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 산책하는 베토벤을 그린 그림. 평소 베토벤은 숲길을 산책하며 악상을 가다듬곤 했대요. / 베토벤박물관
산책 · 부부 싸움 · 사냥 떠오르는 피아노 연주곡 썼죠
피아노 소나타 32곡 모두 고유 색채
선물 받은 피아노 치며 만든 곡은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웅장한 규모
오는 28일부터 7월 9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가 7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탁월한 영감과 뛰어난 완성도로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은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완성하고 싶어 하는 레퍼토리죠. 부흐빈더는 한두 번도 어려운 이 전곡 연주 시리즈를 무려 60회 이상 성공시키며 현존하는 최고의 베토벤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명곡들이 참 많습니다. 8번 '비창', 14번 '월광', 23번 '열정', 26번 '고별' 등은 인상적인 부제와 함께 잘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 곡들보다 약간 덜 유명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소나타도 있어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속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작품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전원' 과 '부부 싸움'
베토벤의 교향곡 6번은 '전원' 이라는 부제로 유명하죠. 그런데 피아노 소나타에도 '전원' 이라는 별명이 붙은 작품이 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그의 피아노 소나타 15번 작품번호 (Opus, 줄여서 Op.) 28은 독일 함부르크의 한 출판업자가 '전원 (Pastorale)' 이라는 별칭을 붙였어요. 작품 전체에 흐르는 평온하고 낙천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평소 베토벤은 숲길 산책을 즐겼는데, 거기서 악상을 가다듬곤 했죠. 베토벤은 "덤불과 숲을 거닐며 나무와 풀, 바위 사이를 산책할 때 참으로 행복하다. 나처럼 전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소나타에는 이런 그의 내면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소나타는 모두 네 악장으로 구성돼 있어요. 편안한 기분으로 선율을 노래하는 잔잔한 악상이 인상적인 1악장, 슬픈 감정과 유머러스함이 번갈아 나타나는 2악장, 탄력 있는 리듬이 발랄함을 만들어내는 3악장과 단순하게 시작해 점차 화려함을 더해가는 4악장까지 모두 개성 있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소나타 내에서 특징이 뚜렷한 악장 때문에 별명이 붙은 경우도 있죠. 피아노 소나타 10번 Op.14-2 (1799)는 작은 규모의 작품으로 아기자기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에요. 흔히 '부부 소나타' 혹은 '부부 싸움' 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요. 소나타 형식에서 등장하는 두 개의 주제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그 모습이 부부간의 대화, 혹은 갈등을 연상시킨다는 베토벤의 제자 신틀러의 표현에서 이런 제목이 나왔습니다. 3개 악장 중 1악장이 특히 그러한데, 달콤한 느낌의 주제로 시작되는 첫머리의 악상과 이어지는 밝은 느낌의 둘째 주제, 계속해서 등장하는 대화풍의 진행은 정말 남녀가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는 듯합니다. 이 곡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역시 사랑의 대화처럼 들리는 소나타가 또 있어요. 소나타 27번 Op.90(1814)은 두 악장 구성인데요. 1악장은 악상이 매우 변화무쌍하고 극적이라 듣는 이를 긴장시키고 2악장은 이와 대조적으로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의 노래가 아름답게 이어지죠. 이 곡에 대해서는 작곡가가 직접 언급한 내용이 남아있어요. 1악장은 '이성과 감정의 싸움', 2악장은 '연인들끼리의 대화'라고 베토벤은 설명했습니다.
'사냥' 과 '함머클라비어'
베토벤이 1802년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8번 Op.31-3은 모두 네 악장 구성인데, 통상 한 악장 정도 들어 있는 느린 악장이 하나도 없다는 특징이 있죠. 이 중 마지막 악장은 '프레스토 콘 푸오코 (매우 빠르고 정열적으로)' 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어요. 이탈리아의 춤곡인 타란텔라가 등장하는 이 악장은 8분의 6박자로 돼 있는데, 강하게 '쿵쿵' 하는 느낌으로 울리는 리듬이 마치 사냥터에 나간 말들이 힘차게 달리는 소리를 연상케 해 '사냥'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악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기교를 화려하게 나타낼 수 있는 곡입니다.
1819년 출판된 피아노 소나타 29번 Op.106에는 '함머클라비어'라는 부제가 있어요. 함머클라비어는 '망치를 사용해 연주하는 피아노' 라는 뜻인데, 이 자체로 현대의 피아노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곡은 베토벤 소나타 가운데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연주 시간이 다른 소나타 평균보다 약 두 배 길이로, 약 45분간 연주되는 대곡이죠. 곡에서 요구되는 피아노 연주의 기교도 이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어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능력을 120%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토벤은 평소 피아노의 기술적인 발전에 매우 관심이 많았는데요. 1818년 여름 영국 런던의 피아노 제작업자 브로드우드 악기에서 새로운 피아노를 선물 받은 후 매우 감격해 이 악기의 성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거대한 소나타를 작곡해요. 소나타 29번은 한 대의 악기로 연주하지만 마치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소리가 들어 있죠. 아울러 4악장에서는 당시 베토벤이 즐겨 사용하던 푸가(여러 개의 멜로디가 한꺼번에 등장해 발전해가는 작곡 기법)가 대규모로 사용돼 멋진 피날레를 이루고 있습니다.
▲ 영국 브로드우드사의 1817년 피아노. / 베토벤하우스
베토벤이 만든 32개의 소나타는 한 곡 한 곡이 모두 고유의 색채와 의미를 갖는 음악사 속 명곡들이죠. 차례대로 모두 들어보면 위대한 작곡가의 생애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 오스트리아 빈에서 베토벤이 청력 회복을 위해 머문 곳. 지금은 베토벤 박물관. / 베토벤박물관
▲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자필 스케치. / 미국 모건라이브러리
김주영 피아니스트 ·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6월 1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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