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너에게]

드무2 2023. 12. 2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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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 (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 (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ㅡ 유치환 (1908 ~ 1967)

 

 

 

"물같이 푸른 조석 (朝夕)이" 생뚱맞아 한참 노려보았다. 푸른 아침도 푸른 저녁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희뿌연 도시의 아침과 저녁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마포의 어느 도서관에서 '너에게' 를 읽었다. '좋은 이웃'에 공감하며 나의 행운을 저울질해 보았다. 살아갈수록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아파트 천장 누수로 위 아래층과 갈등을 겪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한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 있으리라.

나 또한 올여름에 누수로 고생을 했는 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집과 살림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는 중학교 동창과 같은 건물에 사는 덕분에 인생이 훨씬 편해졌다.

시의 제목 '너에게' 도 살갑다. 아무 수식어도 달리지 않은 '너에게' 가 멋있으면서도 무섭다. 시인은 '너' 가 있어 행복했던 것 같은데, 시인이 '너' 라고 불렀던 그이도 시인처럼 행복했을까?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이다.

 

 

 

최영미 시인 · 이미출판 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9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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