : 1 축소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약 2.5 : 1 축소

 

 

 

 

 

 

 

東洋大勢思杳玄 有志南兒豈安眠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부개진가련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두우니 뜻 있는 사나이가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분개한지고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

 

약 2.5 : 1 축소

 

 

 

 

 

 

 

 

 

 

 

 

안중근 의사의 사람들

 

 

 

안중근家의 독립운동

 

 

 

 

조마리아 趙마리아, 趙姓女 1862 ~ 1927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로 구국운동에 헌신하는 가풍을 만들어왔다. 안 의사가 벌인 애국계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으며,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를 통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직접 납입하기도 했다. 하얼빈 의거 이후 일본 경찰과 헌병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아들이 평소 가졌던 뜻과 애국심을 당당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안 의사 순국 후에는 가족들과 망명을 떠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안중근 가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하였다. 만주 · 연해주 일대를 순회하며 한인동포의 민족의식 각성을 위해 강연하였으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건너와 임시정부와 한인동포에 대한 후원 활동을 하다 1927년 상하이에서 별세하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태순 安泰純 1872 ~ 미상

 

안중근 의사의 숙부로 안명근 사건 이후 일본의 탄압을 피해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참여하여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기도한 강우규 의사와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국내로 진입하여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명근 安明根 1879 ~ 1927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안 의사와 함께 성장하였으며, 그와 뜻을 함께하여 황해도 지역의 애국 계몽운동 단체에서 교육구국운동에 매진하였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에는 뤼순으로 면회를 갔다가 뮈텔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위해 빌렘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안 의사의 순국과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황해도 일대에서 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한 자금 모집활동을 벌였으나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신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확대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삼아 이른바 '105인 사건' 을 일으켰다. 안명근은 15년간 복역 후 1924년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으나 1927년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안정근 安定根 1885 ~ 1949

 

안중근 의사의 첫째 동생으로 안 의사의 순국 후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투쟁과 일본의 불법적인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의 뜻을 품었다. 사형 선고 후 안중근 의사는 안정근에게 한국에도 공업이 필요하니 실업에 힘쓰라는 말을 남겼다. 안 이사 일가에 대한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안정근은 가족들과 만주 · 연해주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한인사회 발전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딸 안미생이 김구의 아들 김인과 결혼하여 김구와는 사돈을 맺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형 안중근과 동생 안공근의 유해를 찾아 다니다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안공근 安恭根 1889 ~ 1939 추정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으로 형 안정근과 함께 안 의사 순국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찍이 둘째 동생 안공근에게 학문적 재능을 발견하고 학업에 정진할 것을 권유하였다.이에 따라 안공근은 삼흥학교에서 영어 · 일본어를 익히고, 서울로 올라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교사를 시작하고 안중근 의사의 공판투쟁을 참관하며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으며, 모스크바 유학 경험을 통해 러시아어도 습득하였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어 김구의 측근으로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하는 등 의열투쟁에 투신하였으나 1939년 실종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안봉생 安鳳生 1908 ~ 1980

 

안중근 의사의 5촌조카이자 안춘생의 형으로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지린성 일대에서 김좌진의 부탁으로 항일세력을 규합하고, 동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후 안중근 의사의 형제인 안정근 · 안공근의 지시에 따라 난징으로 이동해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다시 만주로 이동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석방 후 일본의 요시찰인이 되어 감시 속에서 생활하다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안춘생 安椿生 1912 ~ 2011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안명근 사건 등으로 심화된 일본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경험, 항일운동의 뜻을 품고 뤄양으로 이동해 중국 중앙육군국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한인 특별반이 일본의 압력으로 폐지되자, 난징으로 이동해 중앙육군군관학교 본교 과정을 마치고 중국군에 임관,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중국군 생활을 마치고 한국광복군 1지대, 2지대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 광복회장, 독립기념관 초대 관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안미생 安美生 1919 ~ 2008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안정근의 딸로 베이징에서 태어나 능통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김구의 큰아들 김인을 만나 결혼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김구의 비서로 활동함과 동시에 큰아버지 안중근의 유지를 잇기 위해 정치 · 사회 · 여성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안경근 安敬根 1896 ~ 1978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안 의사 일가가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삼은 연해주로 망명, 안정근 · 공근 형제와 합류하였다. 두 형제가 상하이로 떠난 후, 연해주에 남아 있는 안씨 일가를 돌보고 박은식 · 신채호 · 이범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얼마 뒤에 본인도 상하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 김구의 보좌역을 수행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군관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해방을 맞을 때까지 무장투쟁과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김구를 계속 보좌하였으며 통일운동을 이어나가다 1978년 별세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의 동지들

 

 

 

 

이범진 李範晋 1852 ~ 1911

 

