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0) 적 전선을 넘어서 …
월튼 워커 중장은 이어 “우회 전술은 미군 참모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다. 상대를 공격하다가 적의 저항에 부딪히면 옆으로 돌아가라는 전술이다. 어떻게 적의 약점이 있는 곳으로 파고들어갈지는 귀관이 부하들과 상의해 보라”고 말했다.
인천상륙 3일 만에 … 김점곤 대령, 마침내 북진의 길 열다
적이 펼치는 전선에는 강약(强弱)이 있을 수 있다. 적이 자신의 주력(主力)을 모아 놓은 곳이 강한 전선이고, 그보다는 화력과 병력 등이 처지는 데가 약한 전선이다. 강한 곳만을 공격한다면 아군의 힘이 많이 소모된다. 그곳을 피해 약한 곳을 공격하면 적의 전선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군과 유엔군 반격 노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뒤 상황)
적의 약점이 어디일까. 저들은 막바지 힘을 다해 낙동강 전선을 교착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어느 곳이 약할까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 있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평소 지략(智略)이 뛰어나고 담력(膽力)까지 갖춰 맹장(猛將)의 풍모를 갖춘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에게 돌파구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은 많은 재주를 지닌 인물이다. 권총 사격술이 아주 뛰어나고, 작은 키지만 배짱이 두둑하며 기가 세서 아랫사람들을 잘 통솔한다. 머리도 아주 명민(明敏)해 전략가다운 기질도 있는 연대장이었다.
그가 돌파를 했다. 18일 오후였다. 사단 사령부에 있는데 그로부터 보고가 왔다. “거매동의 요충지까지 진출했다”는 내용이었다. 거매동이라니-. 나는 놀라고 말았다. 효령면 거매동은 다부동 북쪽 12㎞ 지점이다. 적의 전선을 깊숙이 뚫은 셈이다. 나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당장 12연대 쪽으로 달려갔다. 김 대령을 만나자마자 나는 “어떻게 뚫었어?”라고 물었다.
김점곤 대령의 설명은 이랬다. 먼저 미군의 포격을 십분 활용했다는 것이다. 후방에서 한 지점에 집중 포격을 가한 뒤 보병을 그곳에 진출시켜 거점을 만들고, 그런 다음 포병의 포격지점을 북상시키면서 보병으로 하여금 계속 그 뒤를 따라 올라가게 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설명이다.
아군이 적군에 비해 우세한 것, 그것은 윌리엄 헤닉 대령이 이끌고 온 거대한 포병 화력이었다. 김 대령은 이 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전선을 돌파한 것이다.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보병과 포병의 보포(步砲) 합동작전을 아주 훌륭하게 전개한 셈이었다. 치밀하고 대담한 김 대령의 면모가 충분히 발휘된 것이었다.
1950년 9월 18일 국군과 연합군은 낙동강에서 대반격을 시작했다. 전선으로 이동을 앞두고 점검을 하고 있는 미군.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워커 장군이 전화를 두 번이나 걸어 왔다. “도대체 어떻게 돌파했느냐. 정말 사실이냐. 대단한 작전을 수행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11연대와 15연대에 측방으로 우회해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왜관과 학명동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고생을 거듭하고 있던 미 1기병사단도 우리와 보조를 맞춰 서쪽에서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튿날 12연대를 따라 계속 북상했다. 군위 남쪽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계속 진군했다. 12연대의 돌파는 비록 작은 지점 한 군데를 뚫은 것이었지만 의미를 따지자면 낙동강 전선 전체를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가산~왜관 북방에 포진했던 북한군 1사단과 3사단, 13사단이 좌우에서 협공을 당하는 형국에 놓이게 된 셈이다. 적들은 패주했다. 최소한 내가 12연대를 따라 군위 남쪽에서 서쪽 왜관 쪽으로 향하던 길에서 본 바로는 적은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도로변에는 군마(軍馬)의 사체가 뒹굴고 있었고, 적의 차량과 대포 등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산골짜기에는 적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미군은 이 반격으로 인천에 상륙한 미 해병대와 연계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만약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면 인천에 상륙한 미군 부대는 고립을 면치 못했을 수 있다. 다부동이 상징하는 낙동강 전선, 즉 부산 교두보의 성공적인 방어에 이어 인천 상륙작전에 맞춘 1사단 12연대의 반격은 6·25 전쟁의 획을 긋는 전투였다. 그 승리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김점곤 대령이다. 그런 유능한 부하와 작전을 벌일 수 있었다는 점, 내게는 또 다른 행운이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0) 적 전선을 넘어서 …
'6 · 25전쟁 60년 > 서울 거쳐 평양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5> 진격 길에 나서다 (0) | 2021.06.27 |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4> “백 사단장, 평양을 맡으시오” (0) | 2021.06.27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3) 권총과 위스키 (0) | 2021.06.27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2) 선봉에 서고 싶은 군인의 마음 (0) | 2021.06.26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0) | 2021.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