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⑰ 떨어진 6 · 25의 별
월튼 워커 장군(지프 위에 올라선 사람)이 1950년 7월 낙동강전선의 국군 1사단을 방문한 모습이다. 지프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이다. 번쩍거리는 철모를 쓰고 전선을 누빈 워커는 낙동강 전선 방어로 북진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그는 특급 소방수였다. 밀려오는 불길을 발견하면 지체 없이 그 앞으로 달려가는 특급 소방수. 그가 출동하면 불길은 맥을 못 추고 기세가 꺾이게 마련이었다. 6·25전쟁이라는 거센 불길 앞에서 그는 타고난 전사(戰士)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낙동강 전선 지킨 ‘불독 장군’ 워커 … ‘지프 사고 전사’ 날벼락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을 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냈던 월튼 워커. 현장을 누비며 불길을 진압하는 최고의 소방수였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 1950년 12월 23일이었다. 타고 가던 지프가 국군 6사단 소속 병사가 몰던 트럭에 부딪힌 것이다. 미 2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아들 샘 워커 대위가 공을 세워 전날 은성무공훈장을 받자 부대를 찾아가 축하해주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의정부 근처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국군 1사단이 정신없이 임진강으로 후퇴하던 도중에 받은 비보(悲報)였다.
그의 애칭은 불독이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는 싸움꾼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선 머물던 막사를 나서면 쉼 없이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장병을 독려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별안간 나타나 전쟁터의 현황을 파악하고 간단한 말로 요점을 정리해 작전 지시를 내린 뒤 역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는 내게 ‘공세방어’를 가르쳤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던 무렵이었다. 적에게 몰릴 때는 항상 역습을 염두에 두라는 내용이었다. 반격을 노려야 적의 예봉을 꺾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전장에서 그가 내게 가르쳐 준 작전의 요체였다. 50년 9월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낸 뒤 반격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느닷없이 “당신, 미국 참모학교에서 공부를 해 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우회전술(bypass)을 택하라”고 충고했다. 우세한 적의 정면을 피해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그 현장에서 내리는 지시는 매우 유용했다. 핵심을 꿰뚫는 전법이었다.
월튼 워커 당시 미 8군 사령관.
그는 ‘소방대 전술’을 구사했다. 예비 기동 타격대를 마련해 두고 다급한 전선에 이를 재빨리 투입하는 전술이다. 국군 1사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2만1000명에 달하는 적 3개 사단의 공세에 직면했다. 그때 병력 7600명의 우리 사단은 그가 보내 준 미군 23연대와 27연대 병력과 함께 사상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을 벌였다. 아울러 그는 역사상 처음 미군을 한국군 지휘관 휘하에 보내줘 다부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다.
일선 미군 지휘관들은 그가 나타나면 긴장했다. 꾸물거리면서 적 앞으로 나서지 않는 지휘관은 더욱 그랬다. 그는 이들을 아주 호되게 다뤘다.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얼굴 앞에 바짝 갖다 대면서 “공격하라고, 공격 말이야”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한국군에 대한 불만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자주 토로했다. 매우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그에게 기가 세기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도 질렸던 모양이다. 훗날 이 대통령은 워커 장군 이야기가 나오면 “그 친구, 참 버릇없는 사람이었어”라면서 끌탕을 칠 정도였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작전을 시작할 무렵이던 50년 7월 말 그가 한 말은 아주 유명하다. “적에게 한 치의 땅이라도 내준다면 수많은 전우가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내린 ‘전선사수(Stand or Die)’ 명령은 전사로서의 그의 기백을 보여준다. 그는 또 당시의 미군들에게 “제2의 됭케르크 작전(1940년 5월 프랑스 됭케르크 항구에서 독일군에 몰린 연합군 30만 명의 대규모 철수)은 없다”며 비장한 결전의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전쟁 초반 거셌던 북한군의 공세로부터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다는 ‘부산 교두보 작전’을 구상해 실천에 옮겼다. 그의 지휘로 마침내 국군과 연합군이 북진하는 역전의 기틀이 만들어졌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미군을 통틀어 그는 가장 선임자였다. 1912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제1차 세계대전 때 미 5사단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전차전의 귀재였던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아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늘 번쩍거리는 헬멧을 쓰고 지프와 L5 경비행기로 현장을 누볐다. 지프에는 모래부대를 항상 깔았다. 지뢰 폭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의 지프는 결국 지뢰 아닌 충돌 사고로 주인을 보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장군. 그 용맹했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17) 떨어진 6·25의 별
[전쟁사 돋보기] 미 8군
미 8군은 6·25와 냉전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한반도 방위의 핵심 전력으로 남아 있다. 6·25 당시 한반도에 투입된 미 2, 7, 24, 25사단 등을 지휘했다.
1944년 6월 미 본토에서 창설돼 필리핀을 비롯해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섬 60개에 상륙해 작전을 펼쳤다. 그래서 ‘상륙형 8군(Amphibious Eigh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것도 8군의 동남아 전투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8군은 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진주했다. 48년 월튼 워커 장군이 사령관에 임명돼 병력을 다시 훈련시키던 중 6·25가 터지자 한반도에 투입됐다.
휴전 뒤 8군에는 미 1군단과 2, 7사단 등이 소속돼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베트남전이 터지면서 7사단이 빠져나가고 1군단은 미국 워싱턴주로 옮겨갔다. 현재 8군에는 미 2사단과 19지원사령부가 소속돼 있다. 미 태평양사령부와 합참의 지휘를 받는다. 2사단에는 중여단과 3개의 스트라이커여단, 전투항공여단이 있다. 스트라이커여단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에 주둔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 용산기지에 있는 미 8군 본부를 하와이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한국에 다시 두기로 했다. 한반도의 중요성과 안보 여건 때문이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미 8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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