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숨어있는 세계사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드무2 2023. 3.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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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왼쪽) 브라질 대통령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오른쪽)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현지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있어요. 이날 양국 정상은 남미 공통 화폐인 '수르 (Sur)'를 만들고자 협의 중이라고 밝혔지요. / EPA 연합뉴스

 

 

 

남미의 두 강대국, 쿠데타와 경제 위기에 시달렸어요

 

 

 

브라질, 1982년 가장 외채 많은 나라

경제난에 쿠데타 잇따랐던 아르헨은

총 세번의 IMF 구제금융 받았어요

 

 

 

지난달 24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났어요. 남미 최대 국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이끄는 두 정상은 남미 공통 화폐인 '수르 (Sur)'를 만들고자 협의 중이라고 밝혔어요. 두 나라는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규제를 간소화하려면 공동 화폐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세계의 경제학자들은 양국 경제가 불안해 공통 화폐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고 보고 있어요. 1982년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 사회변혁에 대한 세계의 불신 어린 시선을 비판하면서 이를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고 이름 붙였죠.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이러한 시각은 그다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라틴아메리카 경제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밝지 않거든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적 난관이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 그 역사를 한번 되짚어 볼까요?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2007년도 모습. 브라질 사상 첫 노동 계급 출신 대통령인 그는 브라질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꼽힌답니다. / 위키피디아

 

 

 

브라질 국기. / 위키피디아

 

 

 

인플레이션과의 싸움, 브라질

1964년부터 1985년까지 브라질에서는 군 (軍)의 장군이 이끄는 권위주의 정부가 연이어 등장했어요. 이 시기 브라질 경제는 매우 어려웠어요. 물가 상승률은 1950년대 말 연 50%를 넘어섰죠. 1969년 일시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시기도 없었지만 1974년 석유파동이 터지자 문제가 더 심각해졌어요. 국제유가가 폭등해 높은 가격에 석유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국내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어요. 1950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연 100%를 넘었고, 외채 (外債)가 증가했으며, 산업 생산은 급격히 감소했어요. 1982년 말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외채가 많은 나라가 돼 (870억달러), IMF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게 됐어요.

군사독재가 끝나고 1985년 조제 사르네이 지아라우주 코스타가 대통령이 된 이후 펼친 경제 안정화 정책이 일정 수준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브라질 경제는 여전히 불안했어요. 1991년 초 물가 상승률은 연 1585%에 이르렀어요. 그러다 1993년 말 재정부 장관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가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어느 정도 안착시켰고, 그 성과로 다음 해 대통령으로 당선됐어요.

2002년에는 브라질의 첫 노동 계급 출신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그는 경제 부문의 핵심적인 지위에 보수파 인사들을 임명하면서 온건한 정치를 시작했고, 해외 금융기관들은 브라질의 신용 등급을 상향 조정했어요. 브라질 정부는 2년 동안 기초 재정 흑자를 달성했고, 2005년에는 계획했던 것보다 2년 앞당겨 IMF에 채무를 전액 상환했어요. 룰라는 저소득층 가정에 매달 약 35달러를 주는 빈곤층 원조 정책을 도입했는데 국가의 재정 부담이 매우 컸지만, 하층 계급에서 큰 지지를 얻었어요.

룰라는 노동당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인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2006년 다시 대통령이 됐어요. 그의 경제 개혁 정책이 조금씩 효과를 내며 브라질 1인당 국내총생산이 3배 증가하고 국가신용등급도 상승했어요. 그는 퇴임 후 부패와 관련된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2021년 복권했고 지난해 10월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승리해 지난 1월 취임했어요.

브라질의 저소득층 인구는 여전히 많고, 불평등한 부의 재분배는 사회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특히 빈곤과 마약 조직에 의한 치안 불안도 큰 문제가 되고 있어요. 룰라 대통령이 앞으로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1946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된 후안 도밍고 페론. 80년 가까이 아르헨티나에 '페론주의'를 드리운 장본인이죠. / 위키피디아

 

 

 

아르헨티나 국기. / 위키피디아

 

 

 

여전한 페론주의,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 토지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전통적 지주계급이 사회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았어요. 이들은 농업 · 축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이끌며 군부와 결탁해 사익을 추구했죠. 1943년 청년 장교였던 후안 도밍고 페론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부통령 겸 노동장관으로 취임했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했어요. 그는 아르헨티나를 두고 "소는 살찌고 노동자는 영양실조에 걸린 나라"라고 말했어요. 1946년 대통령이 된 페론은 서민과 노동자들의 경제 지위 향상과 복지 향상을 위한 사회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를 '페론주의'라고 불러요. 이러한 경제정책은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한계에 부딪혔어요. 1949년 물가가 전년보다 2배나 올랐고, 심각한 가뭄으로 농산물 수출까지 줄어들었어요. 페론은 새로운 재무부 장관을 임명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한편, 재선을 금지한 헌법을 고쳐 다시 대통령이 됐어요.

하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이 이어지면서 페론은 1955년 우익 군부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 스페인으로 망명했어요. 그가 없는 아르헨티나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면서 큰 혼란을 맞았죠. 1972년 경제 위기와 사회 혼란으로 궁지에 몰린 군사정부는 다시 페론을 귀국시켰고, 1973년 그는 다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됐어요. 1974년 페론의 사망 이후 부통령이자 페론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됐지만,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1976년 3월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 정권은 1982년까지 지속했는데 그 와중에 의회 해산, 노조 활동 금지 등 사건이 일어납니다. 또 군부 독재 시기였던 1978년에서 1980년까지 금융 · 무역 자유화 등 대외 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외국 자본이 과도하게 유입됐고, 금융시장이 불안해졌어요. 여기에 1982년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지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경제도 위기에 처하게 됐어요. 물가는 1982년 200%, 1984년 627%, 1985년 700%로 치솟았죠.

1989년 페론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카를로스 사울 메넴 아킬이 대통령이 됐어요. 하지만 페론과 달리 메넴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해 보호무역을 폐기하고 자유시장 정책을 추진했어요. 금융 불안을 잠재우는 정책을 펴 인플레이션은 잡히는 것 같았지만, 수출보다 수입을 증대시켜 수출업자를 비롯한 국민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됐죠. 결국 아르헨티나는 1995년, 1997년, 2001년 IMF 구제금융을 받게됐어요. 이후 페론의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에두아르도 알베르토 두알데,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와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와 같은 사람들이 연이어 대통령으로 당선됐어요. 그들은 어떤 정책을 취하든 일단 '페론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페론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워 있는 셈이죠.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기획 · 구성 = 안영 기자 (anyoung@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2월 1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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