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전기박물관] 04

드무2 2025. 2. 1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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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박물관] 04

 

 

 

 

 

 

 

 

 

 

대규모 발전소의 건립

 

전기가 궁궐을 벗어나 민간에 보급되려면 그에 걸맞은 대규모 발전설비가 필요했다. 당시 경복궁과 건청궁에 설치된 전등소는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제한된 수준의 전기설비에 불과했다. 특히 한성전기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전차를 운영하려면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필수였다. 한성전기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전차를 운영하려면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필수였다. 한성전기는 앞으로 벌일 전등 · 전화 사업과 민간 영역에서의 전기수요가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고 1898년부터 대규모 발전소를 세울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땅에 첫 발전소가 들어선 지 불과 10여 년 만의 일로, 날이 갈수록 속도를 내는 근대화의 바람을 상장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동대문발전소 주변 전경, 1900년대

 

 

 

 

 

 

 

 

 

 

대중의 발이 된 전차

 

1898년 9얼 시작한 전차 사업은 고종이 이듬해 직접 개통식에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가졌다. 돈의문 (서대문)에서 홍릉에 이르는 선로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용산선을 개통하면서 점차 노선을 늘려갔다. 1902년이 되자 전차 승객은 하루 평균 6,476명으로 전년 대비 약 69% 성장했고, 1905년에 이르러서는 12,963명으로 두 배 가량 늘었다. 이는 20만 명에 이르는 한성부민 약 5 ~ 6%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1903년에는 5전짜리 차표를 구매해 종점까지 가는 승객에게 담배 한 갑과 동대문 전차 차고지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 (영화) 관람표를 무료로 제공하는 판촉 행사도 벌였다. 전차는 한성에 방문하면 반드시 타봐야 하는 명물로 알려졌고, 인기에 힘입어 배차 간격을 줄이고 야간에도 연장해 운행하는 등 명실상부 대중의 주요한 교통편으로 자리 잡아갔다. 한성의 전차는 당대 사람들에게 근대의 상징물이자 새롭고 편리한 수송수단이면서 한 번쯤 구경해야 할 오락 시설이기도 했다.

 

 

 

 

전차 개통식,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 개통

 

1899년 5월 4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교토 (1895년 1월)와 나고야 (1898년 5월)에 이어 세 번째였으며, 독립국의 수도로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동대문발전소 전차 차고지에서 열린 시승 · 개통식에는 정부의 고위 관료는 물론 고종황제가 직접 참석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했고, 신기한 탈 것을 구경하고자 몰려든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처음 도입될 당시 전차는 상등칸과 하등칸의 구별이 있었고 이용요금도 달랐다. 남녀의 좌석도 별도로 마련되었다. 일정한 정거장이 없는 탓에 전차가 오면 손을 들어 세운 후 탔고, 미리 운전사나 차장에게 말해 편리한 곳에서 내렸다. 달리는 전차에서 그냥 뛰어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전차를 타는 것 자체를 즐겼으며 한성전기에서는 단체를 위한 관광용 전차도 운영했다.

 

 

 

 

용산 부근 화물 전차, 대한제국

 

 

 

 

초기 전차, 1900년대

 

 

 

 

 

 

 

초기 전차 (단차) 모형 (1900년대)

 

1900년대

 

전기의 힘을 동력으로 하여 궤도 위를 달리는 차량. 공중에 가설한 전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1898년 서울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1969년 모두 철거되었다. 차량은 40명이 앉을 수 있는 개방식 차량을 8대 수입하였고, 황실 전용으로 고급차량 1대가 도입되었다.

 

 

 

 

 

 

 

초기 전차 (단차) 모형 (1910년대)

 

1910년대

 

우리나라에서 전차사업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경인철도 관계로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인들이었다. 1898년 2월 19일 미국인 콜브란 (Collbran, H.)과 보스트윅 (Bostwick, H. R.)은 우리 정부로부터 한성 (지금의 서울) 시내에서의 전기사업경영권을 얻어 그 사업의 하나로 전차가 부설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전차 (단차) 모형 (1920년대)

 

1920년대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고 또 전기가 나오면서 서양에서는 수증기 대신에 전기를 이용한 교통기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갔다. 1834년 미국에서 전지를 사용한 모형전차가 나왔고, 이것은 1879년 독일의 베를린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여객수송용 전차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가지를 달리는 전차가 영업용으로 등장한 것은 1881년에 지멘스 (Siemens, E. W. von S)가 베를린 교외에 설치한 전차가 처음이다.