조선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하였다. 춘생문 사건, 아광파천을 주도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고 을미사변의 배후를 수사하다 일본의 위협을 받아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출국하게 되었다. 이후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외교를 통해 열강의 이권 침탈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러시아공사관 철폐와 소환 요구에 불응하고 외교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파견된 특사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사가 실질적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이후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의병운동에 기대를 걸고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1만 루블의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남은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여러 단체에 나누어 준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결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우덕순 禹德淳 1876 ~ 1950

 

안중근 의사의 동지로 연해주 의병의 국내진공작전부터 하얼빈 의거에 이르기까지 뜻을 함께하여 활동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연해주로 망명하여 재러시아 한인사회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범윤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안중근 의사를 만나 시국에 관한 대담을 나누며 같은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동지 관계가 되었다. 동의회 의병부대의 국내진공작전 당시 일본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곧 탈옥하여 연해주로 돌아와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의거 준비를 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성공한 뒤 일본에 체포되었다. 출옥 이후에도 연해주 지역에 머물다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후 6 · 25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조도선 曺道先 1879 ~ 미상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당시 동행으로 활약하였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등지에서 세탁업과 러시아어 통역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 하얼빈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 하얼빈 의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의거 당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으로 이동하고 조도선은 우덕순과 차이자거우역에서 대기하였다. 의거가 성공하고 우덕순과 함께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출옥 이후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과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3 · 1운동 이후 이르쿠츠크 한인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유동하 劉東夏 1892 ~ 1918 추정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당시 동행으로 활약하였다. 유동하의 부친인 유경집은 한의사로 러시아에서 약방을 경영하며 한인 활동가를 지원하였는데, 이 때 안중근 의사를 만나 시국에 대해 논의하며 친교를 쌓았다. 유동하도 부친의 집에서 안 의사를 만나고 하얼빈 의거에 동참하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 일행의 하얼빈 이동 및 통역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역 도착 정보를 전보로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거 성공 직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후에도 러시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8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강 李剛 1878 ~ 1964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성공하는데 핵심 조력자로 활동하였다. 미주 지역에서 안창호의 공립협회에서 활동하며 미주 한인사회의 발전과 민족의식 각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연해주로 파견되어 <해조신문>, <대동공보>의 창간에 관여하고 주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동참하게 되었다. 의거가 성공한 뒤 베이징으로 넘어가 안 의사의 변호인 구인 활동을 하는 한편, 안 의사의 순국 이후에는 <대동공보>를 통해 안 의사의 활약상을 한인 동료들에게 알리고 유족들에 대한 후원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해방을 맞은 후 임시정부 대만 특파원으로 한인 동포 귀환 임무를 수행하다 귀국하였다.

 

 

 

 

 

 

 

이범윤 李範允 1856 ~ 1940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 지역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조선 정부의 간도관리사로 파견되어 사포대 (私砲隊)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보호하였으며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남은 병력을 이끌고 연추 (크라스키노)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 안중근 의사를 만나 의병 봉기를 제안 받고, 주러 공사 이범진이 아들 이위종을 통해 군자금을 전달하자 최재형, 안중근과 동의회를 설립하여 연합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의병부대의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하고 의병운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음에도 의병 양성을 계속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계기로 유인석과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후에도 만주와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1940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최재형 崔在亨 1860 ~ 1920

 

9세에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 자수성가하여 재러시아 한인사회의 대표로 활동하며 교육, 실업 신흥에 힘쓰는 한편 연해주 의병운동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1907년 안중근 의사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며 의병을 모집할 때 적극적으로 지원하욨으며, 이후 이위종이 부친 이범진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가지고 오자 그동안 모은 자금과 병력을 토대로 동의회를 조직, 연추 (크라스키노)에 본부를 두고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때 안 의사는 동의회 의병부대에서 우영장을 맡아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 최재형은 <대동공보> 사장에 취임, 교육 문화활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으나, 안 의사의  활동에 대한 후원도 지속하였다. 1919년 3 · 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였으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1920년 일본군이 한인마을을 공격하였을 때 저항하다 총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위종 李瑋鍾 1887 ~ 미상

 

주미공사, 주러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해외 생활을 하며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을 익히고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로 임명되어 능통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현지교섭, 문서작성 역할을 수행하였다. 회의장 참석이 무산되자 언론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조치와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주장하였으며, 각국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를 발표하였다. 이후 부친으로부터 1만 루블의 군자금을 받아 연해주로 이동하여 동의회를 수립하고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공동기획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김황식

안중근의사기념관 관장 유영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 한  수

 

자료협조

김화자,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독립기념관, 독일 상트오틸리엔수도원,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 왜관수도원,

한국교회사연구소, 홍익대학교박물관, (재) 현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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