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성리학과 결별한 윤치호]
러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간 윤치호 · 민영환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 (앞줄 가운데)과 윤치호 (민영환의 왼쪽). 러시아와 조선 관리들의 복장이 대조적인데, 조선 관리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 황제 외에는 모자를 벗어야 했지만, 민영환은 조선의 전통을 고집했다. 윤치호는 이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중 독일 베를린 박람회에 들러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과학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100년前 조선판 카이스트 세워··· 한국인 첫 양자역학 논문 씨앗 되다
러 황제 대관식 참석했던 윤치호
1896년 열린 베를린 박람회 들러
엑스레이 보고 과학 중요성 절감
서재필과 독립협회 이끌다 고초
지방 외직 떠돌며 산업학교 구상
을사늑약에 분노, 공직서 물러나
1906년 개성에 '한영서원' 설립
7만평 규모에 실험 · 실습실 갖춰
최규남 · 장기려 박사 등 길러내
우리 역사에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는 책장을 덮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어두운 시대를 과학으로 극복하려던 선조들이 있었다. 국권을 뺏긴 이유가 근대화에 뒤처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명백했기에, 과학은 절박한 현실이었다. 이미 100년 전 아인슈타인을 만난 이야기가 신문에 등장했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상대성 이론 대중 강연을 하던 청년들도 있었다. 한때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불과 몇 십 년 뒤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한 것은 이 과학 선구자들 덕분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그 시대를 이겨낸 그들을 소개한다.
1896년 1월 독일 과학자 뢴트겐이 공개한 손가락뼈 사진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고 불과 몇 달 뒤 베를린 박람회에 엑스레이가 등장한다.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패한 프랑스가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에펠탑으로 재기하자, 독일은 1896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엑스레이로 맞선 것이다. 서구 열강은 박람회를 통해 과학으로 경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윤치호 (1865 ~ 1945)가 이 베를린 박람회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본 이야기를 일기에 남겼다. 우리 민족이 엑스레이를 알게 된 최초 기록이다. 당시 윤치호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중이었다. 이처럼 윤치호는 서구 문명을 마주한 생생한 이야기를 일기에 남겼다. 이런 경험들로 성리학적 세계관과 결별한 윤치호는 우리 과학 여명기에 중요한 마중물 역할을 하게 된다.
서구 열강의 과학경쟁··· 일기에 남겨
1897년 1월 귀국한 윤치호는 서재필을 만난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윤치호는 그냥 덤덤했다. 같은 개화파 동지였던 서재필이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차가운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서재필은 서울에 오자마자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독립협회가 이상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이완용이 회장인 데다, 왕실 측근과 대원군 지지 세력, 여기에 친일파와 친러파 등 온갖 정파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윤치호 일기의 표현으로는 ‘웃음거리’ 였다.
그러던 윤치호의 생각이 바뀌는 결정적 계기는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 졸업식이다. 각국 외교관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학생 이승만이 영어로 조선 독립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더 놀라운 일은 학생들이 공개 토론을 진행한 것이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연설과 토론을 가르쳤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논리를 펼치고 동의를 구하는 방식에 학생들은 빠져들었다. 이에 이승만, 주시경 등의 학생들이 ‘협성회’ 라는 토론 모임을 이끌었다. 불과 1년 만에 서재필이 이렇게 미래 세대를 키워내자, 윤치호는 진심으로 서재필을 존경하고 독립협회에 적극 가담한다.
1897년 12월 13일 윤치호 일기에 등장하는 자전거는 의미가 크다. 지금이야 흔한 일상이지만, 당시 조선 전체를 통틀어 자전거 타는 조선인은 서재필과 윤치호 단 두 명이었다. 자전거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고무 타이어가 개발되면서 시작된 1895년의 ‘자전거 붐’ 때였으므로, 당시 서구에서도 자전거는 최신 과학이었다.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다. 그가 서울 도심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고, 윤치호는 그렇게 자전거를 배웠다. 두 사람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타고 다닌 자전거가 보부상들에게 위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실에서 보여주는 과학은 관념에 사로잡힌 지배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무렵 서재필의 발언은 과격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1897년 11월 30일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 라는 연설은 파장이 컸다. 결국 조선 정부는 독립협회를 통제하려 들고, 여기에 여러 세력의 견제가 더해지며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서재필의 두 번째 망명이다. 이후 반국가 단체로 몰린 독립협회는 해산된다. 간신히 체포를 피한 윤치호는 법부대신이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1899년 1월 원산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지만, 동료들이 잡혀가는 상황에 갈등한다. 아버지는 원산으로 가는 척하며 해외로 도피하라고 권했다.