 

 

 

 

 

 

 

경성부영 승합자동차 (버스) 모형 (1930년대)

 

1930년대

 

일제의 경성부 직영으로 운행된 22인승 버스 경성 (서울)의 버스 운행은 1928년 4월 19일 시작되었다. 경성부청이 경성전기의 전차 독점 교통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일본에서 버스 10대를 들여와 전차와 경쟁시켰다. 초기에는 버스의 빠른 속도와 쉬운 노선 변경 등 장점이 있어 효과적이었으나, 상대적으로 요금이 비싸 (전차 5전, 버스 7전) 버스 이용자가 줄어들어 적자가 만성적으로 발생했다.

 

 

 

 

 

 

 

 

 

 

반강제보기식 전차 모형 (1930년대)

 

1930년대

 

1930년 일본의 일본차량 (주)에서 제작된 반강제 (半鋼製) 보기식 (Bogie式) 궤도차량으로 서울 서대문 ~ 종로 ~ 동대문 ~ 청량리 구간에서 운행된 노면전차. 반강제는 차체의 재료가 목재와 철재를 혼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보기식은 앞 뒤 두 대의 차대 위에 차체를 올려놓아 중량을 고르게 분산시키면서 자유롭게 방향을 회전하여 주행을 원활하게 하는 방식이다. 보기식 차량은 곡선 운행시 흔들림과 탈선의 위험이 적고 매우 안정적이다.

 

 

 

 

 

 

 

반강제보기식 전차 (510호) 모형 (1960년대)

 

1930년대 ~ 1960년대

 

반강제 (半鋼製) 보기식 (Bogie式) 궤도차량의 노면전차. 우리나라 전차는 1899년 5월 4일 서울에서 첫 운행을 시작으로 70여년 간 운행되다가 1968년 11월 29일 종료되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가지를 달리는 전차가 영업용으로 등장한 것은 1881년에 지멘스 (Siemens, E. W. von S.)가 베를린 교외에 설치한 전차가 처음이다.

 

 

 

 

 

 

 

금강산전기철도 기선 100형 수하물 겸용 전차

 

반강제 (半鋼製) bogie식 (式) 전차 / Miniature

 

금강산전기철도 개통 시기에 만들어진 기선 100형 3등 전차. 금강산 관광용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운행구간은 경원선 철원역에서 분리되어 내금강역까지 116.6㎞ 구간을 운행하였다. 1924년 8월 1일 철원 ~ 김화 구간을 1차 개통하고, 1931년 7월 1일 김화 ~ 내금강 구간을 2차 개통하여 전체구간이 완공되었다.

 

 

 

 

 

 

 

 

 

 

을종승차권

 

일제강점기 / 4.2㎝ × 3.5㎝ / 전기박물관

 

차표. 전차의 최전성기를 누리던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다양한 전차 승차권을 발행하였다. 이용대상, 구간 등에 따라 형태와 표기 내용이 달랐고, 디자인도 다양했다. 승차권과 달리 전차 승환권에는 전차 노선과 배차시간, 구간별 요금이 인쇄되어 있고, 환승 때 주의사항이 적혀있다.

 

 

 

 

 

 

 

경성의 전차 안내도

 

1929년 / 15.5㎝ × 52㎝ / 일본, 경성전기주식회사

 

경성의 전차 정거장과 도로, 교외의 간선도로, 철도 등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전차 안내도. 6절의 리플릿으로서 뒷면에 전차 요금표와 경성 명소를 소개한 설명문이 실려 있으며, 전차 노선은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성의 전차 · 버스 노선 안내도

 

1940년 9월 / 11㎝ × 15㎝ / 일본, 경성전기 (주)

 

경성의 전차 · 버스 노선 안내도. 일제는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그 업적을 알리기 위해 박람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난내문은 경성전기가 인쇄, 배포한 조선 박람회로 가는 경성 시내 전차와 버스 노선도이다. 당시 경성전기는 전기 판매 사업과 경성시내 전차와 버스운영 사업을 함께 했다.

 

 

 

 

 

 

 

금강산전기철도회사 철도과 직원 단체 사진

 

1927년 2월 14일 / 10.5㎝ × 15㎝ / 일본, 금강산전기철도 (주)

 

금강산전기철도회사 철도과 직원이 경기도 포천 소재 본사 사옥을 배경으로 단체 촬영한 사진. 금강산전기철도 (주)는 1919년 12월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철도회사로 운행 구간은 경원선 철원역에서 분리하여 내금강역까지 116.6㎞ 거리를 운행하였다. 1924년 8월 1일 철원 ~ 김화 구간을 1차 개통하고, 1931년 7월 1일 김화 ~ 내금강 구간을 2차 개통하여 전체 구간이 완공되었다.

