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국립민속박물관 ㅡ 옥외 전시장] 01

드무2 2025. 3. 3.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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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ㅡ 옥외 전시장] 01

 

 

 

 

 

 

국립민속박물관

세계로 열린 창이 되기를 지향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연구하고 전시하면서 다양한 학습과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3개의 상설전시관 (한국인의 오늘, 한국인의 일 년, 한국인의 일생)과 함께, 국내외의 다양한 문화를 선보이는 2개의 기획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모든 소장품과 아카이브 자료의 개방 · 활용 · 공유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에 개방형 수장고 시설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삶과 문화의 의미와 가치를 밝히고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은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오는 2031년을 목표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특별시로 이전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건축

 

1966년 '종합박물관 설계 현상 모집' 에서 특선으로 당선된 강봉진의 작품입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한 첫 국립박물관 건물입니다. 1972년에 완공된 이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이 1986년까지 사용했습니다.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이 건물에 옮겨와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 정면의 계단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본뜬 것이고, 건물 상부에 재현한 전통 양식의 건물들은 법주사 팔상전 (중앙), 금산사 미륵전 (오른쪽), 화엄사 각황전 (왼쪽)을 본뜬 것입니다.

 

연혁

 

1946 국립민족박물관 개관 (서울시 중구 예장동)

1966 한국민속관 개관 (경복궁 내 수정전)

1975 한국민속박물관으로 개칭 및 이전 (경복궁 내 옛 국립현대미술관 건물)

1979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직제 개정

1992 문화부 1차 소속 기관으로 직제 개정

1993 현 건물로 이전하여 재개관

2021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수장고 개관

 

 

위치 : 03045 서울특별시 종록 삼청로 37

02ㅡ3704ㅡ3114

 

관람 안내

 

관람 시간

3월 ㅡ 10월 09 : 00 ㅡ 18 : 00

                    (매주 토요일 09 : 00 ㅡ 20 : 00)

11월 ㅡ 2월 09 : 00 ㅡ 17 : 00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1월 1일, 설 · 추석 당일

 

전시 해설

 

상설전시 정기 해설 | 1층 안내데스크

한국어 월 ㅡ 금 10 : 00, 11 : 00, 14 : 00, 15 : 00

            주말 및 공휴일 10 : 00, 14 : 00

영어 월, 수, 금 10 : 30, 14 : 30

         목, 일 10 : 30

일본어 월, 화, 목 11 : 00, 15 : 00

            토, 일 11 : 00

중국어 월 10 : 30

 

예약 전시 해설

예약방법 | 희망일 3일 전까지 전화 예약

인원 | 단체 10 ㅡ 30명 내외

전화 | 섭외교육과 02ㅡ3704ㅡ3129

예약시간 | 월 ㅡ 금 09 : 00 ~ 12 : 00, 13 : 00 ~ 18 : 00

 

유아차 / 휠체어 대여

사무실 입구 안내데스크, 신분증 필요

 

공연

 

토요상설공연

일시 | 매주 토요일 15 : 00

장소 | 본관 대강당

 

금요열린민속무대

일시 | 4월 ㅡ 6월, 9월 ㅡ 10월 격주 금요일 14 : 00

장소 | 본관 앞마당

 

오시는 길

 

지하철

3호선 | 셩복궁역 5번 출구, 안국역 1번 출구

5호선 | 광화문역 2번 출구

 

버스

광화문 세종로 일대 버스 정류장 하차, 도보 15분

 

마을버스

종로 11번 | 서울역 → 남대문 → 시청역 → 프레스센터 → 광화문역 → 경복궁 → 국립민속박물관 (정독도서관) 하차

 

주차

경복궁 주차장 이용 (유료, 06 : 00 ~ 23 : 00)

 

 

 

 

옥외 전시장

 

전통 마을을 지나 현대의 동네에 이르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온, 한국인들의 생활 공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오촌댁과 효자각을 비롯하여 물레방아와 연자방아, 나락뒤주는 19세기의 마을 풍경을 보여주고, 1970 ~ 80년대의 학교, 이발소, 다방, 목욕탕, 사진관을 재현한 '70 · 80 추억의 거리' 는 오늘날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되살립니다.

 

 

 

 

 

 

 

 

 

 

 

 

 

마을의 공동체 신앙물

돌탑 · 장승 · 솟대

 

20 ~ 21세기

복제

 

전통적으로 한국의 마을은 대개 뒷산에 수호신 守護神을 모신 제당 祭堂을, 마을 입구에는 장승 · 솟대 · 돌탑 · 신목 神木 등의 신앙 대상물을 두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곳에 전시된 신앙 대상물은 마을 입구에 모셔지는 것 중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를 연출한 것이다. 이 중 장승과 솟대는 전국 각 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것을 선정해 실물 크기로 만들어 세웠다.

