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⑲ 서울을 탈환하라

드무2 2021. 5. 2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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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⑲ 서울을 탈환하라

 

 

 

 

 

 

 

유엔군의 거센 반격이 1951년 1월 15일 시작됐다. 미 25사단의 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이 선두에 나섰다. 1개 전차대대와 3개 포병대대 등 막강한 화력을 마이켈리스 연대에 지원해 연대전투단(RCT)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항공과 공병의 지원 아래 수원 방면으로 위력수색을 펼쳤다.



리지웨이, 후퇴작전 짠 참모 즉각 경질 … 반격이 시작됐다

 

 

 

위력수색은 적의 무력 상황을 가늠해 보기 위해 펼친다. 적의 저항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떠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다. 모든 작전에 독립 명칭을 붙이기 좋아했던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이번 작전을 ‘울프하운드(Wolfhound: 늑대)’로 명명했다.



연대전투단은 늑대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평택에서 오산을 거쳐 수원으로 향했다. 미군의 우세가 아주 뚜렷했다. 미군의 진군에 적은 숨기에 급급했다. 미군을 피하려는 자세가 분명했다. 길을 따라 밀고 올라가는 미군을 보고 중공군은 여주 등지의 산악지대로 숨기에 바빴다. 때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미군은 6·25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을 신비한 대상으로 본 적이 있다. 평안북도 운산에서 직면했던 중공군은 이상한 전술을 펼치는 데 능했다. 피리와 꽹과리 등을 불고 두들기면서 컴컴한 밤에만 나타나는 모습에 귀기(鬼氣) 비슷한 것을 느꼈다. 미군은 이들에게 심리적인 공황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월튼 워커 장군에 이어 미 8군 사령관을 맡아 6 · 25전쟁을 지휘하게 된 매튜 리지웨이 중장(오른쪽)이 1951년 2월 대규모 반격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일선 부대를 방문, 한 미군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슴에 매단 수류탄이 눈에 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그러나 이번에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중공군은 차가운 가을바람에 덧없이 흩날리는 낙엽과도 같았다. 밀고 내려왔던 전선을 무기력하게 내주는 중공군의 실제 모습에 미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미군뿐이 아니다. 마이켈리스의 질풍과 같은 진격, 맥없이 길을 내주는 중공군의 모습을 지켜보는 국군과 다른 연합군의 사기도 오르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더 이상 신비의 군대가 아니었다. 지치고 굶주려 정면대결에 나서지 않는 허약한 군대였다.



그 와중에 잠시 만났던 미 25사단의 윌리엄 킨 소장은 나를 보자 울프하운드 작전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중공군과 싸울 때 이번 작전이 모델이 될 것”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리지웨이의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는 미군 장병을 향해 “우리는 미국의 합법적인 정부의 명령에 따라 한국에 왔다.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며 꺼져 가던 미군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다.



그는 전임 월튼 워커 장군과는 다른 전법을 선택했다. 워커 장군은 전차전의 명수였던 패튼의 부하답게 기갑부대를 앞세워 돌파를 시도하는 타입이었지만 리지웨이는 달랐다. 그는 각 부대를 옆으로 펼쳐 인접 부대 사이의 연결을 중시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전법을 택했다. 우회와 매복, 그리고 포위에 능한 중공군의 전술을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당시 리지웨이 사령관의 작전명은 ‘선더볼트(Thunderbolt: 벼락)’였다. 작전이 펼쳐지면서 나온 구호는 ‘어깨를 나란히(Shoulder to shoulder)’. 서로 가까이 붙어 밀집하라는 뜻이다. 리지웨이는 부대와 부대의 간격을 좁히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그는 또 지휘관들에게 ‘2단계 하급제대 지휘’를 강조했다. 즉 “사단장은 연대·대대까지 나가라. 연대장은 대대에 이어 중대까지 가서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부대 간의 횡적 유대와 함께 부대 내 상하 간의 종적인 유대도 강화하라는 뜻이었다.



리지웨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지휘하는 미 8군의 사령부는 당시 대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지휘관은 전선에 바짝 붙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현장의 감을 무시하고 작전계획을 세우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과 함께 머물면서 숙식을 함께했다. 밀번 군단장이 나이는 어리지만 상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과 붙어 지내면서 얼마나 곤혹스러워했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는 대목이다.



리지웨이는 또 1군단의 작전계획을 살펴보다 작전참모가 후퇴 위주로 작전을 짜놓은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 작전참모를 경질해 버렸다. 당시 그가 지휘했던 강력한 반격작전이 제대로 펼쳐진 이유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1951년 2월 초, 국군 1사단이 속한 미 1군단은 서울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 사단은 서울을 거쳐 임진강으로 나아갔고, 미 3사단은 의정부를 향했으며, 미 25사단은 양수리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미 9군단 산하 미 1기병사단과 24사단, 국군 6사단은 이천과 양평, 여주 방향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은 그냥 밀리지 않았다. 평원에서 밀고 올라오는 미 1군단의 예봉을 피해 그들은 산악 쪽으로 주력부대를 옮겼다. 산악지형에서 펼치는 그들의 전술에 국군과 미군은 다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⑲ 서울을 탈환하라

 

 

[전쟁사 돋보기] 연대전투단

 

 

 

미 스트라이커 부대 훈련 모습.

 

 

 

연대전투단(RCT: Regimental Combat Team)은 사단과 별개로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능을 보강한 연대를 가리킨다. 원래 사단 휘하의 보병연대는 보병대대와 대전차·박격포 부대만 보유해 단독 작전을 펼치기에는 전투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필요 시 사단장은 휘하 포병대대(야포 18문)·전차중대(탱크 12대)·전투공병·장갑·방공(防空) 부대에다 지원 병력인 정찰·통신·보급·헌병·의무 중대 등을 결합해 연대전투단을 편성할 수 있다. 육군의 모든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 병력은 5000명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때 RCT를 처음 사용해본 미군은 6·25전쟁 당시 평택선인 북위 37도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이를 투입, 전력을 탐색했다.


오늘날 RCT는 자동화 지휘통제시스템(C4I)을 사용하면서 스트라이커 장갑차 등으로 무장한 여단전투팀(BCT: Brigade Combat Team)으로 진화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 투입됐다. 주한 미 2사단도 1개 중여단(한국 주둔)과 3개 스트라이커여단전투팀(SBCT) 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연대전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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