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만주 2

[<17> 1931년 만주사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1931년 만주사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괴뢰 국가였다. 하지만 본질을 숨기기 위해 ‘오족협화(五族協和·다섯 민족의 협력과 화해)’를 내세웠다. 왼쪽 깃발은 1911년 신해혁명군 깃발, 중앙의 오색기는 장쉐량 군대 깃발, 오른쪽은 장제스군의 청천백일기다. 아래에는 ‘공화만세’라고 적혀 있다. / 위키피디아 '동양의 화약고' 된 만주··· 臨政이 상해로 간 건 '신의 한 수' 였다 신해혁명 후 만주, 중국 파벌들과 소련 · 日 뒤엉키며 무주공산 상태 위안스카이를 계승한 장쭤린 장제스에 밀려 만주 가다 日에 피살 관동군은 그의 아들 군대 공격하며 15년 전쟁의 지옥문을 열기도 韓中 좌익협력 아닌 우익협력 활발 이봉창 · 윤봉길 의거에 쓰인 폭탄 장제스 북벌에 참가한 인물이 제공 러시..

[중국인과 유대인 애증의 역사]

[중국인과 유대인 애증의 역사] 20세기 초 상하이 중국 상하이 화이하이도로 (옛 샤페이도로)의 20세기 초 전경. 중국과 유대인 사이에는 애증의 역사가 존재한다.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 사이의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상하이의 유대인 수가 4000명을 넘어섰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동양의 쉰들러 리스트··· 中 영사, 유대인 4000명 상하이로 대피시켜 상하이 유대인들, 英 ~ 인도 ~ 중국 삼각무역으로 국제화 기여 인도산 아편을 대량 수입해 중국을 병들게 한 주역도 유대인 日은 러일전쟁서 패전 직전에 유대인 ..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