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서울 거쳐 평양으로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드무2 2021. 6. 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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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12연대장 김점곤 대령과 함께 서쪽으로 계속 향했다. 도로변의 풍경은 같았다. 여기저기에 적군의 시체와 무기 등이 널려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공격을 펼치던 적군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북한군은 붕괴된 것이다. 패주한 적들의 일부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은 됐지만 차량 등이 이동할 수 있는 주요 도로변에서는 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에서 보자
“도주하는 김책 잡아라” 155㎜ 포가 조치원 향해 불을 뿜다

 

 

우리 일행은 오전 11시쯤엔가 어느덧 다부동의 북쪽, 상주로부터 대구로 이어지는 도로와 안성에서 대구를 잇는 길이 만나는 교차 지점에 도착했다. 1사단 15연대 최영희 대령도 그곳에 나와 있었고, 미 1기병사단의 호바트 게이 소장도 진출해 있었다. 12연대가 반격에 성공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적군의 동태에 따라 각자 북진(北進)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 1기병사단은 당시 대구의 경마장에 사단 CP를 차려 놓고 있었다. 그러나 다부동 북쪽에 진출해 있을 때 만난 게이 소장은 이미 모든 행장을 꾸리고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처럼 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게이 소장은 중간에서 기병사단 예하의 연대장이 진격을 안 한다는 이유로 즉각 그를 경질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국군과 연합군은 1950년 9월 18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성공한 뒤 거센 기세로 북진을 시작했다. 국군 장병들이 57㎜ 대전차포를 차량에 매달고 수원 쪽을 향해 북진하는 도중 포즈를 취했다. 대전차포 위에 무늬가 선명한 태극기를 꽂아 놓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이 이루어진 뒤 그들은 바로 북진에 나선 것이었다. 게이 소장은 자신의 휘하 정예부대인 777연대전투단(RCT)을 선두에 내세우고 당장 길을 떠나고 있었다. 나는 게이 소장에게 “당신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물었다. 게이 소장은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서울에서 보자(See you in Seoul)”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으로 ‘벌써 서울을 향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군이 앞장서 서울로 진격한다는 말에 나는 우선 기쁨이 복받쳤다. 옆에 있던 최영희 15연대장도 “야, 정말 이제는 서울로 가는구나”라고 환호했다. 나도 내심으로 ‘이 싸움은 이렇게 아군의 승리로 끝나는구나’라는 안도감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심사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반격의 포문은 국군 1사단이 열었는데, 미군이 앞질러 가는 것에 대한 경쟁심에서 우러나는 불편함이었다. 게이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미 해병대와 연계(linkup)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기동력과 화력 등 모든 분야에서 국군보다 앞선 미군이 먼저 북진하는 것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냥 미군에 선두를 뺏기자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사단 CP를 나와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탄 지프 뒤로 무장한 헌병 지프 한 대만이 따르고 있었다. 상주를 거쳐 국도를 따라 청주까지 갔다. 적이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산이나 골짜기 등에 패주한 적의 잔여 병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사단장이 헌병 지프 한 대만을 대동하고 길을 나선다는 것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앞을 휘젓고 나간 미 1기병사단의 선두 병력 때문에 길에서는 별다른 위험에 봉착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어느새 청주에 닿고 있었다. 청주 시내를 흐르는 무심천 천변에 미군 포병이 보였다. 그리로 다가갔다. 구면이었던 미 1기병사단 5연대장 마르셀 크롬베즈 대령이 보였다. 마침 우리 1사단의 수색대 역할을 맡아 나보다 먼저 청주에 도착했던 공병소대장도 그곳에 있었다.

 

 

 

김책(1903~51)

 

 

 

공병소대장은 내게 “조치원 쪽에서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이 도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고했다. 좀 자세히 말해 보라는 내 지시에 그는 “현재 조치원을 지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승용차를 타고 도주하는 상태”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크롬베즈 대령에게 이를 즉시 알렸다. 그리고 “김책을 잡아야 한다. 조치원 방향으로 일단 포격을 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단 나는 조치원역을 중심으로 좌표를 잡아 포격을 하는 게 좋겠다는 충고도 했다.



저녁 6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미군의 포는 이때 불을 뿜기 시작했다. 조치원을 향해 미군의 155㎜ 포가 굉음을 울리면서 포탄을 발사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책은 그 포격에 맞지는 않았다. 그는 북에 돌아갔다가 나중에 결국 숨을 거뒀다(1951년 1월 사망). 하지만 당시 나는 북한 전선사령관이 도망친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 더 추격의 고삐를 바짝 쥐고 뛰어들었다면 북한의 전선사령관 김책을 생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날 저녁 나는 어둠 속을 달려 다시 1사단 CP가 차려진 선산의 오상중학교 남쪽으로 되돌아왔다. 사단 참모들은 내가 청주에 다녀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 알았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참모들 여럿이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느라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혼자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군인은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이 명예다. 이 상태로라면 선봉에 서는 것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의 포병 지원에 따라 막강한 화력까지 갖춘 상태에서 후방에 산재해 있는 적을 상대로 작전을 벌이는 데 시간을 보내고만 있다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격 일선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1950년 9월의 막바지, 아직 꺼지지 않은 늦여름의 무더운 밤을 내내 뒤척여야 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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