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현의 해협의 문명사

[간몬해협]

드무2 2023. 5. 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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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몬해협]

 

 

 

일본 혼슈와 규슈 사이의 좁은 해협인 간몬해협 모습. 일제시대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과 청년 유학생 등 많은 사람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이곳을 거쳐갔다. / 위키피디아

 

 

 

혼슈와 규슈 사이 간몬해협··· 역사의 온갖 무게를 안고 흘러간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대한해협과 세토나이카이해 연결하는 엄청난 물살의 좁은 물목

100만명 동포 탄 관부 연락선, 윤심덕 · 김우진도 여기서 몸 던져

메이지유신 · 청일전쟁도··· 한일 교류와 대결 역사 모두 품고 흘러

 

 

 

거센 물줄기가 흘러간다. 혼슈와 규슈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엄청난 물살이 화살처럼 빠져나간다. 시모노세키항과 건너편 기타큐슈의 모지항을 연결하는 거대한 간몬교가 해협을 가로질러 떠있다. 대한해협과 일본의 세토내해를 연결하는 지극히 좁은 물목이다.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다. 겐지와 헤이케군이 간몬해협 겐페이 대해전의 슬픈 역사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빠른 것은 해류만이 아니다. 숨 가쁜 역사의 소용돌이도 해협을 흘러갔다. 간몬해협에만 서면 숨이 막힌다. 한국인의 한을 이만큼 품고 흘러가는 해협도 없기 때문이다. 통감부가 설치되던 1905년 9월 11일, 관부연락선 이키마루가 처녀 출행한다. 이키마루도 쓰시마와 규슈 사이의 징검다리 섬인 이키에서 따왔다. 정기 연락선 개통은 식민지와 종주국 간에 본격적으로 혈맥이 통하기 시작하였음을 뜻했다.

식민지 지식 청년 유태림이 식민지 모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끝내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 인간마저 잡아먹는 상황을 예리한 필치로 그려낸 이병주의 장편소설 '관부연락선'이 떠오른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 북규슈의 아소 탄광 등으로 숱하게 징용 끌려온 이들이 배에서 내렸다. 괴나리봇짐에 지나지 않는 소지품을 가슴에 안고 식민지 모국에 첫발을 내디뎌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남부여대하여 동포들이 몰려들어 아우성치던 곳이기도 하다. 정확한 통계 수치조차 잡히지 않지만, 혹자는 100만명이 넘게 시모노세키를 통과한 것으로 추정한다.

청운의 꿈을 품은 지식 청년들도 유학길에 올랐으며, 예쁘게 단장한 예술인도 배에서 내렸다. 목포 부자인 극작가 김우진이 당대의 가수 윤심덕과 바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조금 가다가 몸을 내던진 곳이기도 하다. 식민지 백성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한 몸부림이었다.

검은 때깔의 험상궂은 증기선 관부연락선은 사라졌다. 이제 말끔하게 생긴 페리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해협 아래로 신칸센이 해협의 물살만큼이나 빠르게 관통한다. 해협 터널에는 인도도 있어 도보로 15분이면 상대편에 닿는다. 그러나 페리호로 말끔하게 단장하고 빠른 신칸센이 지나친다고 해서 간몬해협의 드센 파고까지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모노세키는 두 권역으로 나뉜다. 간몬해협 북쪽은 어시장과 국제 여객선 터미널, 아키타 상회, 나베초 우체국 같은 양풍 건물이 남아있다. 19 ~ 20세기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바다로 향한 아카마 신궁은 붉은 칠이 검푸른 바다 빛과 묘한 대조를 빚어낸다. 신궁에 오르면 간몬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총신사를 비롯해 먼 길 해로로 떠나는 이들은 아카마 신궁에 반드시 들렀다고 한다.

간몬해협에 연한 조후는 모리의 5만석 영지다. 조후 앞바다에서 세토내해가 시작된다. 간몬해협을 통과한 조선통신사들이 여기를 반드시 거쳤다. 조후도 조슈번에 속했다. 사쓰마번과 쌍벽을 겨누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의 주역인 조슈번은 오늘날 시모노세키를 포함하는 야마구치현 일대로 혼슈 서쪽 끄트머리다. 오늘의 야마구치현 일대다.

 

 

 

전략적 요충지인 간몬해협을 지키는 대포를 재현해 놓은 모습. 청일전쟁 뒤 청국과 일본은 1895년 이 해협에 있는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 주강현

 

 

 

건너편 모지항도 전략적 요충지다. 1889년 특별수출항으로 지정된 이래로 대륙 무역의 본거지였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고급 광목을 소창이라고 불렀는데, 그 소창 역시 시모노세키 건너편에 있는 고쿠라 (小倉)를 뜻한다. 러일전쟁 이래로 군인 1만여 명이 주둔해 온 군사 산업도시다.

해협에 걸쳐진 다리 아래에 전해지는 조슈포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조슈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거대 포신이 해협을 겨눈다. 흡사 강화도 염해의 거칠고 좁은 해협에 돈대들이 포진한 것같은 양상이다. 실제로 1863년에 조슈번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국 함대를 포로 공격했다. 이듬해인 1864년에는 4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점령한다. 이른바 시모노세키 전쟁이다.

역사는 해협의 물줄기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갔다. 1866년 메이지유신의 기폭제가 될 그 유명한 삿초 동맹이 타결된다. 사쓰마번과 삿초 동맹을 맺어 유신을 성공시킨 조슈번을 모르고서는 메이지유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치열한 경쟁심을 발휘하던 조슈와 사쓰마는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바쿠후 (막부) 타도를 위해 극적으로 밀약한다. 사쓰마나 조슈나 모두 바다를 십분 활용한 번들이었다.

 

 

 

 

 

 

일청강화기념관을 들른다. 우리는 청일전쟁이라고 하는데 일본인에게는 당연히 일청전쟁이다. 1895년 4월 17일, 청국의 전권대사 이홍장과 일본 전권공사인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곳이다.

청일전쟁에서 패해 시모노세키까지 불려온 이홍장은 해방론을 내세워 북양함대를 창설한 노련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양무파의 거두였다. 대국의 자존심을 버리고 강화조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던 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강화기념관을 애써 복원시킨 의도나 아카마 신궁에 신주처럼 모셔놓은 러일전쟁 당시의 포탄 2개는 중국과 러시아에 맞장뜨던 자신들의 힘을 길이길이 전하려는 뜻으로 읽힌다.

일청기념관에 료마가 쓰던 유리잔이 놓여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활동하던 가고시마 일대의 사쓰마번에서 구워낸 유리잔이다. 끊임없이 한국인 관광객들은 무심코 찾아들고, 간몬해협 역시 역사의 무게와 상관없이 무심코 흐르고 있을 뿐이다.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4월 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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