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6) 거대한 반격의 시작
북한군의 공세가 1950년 8월 말에 접어들면서 꺾이자 국군과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8월 말 경북 왜관 근처의 낙동강에서 한국인 인부들이 미군 제1 기병사단의 중화기 도하를 돕기 위해 흙을 집어넣은 마대를 깔아 강바닥을 다지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1950년 8월 하순에 우리 1사단은 다부동을 미 1기병사단에 맡기고 하양으로 옮겼다. 대구에서 유명한 팔공산의 북쪽 지점이었다. 원래 국군 6사단이 맡았던 지역으로, 가산에서 신령~의성 사이 도로까지 팔공산 기슭으로 난 12㎞의 방어선이었다. 8월 한 달에 걸쳐 다부동을 지키는 데 성공한 우리 국군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가는 공세이전(攻勢移轉)을 준비해야 했다.
“맥아더가 뭔 일 벌일 것” 소문 … 미 8군서 “VIP 만나보라”
우리로부터 다부동을 인계 받은 미 1기병사단은 다른 작전을 펼쳤다. 유학산과 수암산 등 고지를 내주고 평지에서 기계화 부대가 뒤를 받쳐주는 방어작전을 구사했다. 이와 함께 영천도 적의 공격에 한때 읍내를 내주면서 심각한 국면을 맞기도 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후방 지휘소가 6일 부산으로 이동하고, 미 8군의 후방도 부산으로 옮겨갈 태세였다. 또 다른 위기가 몰려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적의 공세는 분명 한풀 꺾인 상태였다. 다부동에서 미 기병사단이 고지를 내줬어도 적은 그 이남으로 쳐내려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소강 상태였다. 영천도 9월 초에 들어 적의 공세에 노출이 됐지만 2군단장인 유재흥 장군의 치밀한 방어 전략으로 한때 뚫렸던 방어선을 금세 회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반격이었다.
9월 초순 들어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가 무슨 일을 벌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그즈음에 미 8군 사령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보안을 지키면서 밀양으로 내려가 미군 VIP를 만나보라”는 전갈이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명시하지 않아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밀양으로 갔다. 그러나 그 장군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미군 측에서 “이미 대구로 갔으니까 그쪽으로 다시 가보라”는 말만 전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지프를 타고 대구를 향했다. 작전 수행 중인 일선 사단장을 “오라 가라”하면서 구체적인 지점과 만날 인물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마음은 다소 불편했다. 대구에 도착했지만 역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알려 준 곳이 ‘대구시 모 외곽 과수원’이었으니 쉽게 찾는 게 이상했을 것이다.
한참을 찾아 헤맸다. 제방이 길게 나 있는 곳에 사과나무를 빽빽하게 심은 과수원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제방으로 난 길을 지나다 보니까 과수원 한쪽에 군인 막사 같은 게 보였다.
‘저곳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 과수원에 들어섰다. 큰 천막 앞에 노인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미군이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노는 모습이 여느 시골 노인네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간 뒤 “혹시 미군 장성이시냐”고 물었다.
인상이 참 좋아 보였다. 온화한 표정에 점잖은 말씨로 그가 내게 “귀관이 백 장군인가”라고 되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앞에서도 한 번 소개했던 적이 있는 나의 ‘군사 스승’ 프랭크 밀번(1892~1962·당시 58세) 소장이었다. 그는 반갑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저런 소개를 했다. 새로 한국에 도착해 미 1군단의 지휘를 맡았다고 했다.
그런 뒤에 그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했다. “백 장군, 당신 싸움 잘하는 것은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당신 부대는 이제 미 1군단의 지휘를 받게 됐다. 곧 이제까지의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할 계획이다. 당신이 잘해 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의 말이 중요했다. 그는 “현재 국군 1사단의 화력은 크게 부족하다. 군단에 있는 포병을 지원해 줄 테니까 제대로 한번 싸워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프랑스 마르세유 상륙을 지휘한 명장이었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서독 주둔 미 1사단장으로 있다가 미 9군단장으로 내정됐었으나, 맥아더가 구상한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선두에서 반격작전을 이끄는 미 1군단장에 임명돼 막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포병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그의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미군은 자신의 화력과 장비 등을 국군에게 선뜻 내주는 법이 없었다. 국군에게 넘겨줬다가 패전할 경우 자신들의 무기와 장비 등이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무엇보다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한국군과 제대로 연합작전을 펼쳐본 적이 없어 한국군에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 국군의 1사단에 포병 지원을 약속했으니 내게는 커다란 ‘뉴스’였던 셈이다.
그러나 나는 내 버릇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밀번 군단장에게 다소 뻔뻔스럽게 “지도가 필요한데 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밀번 군단장은 나를 잠깐 보더니 “지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곧장 부관을 불러 “지도를 많이 가져다가 주라”고 지시했다. 그들의 지도는 컬러판이었다. 지명을 영어와 함께 한자(漢字)로도 적어 놓은 것이었다.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했을 때 만들었다는 축척 5만 분의 1 지도에 비해서도 여러 가지가 달랐다. 일단 좌표가 세밀하게 그어져 있는 점이 달랐다.
지프 한 대 분량의 지도를 싣고 왔다. 작전 때 필요한 유성펜과 지도 위에 펼쳐 놓는 작은 표지물도 대량으로 가지고 왔다. 사단 참모들의 입이 벌어지는 모습을 봤다. 좌표가 치밀하게 그려진 컬러판의 지도. 공중지원과 포격을 눈대중으로 하는 재래전을 벗어나 ‘현대전’을 치를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이 미군의 지도였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6) 거대한 반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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