1935년 조선일보가 보도한 ‘과학데이’ 행사
조선일보 1935년 4월 20일 자 지면. 윤치호가 회장을 맡은 ‘과학지식보급회’ 가 추진한 1935년 4월 19일 제2회 ‘과학 데이’ 행사를 보도했다.
1899년 1월 30일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승만이 협성회 동료 주시경이 건넨 권총으로 탈옥하다 붙잡히자, 상황은 급박해졌다. 2월 1일 윤치호는 송도 (개성)에 ‘산업학교 (industrial school)’ 를 만들기 위해 감리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윤치호는 조선 양반들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입으로만 떠드는 것을 혐오했다. 그래서 미션 스쿨을 원했던 감리교와 달리 “우리가 학교를 갖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한국 청년들이 노동이 불명예가 아니며, 한국의 미래가 노동에 달려 있다고 배울 수 있는 실업학교여야 합니다” 라고 고집했다. 상황이 어찌 될지 몰라 윤치호는 다음 날 바로 땅문서를 감리교에 이전하고 원산으로 떠났다.
이후 함경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방 외직을 전전하면서도 산업학교 구상을 구체화하였고 1904년 외부협판이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1905년 윤치호의 일기는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찼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당일, 일본의 외교 고문 스티븐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그 조약에 서명하는 사람은 일본이 내세우는 무의미한 약속을 믿고 자신의 나라를 팔아버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서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압 속에서 조약이 체결되자 “내게는 수치스럽고 우리 동포에게 역겨운 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가 왜 동포에게 맹렬히 비난받는 자리에 올라야 합니까?” 라며 사직한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는 그토록 오래 계획했던 산업학교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렇게 1906년 개교한 학교가 바로 ‘한영서원 (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 이다. 이공계 인력 양성을 꿈꾸었던 윤치호의 포부는 원대했다. 학교 부지는 개성의 고려 궁궐 터 옆에 6만6000평 규모로 조성했다. 서양식 석조 건물들이 들어서며 체육관, 과학관, 박물관, 수영장, 육상 트랙을 갖춘 운동장 및 기숙사 등을 갖춘 대학 캠퍼스 규모였다. 심지어 정구장은 코트가 16면이어서 당시 송도고보의 시설이 와세다 대학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을사늑약 체결날 일기에 "수치스럽다"
과학을 강조한 윤치호의 이상은 계단식 강의실과 실험, 실습실을 갖춘 송도고보의 이화학관 (理化學館)에 드러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 과학의 초기 역사가 만들어졌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최초 한국인 총장이 된 이춘호, 한국인 첫 번째 물리학 박사로 한국물리학회를 창립한 최규남, 나비 박사로 유명한 석주명,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하는 의사 장기려 박사가 모두 송도고보 출신이다. 교사진도 화려했다. 이춘호, 최규남, 석주명이 모두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도상록이 송도고보 교사 신분으로 1930년대 한국인 최초로 양자역학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학교의 환경 덕분이다.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윤치호는 일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에게 새로운 문명을 보여준 박람회가 1929년 조선에서 열렸을 때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행사일 뿐이라며 “박람회가 끝나자마자 곧 가을철 세금 징수가 들이닥치고 일본인 토지 수탈자와 고리대금업자들은 몸이 터지도록 살이 찔 것” 이라고 비난했다. 1932년, 1935년, 1938년, 1940년 여러 차례 조선에서 열린 박람회 모두를 조선인의 고혈을 짜기 위한 전시 행정이라며 일관되게 비판했다. 철저히 과거와 결별해야 했던 그는 미래 세대가 말뿐이 아닌 현실에서 답을 찾길 바랐다. 관념론적 구질서를 극복하려면 과학이 필요했고, 이렇게 우리 과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민태기 공학 박사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저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2월 2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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