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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28

['꿈꾸는 백마강' '선창' 쓴 조영출의 월북이 빚은 혼란]

['꿈꾸는 백마강' '선창' 쓴 조영출의 월북이 빚은 혼란] 일러스트 = 한상엽 친일파였다 '김일성 장군님' 품에 안긴 스타 작사가의 처세술 일제때 가요계 군림하다 해방 후 좌익 운동 앞장 인민군가 써 北계관인 돼 김일성 비호에 親日 묻혀 조영출이 배신한 남한엔 허무한 '노래비' 만 남아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 /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 /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 (‘선창’ · 1941) ‘선창’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데뷔 2년 차 신인 가수 고운봉은 일약 조선 최고의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에서 80년 이상 수많은 가수가 무대에 올렸고, 노래방 애창곡 순위에서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1..

[신의주 학생의거와 대대적 우파 탄압]

[신의주 학생의거와 대대적 우파 탄압] 일러스트 = 한상엽 '자유' 외치는 학생 시위대에 공산당은 따발총을 쐈다 소련군 범죄로 여론 악화 의거 후 '반동분자 숙청' 반공 청년들 월남 본격화 “기마순사는 학생 떼를 제지하려고 말고삐를 휙 돌린다. 그와 동시에 도청 편에서는 별안간 으악! 소리가 들리자 후두두 후두두 콩 볶는 소리가 바로 발 밑에서 나듯이 난다. 그 한순간이 지나니까 사방이 괴괴하여졌다. (···) 그러나 기마순사에게 길이 막혀 갈팡질팡하던 학생들만은 그 고함과 총소리에 피가 다시 끓는지, 말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틈을 족제비처럼 살살 빠져서 굳게 닫힌 철창문을 바라보고 단숨에 뛰어들어간다” (염상섭, ‘그 초기’, 1948) 1937년 만주로 이주한 소설가 염상섭은 압록강 건너편 국..

[반탁학생대회와 학병동맹사건 목숨 건 '전쟁' 의 시작]

[반탁학생대회와 학병동맹사건 목숨 건 '전쟁' 의 시작] 일러스트 = 한상엽 "신탁통치 반대" 학생 시위에 좌익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남북 좌익, 찬탁으로 돌변 박헌영 "소련 편입 희말" 우익은 반탁학생연맹 짜 "反민족 공산당 타도" 인민당 시설 습격하자 총 · 폭탄으로 피의 복수 1945년 세모 (歲暮), 한국인의 관심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 영 · 소 외상 (外相) 회의에 쏠렸다. 성급한 언론들은 협정 발표 전에 외신을 인용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12월 28일 (한국 시각) 모스크바에서 공포한 ‘조선 문제에 대한 3상 협정’ 의 주요 내용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미 · 영 · 중 · 소 4국 주도로 5년간..

[댄스홀 '국제문화사' 와 김계조 사건]

[댄스홀 '국제문화사' 와 김계조 사건] 일러스트 = 한상엽 조선총독부는 왜 '미군 위안용 댄스홀' 을 세웠나 '나카무라' 김계조, 해방 후 미쓰코시 백화점 3층에 "미군 몰려오니 여성 보호" 화려한 대형 댄스홀 세워 미군과 이승만 등 축출해 건국 방해한다는 의심 사 돈 댄 총독부 인사 줄소환 “일본 여성을 지키시오.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당신이 직접 나서도록 하시오.” 1945년 8월 17일, 패전 이후 구성된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첫 각의 (閣議) 직후, 국무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이 경시총감에게 지시했다. 이튿날 경시청 보안과장은 도쿄 요리점 조합장들을 불러 “연합군 장병을 ‘위안’ 하기 위한 각종 시설을 설치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했다” 며 협조를 요청했다. 8월 23일, 도쿄도 산하 접객업 ..

["민족의 영웅" 이승만의 환국]

["민족의 영웅" 이승만의 환국] 일러스트 = 한상엽 조선공산당은 왜 이승만을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했나? 해방 두 달 만의 귀국 험난했지만 美 설득 좌우 다 지도자로 추대 李는 반공 · 반소주의자 공산당은 국민 지지받는 그를 이용하려 했으나 훤히 꿰뚫고 "화합" 강조 이승만은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워싱턴DC 자택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자신의 집에 모여든 동지들에게 그는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미국이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고 우려를 표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이틀 후인 8월 8일, 이승만은 백악관에 귀국 청원 편지를 보냈다. 군 작전 지역이었던 한국으..

[댄스홀과 국치랑 유흥업계도 해방 만끽]

[댄스홀과 국치랑 유흥업계도 해방 만끽] 1945년 10월 23일 자유신문에 실린 만화 '국치랑들의 이꼴저꼴' / 국사편찬위원회 민족 해방과 함께 찾아온 '풍기 해방' 광복과 동시에 범람한 기생 요릿집과 댄스홀 미군 상대하는 여성 출현 左右 투쟁 치열하던 때 밤마다 유흥하던 이들은 대체로 지식인이었다 “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 (許)하여 주십사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 일본제국의 온갖 판도 내와 아세아의 문명 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우리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 함은 심히 통한할 일로, 이제 각하에게 이 글을 드리는 본의도 오직 여기 있나이다.” (‘삼천리’ 1937년 1월 호)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우가키 조선..

[미군 진주와 미군정 출범]

[미군 진주와 미군정 출범] 일러스트 = 한상엽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왜 조선총독을 유임하려 했나? 하지는 용맹한 야전장군 그러나 행정경험 없었고 한국 상황에도 무지 아베 유임은 큰 오판 비판 커져 교체했지만 일부 관리는 잔류시켜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이 남한 점령의 임무를 맡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소련군이 남하하는 한반도로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연합군최고사령부 (GHQ)’ 사령관 맥아더는 명문 군인 가문의 후예로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육군참모총장까지 최연소 승진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우던 최고의 엘리트 군인이었다. 또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히던 사실상 정치인이었다. 그에 반해, 남한의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일리노이주 농부의 아들로..

[한반도에 들어온 '붉은 군대' 선량한 해방군만은 아니었다]

[한반도에 들어온 '붉은 군대' 선량한 해방군만은 아니었다] 1945년 '붉은 군대'의 선전 포스터. 태극기를 든 소련군의 모습이 흥미롭다. 북한에서 인공기가 사용된 것은 1947년 이후였다. 접혀서 훼손된 부분은 복원했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제공 '8월의 폭풍' 그리고 소련군의 두 얼굴 8월 9일 군사행동 개시 빠르게 나진 · 청진 점령 소련군 환영집회 이어져 약탈 · 성폭행도 일삼아 조선에 독립이 오기 전 서둘러 전쟁에 개입한 것 함경북도 회령 출신 소설가 최인훈은 열 살 때 겪은 소련군의 진주 (進駐)를 훗날 이렇게 기억했다. "소련군은 국경지역 일본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들어왔다. 만주와 소련에 이웃한 함경북도의 북쪽 지역은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전쟁마당이 되었다. 두만강가에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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