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의 경찰 조직 와해에 맞선 남한 첫 치안총수 조병옥 박사]
일러스트 = 한상엽
"친일파와 親직업인은 다르다" 조병옥이 일제 경찰을 등용한 이유
日政 경찰 40%가 조선인
97%는 생계형 하위직
해방 후 간부로 진출
趙, '친일 경찰' 공격에
"업에 충실했던 동포를
친일로 매도할 수 있나"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직후, 총독부를 비롯한 관공서 굴뚝에서 한여름에 난데없이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거리마다 잿가루와 타다 만 종잇조각이 흩날렸다. 화신백화점 앞 집회에서 한 연사가 거리에서 모은 타다 만 종이 뭉치를 흔들며 외쳤다. “여기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조선 애국자들을 체포하여 총살하라는 명령서, 고문 실시에 대한 중앙기관의 명령서, 밀정들의 명단과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아내로 소련 언론사 특파원이었던 샤브쉬나는 해방 직후 서울 거리에는 일본인들이 기밀문서를 소각하느라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고 기록했다.
해방 당시 남북한에는 2만6000여 명의 경찰이 근무했고, 그중 40% 남짓한 1만여 명이 조선인이었다. 순사부장, 순사 등 하위직이 97%였고, 경부보 220명, 경부 105명, 경시 21명,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경찰부장에 오른 윤종화까지 간부급은 3%에 불과했다. 해방 이후 이들 조선인 경찰은 배신을 우려한 일본인 경찰의 ‘견제’ 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조선 민중의 ‘위협’ 등 이중고에 직면했다.
본정경찰서 데라사카 서장은 패전 후 제일 먼저 조선인 경찰관의 무장을 해제했다. 일본인 경찰은 기밀문서를 소각하고, 장비와 비품을 절도하는 등 퇴각 이전 경찰 조직을 와해시킬 기세였다. 8월 16일 경기도 형사과장에서 종로경찰서장으로 전임된 최연 경시는 “치안은 우리 손으로” 를 기치로 조선인 경찰을 중심으로 ‘대조선경찰대’ 를 조직했다. 일본인 경찰로부터 치안권을 인계받기 원했지만, 미군 진주가 늦어지며 본정경찰서, 용산경찰서 등 일본인 거주자가 많은 지역은 일본인 경찰이 계속 치안권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조선인 경찰이 ‘직장 사수’ 결의를 다지는 동안, 좌익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 (건준) 산하에 치안대, 학도대, 청년대 등이 조직됐다. 8월 말까지 162개의 치안 단체가 설립돼 지역에서 실질적인 치안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건준 청년대로부터 무기와 경찰서를 넘기라는 요구를 받은 종로경찰서 최연 서장은 “승인받은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는 소임에 충실하겠다. 죽더라도 이 자리에 앉아 죽겠다” 며 일주일 동안 퇴근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미군 주둔 직후, 경찰을 향한 좌익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9월 9일 무장한 학병동맹, 학도대 수백 명이 종로경찰서를 점령했다. 같은 날 국군준비대, 돈암청년단 150여 명이 성북경찰서를 공격해 교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경찰 1명, 연희전문 학생 1명이 사망했다. 이틀 교전 끝에 성북경찰서를 장악한 국군준비대는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제부터 우리가 치안을 담당한다” 고 선언했다. ‘좌익 치안 단체’ 에 장악됐던 경찰서는 미군 헌병대와 조선인, 일본인 경찰의 ‘연합 작전’ 으로 가까스로 회복됐다. 미군 진주 때까지 자리를 지킨 일본인 경찰은 90% 이상이었지만, 한국인 경찰은 20%에 불과했다.
9월 14일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은 ‘자생적 치안 단체’ 의 해산과 근무지를 떠난 조선인 경찰의 복귀를 명령했다. 하지 중장은 남한의 치안 총수로 한국민주당 (한민당) 총무 조병옥을 임명했다. 충남 천안 출신 조병옥은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에서 7년 동안 학사부터 박사과정까지 공부한 ‘미국통’ 이었다. 1925년 귀국 후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했지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순탁, 백남운 등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자, 배후 인물로 지목돼 불명예 사퇴했다. 좌우 합작 대중 조직인 ‘신간회’ 경성지회 책임자를 지내면서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신간회가 해소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비열함” 을 절감하는 등 조병옥은 좌익과 악연이 많았다. 전시에 시국 강연 한 번 하지 않은 ‘무결점 항일운동가’ 였다.
조병옥 박사가 대선을 앞두고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조병옥이 인계받은 남한의 경찰은 2만 명이었고, 그중 1만2000명이 일본인이었다. 조병옥은 일본인이 해임된 자리에 조선인 경찰을 승진시키고, 경찰을 도운 우익 청년들을 모아 경찰 인력을 늘려나갔다. 1년 만에 군정 경찰은 2만5000명으로 늘었다. 경위 이상 경찰 간부 1100여 명 중 82%에 해당하는 900여 명이 일제하 경찰 경력자였다. “군정 경찰은 친일 경찰” 이라는 꼬리표가 과장된 표현은 아니었다.
1946년 ‘대구 10월 사건’ 수습을 위해 조직된 ‘조미공동회담’ 에서 핵심 쟁점이 ‘군정 경찰 내 친일파 청산 문제’ 였다. 증언대에 선 경무부장 고문 맥그린 대령은 “경험 없는 상관을 존중하는 경찰은 없다” 며 일제하 경찰 경력자 등용을 옹호했다. 마크 게인 기자와 대화에서는 “경무부의 한국인이 일본에 충성했다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증인으로 소환된 조병옥은 여운형, 안재홍, 김규식 등 조미공동회담 위원들을 앞에 두고 자신이 일제하 경찰을 등용한 이유를 해명했다. “친일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가 있다. 하나는 직업적인 친일파, 또 하나는 자기의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 일정 (日政) 경찰을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다. 많은 동포는 ‘pro-JAP’ (친일)이 아니라 ‘pro-JOB’ (親직업)이다.”
이어서 조병옥은 여운형, 안재홍에게 매일신보 기사 등 물증을 제시하며 “당신들이 조선총독 앞에서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도 친일이냐?” 고 물었다. 배재학당 시절 은사인 김규식에게는 “선생님의 자제가 일제 때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의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점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려 하시느냐?” 고 정중히 물었다. 조병옥은 “나 자신이 항일운동을 한다면서 정작 내 자식은 게이오대학에 유학시킨 점을 반성한다” 며 “경무부의 인사 방침은 고의로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민족운동을 방해하였거나 민족운동가를 살해한 자 이외에는 일제하 경찰관 출신자를 ‘pro-JOB’ 으로 인정하고 국립경찰관으로 등용했다” 고 증언을 마무리했다. 조병옥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여운형은 병원에 가겠다고 자리를 뜨고, 안재홍은 체머리만 흔들고 앉아 있었다. 김규식은 “군정 행정을 더 잘해달라고 부탁할 따름” 이라며 말을 맺었다.
경무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조병옥은 소련의 의도대로 한국이 제2의 몽골 · 폴란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인민공화국’ 과 ‘인민위원회’ 해산이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했다. ‘무결점 항일운동가’ 조병옥이 조직한 ‘친일 경찰’ 은 그 전력 (前歷)에 대해 좌익은 물론 중간파와 우익마저 비난했지만 적어도 ‘좌익 척결’이라는 첫 번째 과제만큼은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12월 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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