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할아버지]

드무2 2023. 5. 3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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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말도

비가 오시네.

 

ㅡ 정지용 (1902 ~ ?)

 

 

 

외래어는 하나도 쓰지 않고, 한자어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로만 쓴 아름답고 재미난 동시. '도롱이' 대신 우산을 쓰며 우리가 잃어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한다. "하늘이 시커머니 어째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던, 귀신처럼 정확했던 그분들의 일기예보가 그립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정지용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참신한 이미지와 정제된 언어가 돋보이는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에 이토록 향토색이 진한 서정시를 쓴 시인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지용은 6 · 25 전쟁이 터진 뒤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그뒤 행적을 알 수 없다. 납북되던 중 폭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말도 있고 북한에서 죽었다는 기사도 있다. 납북 ·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다 1988년 해금되어 정지용의 시집이 간행되었다.

 

최영미

시인 · 이미출판 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5월 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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