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⑤ 비날론 개발한 이승기 박사]

드무2 2024. 7. 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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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비날론 개발한 이승기 박사]

 

 

 

서울대 공대 학장 시절의 이승기 박사.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를 했던 이승기는 해방 후 귀국해 경성대학 이공학부에서 후학들을 키웠다. 이후 서울대가 설립되자 공대 학장을 지내다 1950년 6 · 25 전쟁이 발발한 후 월북했다. / 조선일보DB

 

 

 

인류 역사 두 번째 합성섬유··· 독일도 못 한 조선 과학자의 쾌거

 

 

 

1939년 교토대 조교수 시절 개발

세계적으로 큰 화제 불러일으켜

 

日 패망 거론하다 투옥, 옥중서 해방

서울대 공대 학장 맡아 후학키우다

6 · 25때 흥남 화학 시설 제공 등

집요한 월북 권유에 결국 북으로

 

1961년 年 1만t 비날론 공장 건설

사회주의권 노벨상인 '레닌상' 받아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7 · 4 남북공동성명을 준비하려고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앞에 노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후락에게 “이태규 박사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태규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이승기 박사였다. 이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미국에 있던 이태규 박사를 초청해 카이스트로 영구 귀국할 수 있도록 했다. 이태규와 이승기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는 과학자였으며 민족의 자랑이었다.

1939년 9월 29일 조선일보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이승기가 합성섬유를 완성했다는 소식을 실었다. 이 뉴스는 세계적으로 큰 화제였다. 그것은 나일론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세계 실크 시장의 80%를 차지했는데, 1938년 미국 듀폰사가 이를 대체하는 나일론을 출시하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이승기의 합성섬유는 이런 상황에 등장했다. 나중에 비날론이라 부르는 이 섬유는 나일론에 이어 인류가 두 번째로 만든 합성섬유로, 독일도 못 한 일을 조선 과학자가 성공시킨 것이다.

 

 

 

이승기가 합성 섬유를 개발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1939년 9월 29일 자 조선일보 기사.

 

 

 

교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 받아

1905년에 태어난 이승기는 1931년 교토제국대학에서 공업화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학 부설 섬유 연구소 강사가 되어 합성섬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성과로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고 1939년 1월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공학 박사는 매우 드문 일이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드디어 1939년 가을 합성섬유를 완성한 것이다. 이때 경성방직을 이끌던 김연수는 이승기에게 연구비 만원을 지원한다. 서울 시내 큰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이승기의 비날론 연구는 중단된다. 1944년 5월 이승기는 교토제국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1945년 7월 22일 이승기는 일본의 패망을 이야기하다가 헌병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때만 해도 이승기는 조국에서 펼칠 비날론 개발에 꿈이 부풀었다. 듀폰의 나일론 역시 2차 대전에 군수용으로 전환되어 일반인은 구경도 못 했고, 종전 후에도 상품화는 더디기만 했기 때문이다. 흥남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학 단지가 있었고, 1941년 서울 공릉동에 세운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동양 최대 대학 건물과 최신 시설을 자랑했다. 하지만 11월 도착해서 목격한 상황은 기대와 달랐다.

 

 

 

1946년 7월 3일 경성대학 이공학부 제1회 졸업식. 당시 공릉동의 이공학부 캠퍼스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 사진은 동숭동 캠퍼스에서 찍었다. 앞줄 우측 네 번째가 이태규 교수,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이승기 교수. 교토제국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은 여전히 가까이 지냈다. 이승기는 월북한 뒤에도 제자들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 서울대 기록관

 

 

 

