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숨어있는 세계사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드무2 2023. 2. 25. 11:06
728x90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밀 수확 현장. / 로이터 연합뉴스

 

 

 

대기근과 소련 경제 통제 탓에 500만명 이상 굶어 죽어

 

 

 

1922년 강제 합병 후 식량 뺏기고

스탈린에 의해 종자까지 압수되며

1932년 가을부터 餓死 늘어났어요

 

 

 

러시아가 주요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사실상 차단하면서 전 세계 식량난이 더욱 악화하고 있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곡물 운반 선적이 이동하는 흑해 항로를 봉쇄하면서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의 수가 급감했죠. 전쟁이 계속 되고 세계 식량 위기가 가중되면서 기아 · 빈곤 및 조기 사망이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어요. 유엔세계식량계획 (WFP)에 따르면 현재 2019년보다 2배 이상 많은 3억4500만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해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홀로도모르'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홀로도모르란, 우크라이나어로 굶주림을 뜻하는 '홀로도'와 죽음을 뜻하는 '모르'가 합쳐진 단어예요. 90년 전 스탈린 치하의 소련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명이 숨진 대기근을 뜻하는 말이죠. 당시 소련은 이를 단순히 '심각한 식량 위기'라고 표현하며 덮으려고 했지만, 소련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얼마 전 EU 의회는 이 사건을 집단학살, 즉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1932 ~ 1933년 소비에트 연방의 기근 지도. 기근이 심한 곳일수록 진한 색으로 표시돼 있어요. / 위키피디아

 

 

 

 

대기근의 서막, 스탈린식 집단농장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최대의 곡창지대입니다. 이는 풍요로운 금빛 밀밭과 푸른 하늘을 상징하는 국기에서도 알 수 있죠. 우리나라 면적의 약 6배나 되는 비옥한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어마어마해요. 2020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옥수수 수출 4위, 밀 수출 5위를 기록했어요.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러한 경제적 풍족함이 늘 국가의 부강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제대로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했거든요. 1922년에는 소련에 강제 합병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이 1924년 사망하고 난 후, 스탈린이 그 뒤를 이었어요. 소련은 연이은 내전과 혁명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됐고 경제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상태였죠. 스탈린은 경제를 일으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어요. 그리하여 1928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근대적 공업화와 산업화를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이와 함께 낙후된 농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미명 아래 '집단농장 체제'를 강제로 시행했어요. 실제 목적은 이를 통해 식량생산을 늘려 공출량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죠. 원래 가족 위주의 소규모 농장 형태로 농업을 하던 사람들은 스탈린식 경제체제에 저항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힘으로 눌러버리고 2년 내에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화했습니다.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 바로 우크라이나였어요. 우크라이나는 당시 전체 소련 식량 생산의 25% 정도를 차지할 정도의 주요 식량 공급처였어요. 이 지역은 원래부터 개인이 농지를 소유하는 전통이 강해 '쿨라크'라고 불리는 부농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집단농장 체제로 전환하며 곡물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했어요. 집단농장은 농민들이 공공 토지에서 공동으로 일하고 수확물을 나누어 갖는 형태였는데 오히려 생산의욕을 떨어뜨리는 등 비효율적이어서 수확량마저 줄어들었어요. 우크라이나 대표들은 당 대회에서 정부 정책이 비현실적이며 이 상태라면 대기근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단농장 체제와 대량 공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자 농민들은 수확한 공물을 구덩이에 묻거나 마을 밖 비밀 창고에 숨기는 등의 저항을 시작했죠.

 

 

1933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거리에 굶주린 농민들이 쓰러져 있어요.

 

 


굶어 죽는 우크라이나··· 벌레 먹기도
문제는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순수한 농민의 목소리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바라봤다는 거예요. 소련 각지에서 분리주의 민족운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던 그는 우크라이나를 더욱 가혹하고 강력하게 통치했어요. 수색과 심문, 압수조치가 이어졌습니다. 개를 이용해 숨겨둔 식량과 고기들을 모두 찾아냈고 식량을 숨긴 것이 발각되면 원래 내야 하는 양의 15배를 물도록 했어요. 또한 공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집단은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남겨 놓은 종자까지 모두 압수당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공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고, 집단화 조치에 반대하는 정치인과 비협조적인 관리, 비판하는 지식인 · 언론인들까지도 모두 찾아내 처형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농민들은 자신들이 기르던 가축을 도살하기 시작했어요. 어차피 빼앗길 것이라면 내가, 혹은 우리 가족이 다 먹어버리는 것이 나았거든요. 하지만 이럴수록 스탈린의 탄압은 더욱 강해졌지요. 농민들이 수확 뒤 들판에 나가 이삭줍기를 하거나 미처 못 캔 감자를 캐와도 잡아 들여 죽이거나 감금해버렸어요.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먹을 식량이 더욱 부족해졌고 1932년 가을부터는 아사 (餓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가축들이 없으니 농업 생산량은 늘어날 수 없었는데, 당이 정한 공출량은 줄어들지 않았거든요. 우크라이나 전 지역이 대기근의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 스탈린과 당은 구호 식량을 주기는커녕 다른 지역에서 곡물이 들어오는 것조차 막아버렸어요.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은 흙, 벌레, 심지어 인육을 먹는 끔찍한 행위까지 했어요. 외국으로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본인의 선전정책과 사회주의식 경제체제에 흠이 갈까 이마저도 모두 통제해버렸죠.

1932년 가을부터 1933년까지 약 8개월간, 하루 평균 1만5000명씩 아사자가 나오는 비극이 계속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가장 큰 피해를 당했지만 카자흐스탄 등 다른 지역들도 피해를 당했어요. 이 기간 대기근으로 굶어 죽거나 질병에 걸려 사라진 인구가 약 500만 ~ 1000만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통계도 있어요. 자연재해가 아닌 가혹한 통치로 10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한 것은 인류 역사상 큰 비극이었어요.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년 11월 넷째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추모 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답니다.

 

 

 

 

홀로도모르를 보도한 1934년 8월 6일 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 1면. / 위키피디아

 

 

 

1933년 홀로도모르를 기리는 엠블럼 (상징 표시)을 정중앙에 배치한 1933년 우크라이나 우표. / 위키피디아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 · 구성 = 안영 기자 (anyoung@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1월 11일자]

 

 

728x90

'신문은 선생님 > 숨어있는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르후 전투]  (0) 2023.03.17
[신한촌 건설과 이민]  (0) 2023.02.26
[모병 광고와 반전 운동]  (0) 2023.02.23
[중립국의 역사]  (0) 2023.02.14
[세계의 마지막 군주들]  (0) 2023.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