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8) 한반도 운명 가를 대반격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 부대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작전을 벌여 북한군의 긴 보급선의 허리를 끊었다. 상륙주정에 올라탄 미 해병대가 함포 사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인천으로 다가서고 있다. 상륙부대는 이어 서울을 향해 진군했다. [중앙포토]
점점 소문이 커지고 있었다. 곧 미군이 상륙작전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천’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은 나돌지 않았다. 그러나 서해 어딘가로 미군이 대규모 상륙을 시도할 것이란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밀번은 낙동강서 적의 머리를 치고 맥아더는 인천서 허리를 끊는다
그러는 사이 프랭크 밀번 군단장의 약속은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부산 지역의 방어를 맡고 있던 미 10 고사포단 단장 윌리엄 헤닉 대령이 우리 1사단의 사령부로 찾아 왔다. 겸손하면서도 차분한 인상의 헤닉 대령은 나와 수인사를 나눈 뒤 “포격 지원이 필요하면 서슴없이 말하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내게 “포탄 운반 차량도 70~80대 정도 충분하게 가져 왔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우리 1사단과 함께 북진을 거듭해 평양을 탈환하고, 평북 운산까지 진출하는 인물이다. 위기 때마다 강력한 야포를 동원해 1사단의 전반적인 작전과 주변 부대와의 합동작전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그가 끌고 온 화력의 규모를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90㎜포 18문을 보유한 제78 고사포 대대, 155㎜ 18문을 지닌 제9 야포대대, 4.2인치 박격포 18문의 제2 중박격포 대대가 그의 휘하에 있었다. 이 정도면 여느 미군 사단의 화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국군 1사단이 미군 정규 사단과 맞먹는 화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운 좋은 국군의 사단장이었다. 다른 국군 사단은 미군의 이 같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어깨가 아주 무거워졌음을 깨달았다. 미군이 대규모의 화력을 지닌 고사포단까지 보내준 것은 내게 기대가 크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순한 화력 지원이 아닌 내 지휘권 아래에 미군 고사포단을 배속(配屬)까지 해 준 것이다.
나도 이런 미군의 존재를 소중하게 대했다. 그들에게 호위 부대 병력으로 12연대의 1개 중대를 보냈다. 포병은 후방에서 야포를 발사하면서 전방을 돕지만, 간혹 후방 깊숙이 파고 들어올 수 있는 적의 기습에는 매우 취약하다. 그런 점에서 이들을 돌볼 병력이 필요했다. 나는 12연대 김점곤 대령과 상의해 중대 병력을 호위 부대로 보내 그들의 안전을 지키도록 조치했다.
적의 상황이 궁금했다. 다부동 돌파에 실패한 그들은 영천의 틈새를 노려 진격을 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봐서는 부산 교두보를 전혀 뚫지 못했다. 그러나 적은 막바지 아군의 반격을 막아 전선을 낙동강 근처에서 고착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김책 전선사령관이 김천에 상주하면서 남은 병력을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아군의 반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에 급히 집을 뛰어나와서 달려간 전선, 그리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밀리고 밀렸던 한 달 동안의 지연전, 수많은 전우들이 처절하게 싸움을 벌이다 숨져간 다부동의 방어전. 나는 그 기간 동안의 전쟁에서 ‘승리’를 알 수 없었다. 임진강에서부터 줄곧 밀리다가, 모든 병력과 화력을 동원해 땀을 쥐어짜듯 막아온 전선 상황이었다. 승리는 사실 언감생심이었다. 지키고 막는 데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즈음에 ‘승리’가 어떤 느낌의 것인지, 그것을 이룬 뒤의 성취감은 어떤 것일지, 그리고 그것이 나와 조국에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침략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군사적 승리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기쁨일지 상상하고 있었다.
나의 참모와 예하 연대장, 각급 지휘관들도 그런 꿈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성공적인 방어 작전을 마치고 이제는 반격으로 승기(勝機)를 잡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군 고사포단의 가세로 그런 분위기는 우리 1사단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밀번 군단장으로부터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1사단은 팔공산에서 가산을 공격해 적 1사단을 물리쳐라. 그리고 미 1기병사단과 호응해 낙동강을 넘어선 다음 상주를 향해 공격하라.” 명쾌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자, 이제 우리가 간다.’ 50년 9월 16일이었다. 오전 9시에 받아든 밀번 군단장의 명령이었다. 다부동을 저 멀리 두고 이제 반격에 나설 차례였다. 수많은 전우가 묻힌 그 피와 땀의 땅. 그들을 위해, 그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떨치고 나갈 때였다.
고려를 창업한 왕건의 숨결이 묻어 있는 팔공산 자락에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줄기차게 내리는 여름 막바지의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가산 산성에서는 적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예봉을 꺾는 데 필요한 공중지원이 막혔다. 적들은 악천후를 뚫고 계속 역공을 펴고 있었다.
좌익을 맡았던 15연대와는 통신도 끊겼다. 이틀 동안 15연대의 전황(戰況)도 파악할 수 없었다. 사단의 주력인 12연대도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의 11연대도 가산에서 역공을 펴는 적의 반격에 막혀 교착 중이었다.
9월 15일 미군이 이미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곧바로 치고 올라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면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이 대반격작전은 성공하기 힘들다. 반격을 시도했지만 전선은 우리의 뜻대로 펼쳐지지 못했다. 초조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 8군 사령부는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시시각각 독촉을 받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8) 한반도 운명 가를 대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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