 

 

 

 

 

 

 

경성전차 연선 명승 안내 엽서

 

1930년대 / (봉투) 9.6 × 18.2㎝, (엽서) 9 × 14㎝ / 전기박물관

 

경성부 (京城府) 전차노선 인근의 명승지를 소개한 기념엽서. 표지 별도 엽서 8매 한 세트로서 창의문, 황궁우, 창경원, 공덕리, 청량리 부근, 경회루 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전차 요금 등록기

 

1904년 / 8.5㎝ × 12.5㎝ × 2.5㎝ / 미국

 

전차 차장이 승객 수를 계수하는 휴대용 기기. 앞면 윗부분에 승하차를 전환 표시하는 IN, OUT 창이 있고, 옆에 변환 노브가 있다. 그리고 그 밑에 2 자리 계수창이 있어 등록기 밑 부분의 검정색 둥근 구슬 모양의 레버를 아래로 당기면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숫자가 위로 올라가는 기계식 계수기이다.

 

 

 

 

 

 

 

 

 

 

 

 

 

 

 

 

노선의 확충 : 뻗어나가는 제국의 황도

전차 노선은 사람의 교통편의 증진뿐만 아니라 상공업을 부흥하려는 목적도 지니고 잇었다. 1899년 처음 개통한 홍릉선 (돈의문 ~ 홍릉)은 한성의 전통 상업지구인 종로를 통과했고, 이후 신설된 노선도 경인철도역과 연계해 계획되었다. 1899년과 1907년에 각각 개통한 용산선과 마포선은 물자의 집산지인 용산 · 마포 나루와 종로를 연결해 화물 운송을 주목적으로 운영됐다. 특히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남대문시장은 용산선 개통으로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자 중앙시장으로 박돋움했다. 이러한 노선 배치는 남산과 진고개 (현 충무로) 일대 일본인 상권의 확장을 저지하는 역할도 했다.

한편 전차는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했다. 황궁인 경운궁을 둘러싸며 지나가는 선로는 크게 확장된 도로와 함께, 대내외에 한성을 제국의 수도로 각인시키는 한 장치였다. 그중 홍릉선은 일제의 만행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능까지 뻗어 있어, 대중에 반일 의식을 형성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렇듯 전차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채 교통 · 운송수단으로 황도 皇都를 달렸다.

 

 

 

 

전차 차장과 승객들, 대한제국

 

 

 

 

 

 

 

전차매표소, 대한제국

 

 

 

 

 

 

전차 폭동, 근대로의 시행착오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에 모두가 금세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마찰은 전차 사고로 촉발된 전차 폭동이었다. 전차 개통 6일 만에 탑골공원 앞에서 6세 아이가 전차에 치여 숨졌는데, 일본인 운전수가 사고 수습없이 도망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전차를 전복해 두 대를 불태웠고,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여긴 서양에서는 조선인이 전차를 '악마의 차' 로 받아들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폭동의 배경에는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가물었던 기후와 계속 뛰는 물가, 전차로 실직한 인력거꾼 등 당시 정치 ·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과 을미사변 이후 악화된 대일 감정이 깔려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전차는 두 달간 운행을 멈췄으나, 이동의 편리함과 계급이나 성별의 구분없는 운영 등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은 점차 전차가 가져온 변화에 적응해갔다.

 

 

 

 

전차 사건과 한국인 폭동 관련 신문기사, 1899년 8월 4일

 

 

 

 

 

 

 

경성전기회사 제복

 

일제강점기 / (길이) 84.6㎝, (너비) 46㎝ / 전기박물관

 

경성전기회사에서 정하여진 규정에 따라 입도록 한 근무복.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전차 운전사와 차장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직종이었다. 임금도 타 직종에 비해 상당히 높았고, 무엇보다 제복을 입고 일을 했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제복은 검은색 상의에 흰색 하의를 받쳐 입었다.

 

 

 

 

 

 

 

전차 자재부 관련 서류철

 

1964년 6월 / 29㎝ × 22.1㎝ × 4.5㎝ / 한국전력 인사처 기록관

 

한국전력주식회사의 전차 운행과 관련한 다양한 서류철. 1950년대에 미국 전차를 수입하여 교통난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전차의 수가 증가하는 서울 인구수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한국전력은 일본 후지차량주식회사에서 차량 80대를 수입하려 했지만, 1963년과 1967년 2차에 걸쳐 30대만 수입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마지막 전차의 수입이었다.

