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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역사 5

[근대공화국 대한민국 ① 조선시대에 없었던 대한민국 풍경들]

[근대공화국 대한민국 ① 조선시대에 없었던 대한민국 풍경들] 식민 시대인 1926년 경복궁 앞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후 건국을 선포한 중앙청으로 사용됐다. 전쟁으로 파괴됐던 중앙청은 훗날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철거됐다. 그 사이 이 땅에는 봉건 왕조와 식민 시대가 지나고 공화국 시대가 도래했다. 경복궁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시산을 즐긴다. 부국과 강병으로 부활한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 시대다. / 박종인 기자 우리는 조선을 뛰어넘은 근대 대한민국이다 '부국과 강병을 통한 국민의 행복' 새 시대정신 무장한 대한민국 모순 많았던 조선왕조를 극복하고 조선에 없던 근대적 가치 도입해 식민지와 전쟁을 이겨낸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은 어떤 경로를 거쳤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

[근대로 가는 길목 ② 갑신정변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근대로 가는 길목 ② 갑신정변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경기도 여주 문장마을에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홍영식 무덤이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민비와 고종 부부 측근인 무당 진령군의 북묘 (北廟)로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살해됐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따르면, 홍영식은 살해된 뒤 다시 한번 토막이 나고, 가족이 수습한 그 시신 또한 한 번 더 참시됐다. 근대를 지향했던 한 지식인에게 닥친 가장 전근대적인 죽음이었다. / 박종인 기자 근대를 꿈꾸다 두 번 죽은 홍영식, 그가 여주에 잠들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 홍영식 북촌 노론 명문가 출신 개화파 박규수에게 '근대' 배워 1881년 수신사..

[조선에서 광대가 된 하멜 /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된 애덤스 / 영국에 있는 17세기 일본 갑옷]

[조선에서 광대가 된 하멜 /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된 애덤스 / 영국에 있는 17세기 일본 갑옷]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는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 (三浦按針) 묘가 있다. 미우라의 본명은 윌리엄 애덤스다. 423년전인 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리프데호가 난파하자 항해사 애덤스는 일본에 정착했다. 에도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외교 고문으로 고용하고 사무라이 신분도 줬다. 1613년 영국 동인도회사 클로브호가 일본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애덤스는 막부와 동인도회사를 중재해 히라도에 영국상관 개설을 도왔다. 클로브호 선장 존 새리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갑옷 2벌을 비롯한 선물을 받아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에게 헌상했다. 애덤스는 1620년 히라도에서 죽었다. 갑옷도 애덤..

[조선 최고 국립학교장 성균관 대사성]

[조선 최고 국립학교장 성균관 대사성] 서울 종로구 성균관에는 중종 때 윤탁 (尹倬)이라는 인물이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거대하게 서 있다. 그 앞에 성균관 강의 공간인 명륜당 (明倫堂)이 있다. 성리학 국가인 조선 왕국 최고 교육기관인 이 성균관 관장 대사성 (大司成)은 왕조 518년 동안 자그마치 2101명이었다.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 사림이 득세하고 전국에 서원 (書院) 설립이 시작된 중종 전까지 평균 14.6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급감했다. 대사성이 가장 자주 바뀐 시기는 정조 때로 재임 기간은 평균 1.2개월이었다. 이때는 하루에 세 번 대사성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정조 다음으로 짧았던 때는 고종 시대로 1.3개월이었다. / 박종인 기자 성리학 ..

[1898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 외국인 용병 고용 미수 사건]

[1898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 외국인 용병 고용 미수 사건] 1907년 9월 14일 영국 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대한제국 황실 사진. 제목은 ‘한국에서 벌어진 쿠데타: 신구 황제’로 돼 있지만 이 사진은 1907년 6월 11일 당시 경운궁(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일본군 대포 진헌식 장면이다.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일본군은 이날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에게 속사포 4문과 기관포 2문을 진헌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러일전쟁(1904)까지 고종은 끝없이 외국 공사관으로 파천을 시도했다. 1896년 아관파천은 여덟 차례 시도 가운데 유일한 성공작이었다. 고종은 허약해진 군사력을 파천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심지어 대한제국 설립 후 외국인 용병 30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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