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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6 · 25 전쟁과 초기 대응]

[⑧ 6 · 25 전쟁과 초기 대응] 맥아더에게 훈장 수여하는 이승만 6 · 25 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약 2주일 지난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했다. / 조선일보DB "전투기 보내달라" 6월 26일 새벽 3시, 잠든 맥아더를 깨웠다 6월 25일 오전 10시 첫 보고받아 주미대사 불러 무기 · 탄약 요청 軍에 지시해 한강 방어선 구축 부관이 맥아더 전화 안바꿔주자 "미국인도 한명씩 죽을것" 엄포 그날 오전 전투기 지원 끌어내 열세에도 항복 대신 저항 선택 외국 도움 불확실한 상황서 결단 軍 역량 집중 위해 ..

[⑮ 이승만의 허물]

[⑮ 이승만의 허물] 멱살 잡힌 국회 부의장 1954년 11월 29일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제2차 개헌안 가결을 선언하자 이철승 의원이 최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문제는 사사오입보다 '종신 대통령' 길을 연 개헌 이었다 대통령 임기 중임 제한한 규정 "개헌 공포한 대통령은 예외" 개헌안에 부칙 달아 편법 우회 이기붕, 1956년 부통령 선거 지자 1960년 조직적 부정 선거 획책 4월 19일 서울서 대규모 시위 경찰 발포로 학생 100여명 숨져 이승만, 일주일 뒤 하야 선언 1954년 11월 27일 국회는 제2차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쳤다. 개표해 보니,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개헌안은 재적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

[⑨ 6 · 25 반격과 북진]

[⑨ 6 · 25 반격과 북진] 38선 돌파하는 국군 ㅡ 6 · 25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 라는 문구를 말뚝에 쓰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가 38선 돌파를 망설이자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에게 '38선 돌파에 관한 지령' 을 내린 바 있다. 정 총장은 김 군단장과 함께 9월 30일 3사단 23연대를 찾아 북진 명령을 내렸다. / 조선일보 DB 맥아더가 망설이자, 이승만은 국군의 38선 돌파를 결심했다 미국 방어선에서 한국 · 대만 제외 애치슨 라인은 "침공하라" 초대장 한달 후 매카시 "공산주의자 침투" 미국 내 공산주의 득세 논쟁 가열 트루먼 정권 6 · 25 개입 이끌어 내 맥아더, 인천 상륙 후 북진 유보..

[② 워싱턴 · 제네바를 무대로 상해 임시정부 중심 잡아]

[② 워싱턴 · 제네바를 무대로 상해 임시정부 중심 잡아]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의 이승만 환영회 모습. 배경에 태극기가 있고 그 위에 '대통령 리승만' 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오른쪽 마지막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에도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계속했고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공산주의자들이 임시정부 흔들 때마다··· 외교로 김구에 힘 실어줘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총회서 '日 만주 침략 규탄 성명' 발표 중국 외교관들과 친분 바탕, 국제사회의 임시정부 지지 이끌어 저서 '일본 내막기' 서 '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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