 

 

 

 

 

 

 

1960년대 전차 운영 관련 서류철

 

1961 ~ 1966년 / 29㎝ × 22.1㎝ × 4.5㎝ / 한국전력 인사처 기록관

 

1960년대 전차 사업운 영에 관한 서류철. 1961년 한국전력주식회사 창립 시기부터 1968년 서울시의 전차 사업 양도 시기까지 전차 사업 운영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노면전차 수동 브레이크 핸들

 

1920년 / 원지름 47㎝, 핸들 두께 2.5㎝ / 미국

 

1920년대 운행하던 목재 단차의 수동 브레이크 핸들이다. 수동 브레이크는 공기 브레이크가 실용화되기 이전 (1920년대)의 노면 전차에 장착된 브레이크로서, 운전자가 직접 핸들을 돌려서 전차를 멈추게 하였다.

 

 

 

 

 

 

 

노면전차 경적

 

1960년대 / 나팔 지름 16.5㎝, 길이 42㎝ / 일본 미쓰비시

 

전차가 주핼할 때 주위의 사람이나 자동차, 마차 등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빠 ~ 앙" 하고 경고음을 내는 도구. 나팔 형태의 경적으로 전차종과 함께 차량 밑바닥에 부착되었다. 소리를 내기 위해 최소 8㎏에서 최대15㎏의 공기압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평양 전차 개통 기념 황동 소병

 

1923년 / 높이 12.5㎝ × 배지름 8.5㎝ × 밑지름 4.4㎝ / 전기박물관

 

평양부 (平壤府)가 전차를 개통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준공식에 참석한 주요 초청 인사에게 제공한 기념품. 평양의 전차 사업은 평양부에서 직영하였다. 1923년 5월 20일 평양역전 ~ 신창리 간 3.2㎝ 개통을 시작으로 노선을 점차 확장하여 기림리, 서평양, 대동교, 선교리, 사동까지 총 12.8㎞의 노선을 운행했다.

 

 

 

 

 

 

 

전차 승차권 검표 가위

 

1940 ~ 1960년대 / 길이 17㎝ × 높이 12㎝ × 폭 5㎝ / 일본, 경성전기 운수과

 

전차 승무원 (차장)이 탑승하는 승객으로부터 승차권을 받아 위조여부를 확인하고 재사용을 못하도록 원형 구멍을 뚫는 검표 가위 (펀치).

 

 

 

 

 

 

 

전차 승무원 배지 및 단추

 

해방 이후 / 4.4㎝ × 4.6㎝ 외 / 전기박물관

 

경성전기 및 한국전력회사 당시 승무원들의 옷에 부착했던 배지 및 단추, 승무원들은 운전사 및 차장이 있었으며, 일부이기는 하나 차장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배지에는 승무원의 번호 및 성별이 적혀있다.

 

"일부지만 여차장도 있었어요. 여차장은 아래 위로 남색 (감색) 상의와 바지를 입었답니다."

 

 

 

 

 

 

 

 

 

 

 

 

 

서울 시내 전차궤도 사업 양도 · 양수 협정서

 

1966년 / 25.9㎝ × 38.1㎝ / 한국전력 인사처 기록관

 

서울 시내 전차궤도 사업에 대한 인수 협정서. 한국전력과 서울시 사이에 체결한 문서로서 상공부장관과 교통부장관을 입회인으로 하고, 김현옥 서울시장과 박영준 한국전력 사장이 각각 사인을 하여 종결되었다. 한국전력의 서울시 전차궤도 사업은 67년간 운영을 마치고, 1966년 6월 1일 서울시에 이관되었다.

 

 

 

 

 

 

 

 

 

 

 

 

 

전차를 움직이는 사람들

전차가 움직이는 데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 안정적인 직장에 높은 급여를 받는 전차 운전자와 차장을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는 인기 직업이었다. 검은색 상의에 흰색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쓴 말쑥한 제복 차림도 이런 인기에 한몫했다. 전차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은 193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 노동자인 전차 안내양과 여차장이 등장했다. 시내 각지로 뻗은 노후한 궤도를 정비하는 궤도공과 동대문 차고지에서 운행 전후로 전차의 상태를 살피는 정비공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차를 뛰게 만든 숨은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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