 

 

 

 

 

 

 

 

 

 

효자문

 

 

 

 

효자각

 

나라에서 허권 (許權, 1847 ~ 1895)에게 내린 효자 정려 (孝子旌閭, 효자에 내린 표창)를 기념한 효자비 (孝子碑)의 보호 건물과 출입문이다. 효자각에는 연꽃 봉우리 · 용 · 봉황 등을 조각하고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효자문에는 ‘孝子門 (효자문)’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주위에는 호랑이와 매란국죽 (梅蘭菊竹)이 그려져 있다. 효자각과 효자문을 통해 효를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 기술, 공예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 건물은 허권 후손의 살림집 안에 있었으나 2005년 홍수로 손상되는 등 보존하기가 어려워 2008년 이곳으로 옮겨서 보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물에 잠겨 썩은 기둥 일부를 보수하였고 담장은 영역만을 표시해 놓았다.

 

 

 

 

 

 

 

 

 

 

효자각과 효자문

 

1900년대

허권 후손 기증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태인 허씨 허권 許權, 1847 ~ 1895 에게 내린 '효자정려 孝子旌閭, 효자에 내린 표창' 를 기념한 효자비 孝子碑와 그 보호 건물로, 효자각과 효자문을 통해 효를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기술, 공예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의 허권 후손의 살림집 안에 있었던 것을 2008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둥 일부를 보수했고 담장을 둘러 영역을 표시해 놓았다. 효자각은 화려한 단청과 함께 연꽃 봉우리, 용, 봉황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효자문에는 '孝子門' 이라고 쓴 현판과 호랑이 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梅蘭菊竹]가 그려져 있다.

 

 

 

 

 

 

 

 

 

 

 

 

 

 

 

 

 

 

 

관룡사 석장승

 

연대 미상

복제

 

관룡사 석장승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문화동 벅수

 

1906년

복제

 

문화동 벅수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남장동 하원 당장군

 

1832년 추정

복제

 

남장동 하원 당장군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남장동

 

 

 

 

 

 

 

 

 

 

 

 

 

남송리 쌍계사지 당장군 · 주장군

 

연대미상

복제

 

남송리 쌍계사지 당장군 · 주장군

소재지 :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서외리 상원 주장군

 

1689년

복제

 

서외리 상원 주장군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비룡동 천하대장군 · 지하여장군

 

연대 미상

복제

 

비룡동 천하대장군 · 지하여장군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정계대장군

 

연대 미상

복제

 

정계대장군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양덕리 할머니 미륵

 

연대 미상

복제

 

양덕리 할머니 미륵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덕목리 석장승

 

연대 미상

복제

 

덕목리 석장승

소재지 :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당골 석장승

 

연대 미상

복제

 

당골 석장승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당골

 

 

 

 

 

 

 

 

 

 

 

 

 

문촌리 석장승

 

연대 미상

복제

 

문촌리 석장승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성기 신앙물

 

연대 미상

복제

 

성기 性器 숭배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종교적 주술 (呪術) 행위로, 남녀의 생식기를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 그 형태나 모형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재 전승되는 성기 (性器) 관련 신앙은 사람의 성기처럼 생긴 돌이나 지형을 기자 (祈子), 자식을 기원함 · 마을 수호 · 풍요 기원의 대상으로 숭배하거나, 남녀 성기의 모형을 나무 · 돌 · 토기 등으로 만들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신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12지신상 (十二支神像)과 함께 망자 (亡者)를 지키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석상 (石像)으로, 각각 문관 (文官, 복권을 쓰고 홀 (笏)을 가지고 있음)과 무관 (武官,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문ㆍ무인석은 중국의 영향으로 8세기부터 왕릉 (王陵)에 나타난다. 시대에 따라 배치와 조각양식이 다양하게 변하는데, 이러한 문ㆍ무인석 조각 양식의 변화는 우리나라 조각사 (彫刻史)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는 현재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전시되고 있다.

 

 

 

문인석

 

조선시대

(1392 ~ 1910)

 

문관 (文官)의 형상으로 만든, 무덤 (墓)을 지키는 석물로, 문관의 차림새에 홀 (笏), 조선시대 관리들이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을 쥐고 있다. 이 밖에도 무덤에는 다양한 석물 (石物)이 조성되어 있는데, 갑옷차림으로 무기를 들고 있는 무관 형상의 무인석 (武人石)을 비롯한 비석 (碑石), 망주석 (望柱石, 무덤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 상석 (床石,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넓적한 돌), 향로석 (香爐石, 향로를 올려 놓는 네모반듯한 돌) 등이 있다.

 

 

 

 

 

 

 

 

 

 

상석

 

1940년대 전후

김성흠 기증

 

무덤 앞에 설치하는 넓은 직사각형의 돌로 된  상으로, 제사에 쓰는 재료나 향을 피우는 그릇을 놓는 데 쓰인다. 전시된 상석 (床石)은 서울에 사는 김성흠 (金聖欽)씨가 7대조와 3대조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출토된 것을 기증한 것이다.