맥아더 사령부는 점령지 대학에 군대가 주둔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훼손은 심각했다. 경성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뒤 총장을 맡은 미군 대위 크로프츠의 당시 일기는 시설 파괴와 탈취된 고가 장비를 추적하는 얘기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공학부장 이태규와 화학공학과를 맡은 이승기는 꿋꿋이 버텨냈다. 후학들을 키워 1946년 7월 졸업생을 처음 배출한다. 며칠 뒤 설립한 조선화학회 (현재 대한화학회)에서 이태규는 회장을, 이승기는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정치 혼란이 이들에게 닥친다. 1946년 여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국대안)’ 으로 학계가 분열한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이공학부 교수와 학생이 월북한다. 이승기는 사표를 내고 낙향했다. 문리대 학장 이태규의 노력으로 서울대가 수습 국면에 들어가자, 이승기는 서울대로 복귀해 공대 학장이 되었다. 하지만 1948년 서울대 한국인 초대 총장 이춘호가 7개월 만에 사임하고 이태규는 미국으로 떠난다. 이춘호에 이은 두 번째 총장 장이욱 역시 8개월 만에 물러나 1949년 수학자 최규동이 세 번째 총장으로 부임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이승기는 공대 시설 복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1950년 봄 정부는 돌연 예산 부족을 이유로 어렵게 정상화되던 공대 캠퍼스를 비우기로 발표한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쓸 정도로 반대가 거셌다. 최규동 총장이 대통령을 면담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고 얼마 뒤 전쟁이 터졌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미처 피하지 못한 서울대 총장 최규동은 초대 총장 이춘호와 함께 납북되었다. 이승기 학장에게 집요한 월북 권유가 계속되자 여러 차례 거절 끝에 북쪽으로 향했다. 흥남 화학 시설을 비날론 공장으로 가동하게 해 주겠다는 회유가 주효했다. 제자들이 이승기를 따라갔지만, 이승기는 그들 일부를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얼마 뒤 흥남이 폭격당했다. 석유를 원료로 하는 나일론과 달리 석유가 없던 북한에서는 달리 선택이 없었다. 석탄과 석회석으로 만들 수 있는 비날론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의 연구는 1961년 비날론을 연간 1만톤 생산하는 공장이 만들어지며 비로소 상용화됐다. 같은 해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는 레닌상을 받으며 이승기는 세계적 과학자가 되었다. 이후 10년이 비날론의 전성기였다. CIA는 1971년까지 북한의 직물 생산이 한국을 앞섰다고 기록했다.

 

 

월북 후 일부 제자 돌려보내기도

이후 비날론은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의 성공 사례로 선전되었지만, ‘주체 섬유’ 라고 하는 순간 발목이 잡혔다. 이 무렵 세계는 석탄이 아니라 석유를 재료로 한 합성섬유가 발달하고 있었고, 일본 역시 비날론의 원료를 석유로 바꿨다. 또한 비날론의 특성상 의류보다는 다른 용도가 적합했지만, 고려되지 않았다. 무모한 자립 경제는 고립을 초래했다. 역사에 ‘만약’ 은 없지만, 이승기에게 석탄이 아닌 다른 원료가, 옷이 아닌 다른 목표가, 더 정확히는 다른 시각을 가질 환경이 있었다면 그의 천재성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이태규 · 이승기 · 박철재··· 서로 존경하던 '교토대 3인방'

 

 

이태규 美, 이승기 北으로 갔지만

박철재는 남아서 한국 학계 이끌어

 

2005년 제자들의 건의 받아들여

남북공동 '이승기 세미나' 열기도

 

 

 

1938년 이태규가 미국 프린스턴으로 떠날 때 교토 유학생들이 환송하며 남긴 서명. 교토대 3인방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가 크게 쓴 이름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의 서명이 채워져 있다. / 이태규 박사 전기

 

 

 

1930년대 교토 유학생 모임은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가 이끌었다. 특히 일본제국대학 교수에 오른 사람은 이태규와 이승기 두 사람뿐이라 관계는 남달랐다. 이태규의 아들 이회인 박사는 이승기가 자주 찾아와 예뻐해 주었다고 기억한다. 이승기와 1905년생 동갑내기 박철재는 1940년 교토제국대학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아 최규남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을 교토대 3인방이라 했다.

1945년 7월 이승기가 헌병에게 체포될 때 박철재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일본 패망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교토대 3인방은 귀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미리 가족을 귀국시킨 이승기, 박철재와 달리 이태규는 아내가 만삭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이승기와 박철재는 남아서 이태규 가족을 도와 11월 함께 귀국했다. 조선 과학을 대표하던 이들을 사람들은 기다렸고, 박철재는 “우리 세 사람은 무사히 귀국했다” 는 소식을 언론에 전했다.

1948년 이태규가 미국으로 떠나고, 1950년 이승기도 북으로 갔지만 박철재는 남아서 한국 학계를 이끌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맡은 그는 1952년 네 번째 서울대 총장 최규남을 도와 한국물리학회를 창립했다. 그러고 원자력 기술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해 공릉동 서울대 공대 캠퍼스에 설치했고, 원자력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서로 존경하던 세 사람 이야기는 북한에서 펴낸 이승기의 자서전에 여러 번 등장한다. 이승기는 1996년 사망하고 아내 황의분은 2000년 이산가족 상봉 행사로 서울에 와 가족을 만났다. 제자들의 건의를 당국이 받아들여 2005년 이승기 박사 탄생 100주년 학술 세미나가 남북 공동으로 베이징에서 열렸다.

 

 

민태기 공학 박사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저자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2월 2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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