 

 

 

 

 

 

 

남오성 南五星 장군묘 묘비와 석물

 

18세기

남오성 후손 기증

 

2002년 충남 태안군 태안읍 석산리에서 발견된 남오성 장군 무덤의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床石,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넓적한 돌), 향로석 (香爐石, 향로를 올려 놓는 네모반듯한 돌) 등의 석물이다. 남오성 (南五星 1643 ~ 1712) 장군은 1643년에 출생한 무관 (武官)으로, 1676년에 무과 (武科)에 급제한 뒤 삼남 충청, 전라, 경상 지방의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통제사 (三道統制使) 등을 역임했고, 1712년에 사망했다. 묘비의 앞면에는 남오성 장군과 부인 창녕 성씨 (昌寧 成氏)의 합장묘임을 밝혀주는 내용이, 뒷면에는 장군의 외손 (外孫)인 임박 (任璞)이 남오성 장군의 일생을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나락뒤주는 나락을 수확하여 담아두던 저장 용구로, 정면 1칸, 측면 1칸 (가로 240, 세로 134, 높이 200㎝)이다. 네 벽은 널판으로 되어있고 지붕에는 짚으로 덮는다. 바닥에도 널을 깔며 지면과는 30∼50㎝의 간격을 둔다. 전면 설주의 양쪽에 홈을 파고 여러 개의 널판을 하나씩 끼웠다 빼는 구조의 문이 있다. 장방형의 널판 중앙에는 각각 ‘一’부터 ‘五’까지 한자가 묵서된 흔적이 흐리게 남아 있다. 내부에는 널판으로 좌우를 나누어 설치되어 있는데 나락, 수수 등 곡식을 분리하기 위해서이다. 쥐가 들어가지 못하게 틈새를 밤송이 껍데기로 메웠다. 문경 서중리 민가에서 1870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김덕묵 씨가 기증하였다.

 

 

 

나락뒤주

 

19세기

김덕목 기증

 

가을에 나락 (도정하지 않은 볍씨)을 수확하여 저장하는 용구로, 지역에 따라 나락두지, 두대통, 볏두지, 둑집이라고도 부른다. 이 나락뒤주는 지면에서 40㎝ 정도 바닥을 띄우고, 널판으로 벽을 세운 구조에 짚으로 만든 지붕을 얹은 형태로, 널판 사이의 틈은 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밤송이로 메웠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민가에서 1870년부터 사용하던 나락뒤주를 옮겨왔다.

 

 

 

 

연자방아는 평평한 원형의 돌 위에 다시 둥근 돌을 얹어 이것을 소나 말로 돌려 곡식을 찧는 도정 (搗精) 기구로 ‘연자매’, ‘돌방아’, ‘돌방애’라고도 한다. 맷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연자방아는 윗돌과 아랫돌이 마주 돌아가는 맷돌과는 달리 축력 (畜力)에 의해 윗돌과 아랫돌이 수직을 이루며 돌아감으로써 일의 능률이 맷돌에 비해 훨씬 크다. 곡식을 빻을 때는 한 사람이 소나 말의 고삐를 잡고 앞에서 몰고,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르며 넉가래로 곡식을 뒤집어 준다. 연자방아를 만들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장만해 함께 사용했는데, 기계식 방앗간이 들어오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연자방아

 

평평한 원형의 돌판 위에 둥근 돌을 얹어 이것을 소나 말로 돌려 곡식을 찧는 기구로, '연자매', '돌방아', '돌방애' 라고도 한다. 손으로 윗돌을 돌려 곡식을 가는 맷돌과는 달리, 연자방아는 가축의 힘에 의해 윗돌과 아랫돌이 수직을 이뤄 돌아가기 때문에, 맷돌에 비해 일의 능률이 훨씬 높다.

곡식을 빻을 때는 한 사람이 소나 말의 고삐를 잡고 앞에서 몰아 윗돌을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이 뒤를 따르며 넓적한 나무 판에 긴 자루를 단 도구인 넉가래 (넓적한 나무판에 긴 자루를 단 도구)로 곡식을 밀고 뒤집어 준다. 연자방아를 만들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장만해 함께 사용했는데, 기계식 방앗간이 들어오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연구 · 교육 · 보존하는 문화공간입니다. 본 건축물은 1966년 "국립종합박물관 설계경기" 공모 특선 당선작으로, 1972년부터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옮겨와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계단은 불국사의 청운교 · 백운교, 건물 중앙은 법주사 팔상전, 오른쪽은 금산사 미륵전, 왼쪽은 화엄사 각황전을 본떠서 디자인 하였습니다.

 

 

 

 

 

 

 

 

 

 

 

 

 

 

 

 

 

 

 

 

 

 

12지신상

 

12지신은 쥐 [子], 소 [丑], 호랑이 [寅], 토끼 [卯], 용 [辰], 뱀 [巳], 말 [午], 양 [未], 원숭이 [申], 닭 [酉], 개 [戌], 돼지 [亥] 등 열 두 동물을 사람의 몸과 동물의 머리로 표현한 신장 (神將)이다. 12지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후 방위와 시간 개념으로 불탑 (佛塔), 무덤의 호석 (護石), 불화 (佛畵) 및 여러 생활유물에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12지는 통일신라 성덕왕릉 (聖德王陵) 호석의 12지를 본 따 만든 것으로, 방위에 따라 원형으로 설치하였다. 조형물 상부에는 조선시대 나침반인 윤도 (輪圖)를, 그리고 바닥에는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삼태극 (三太極)을 표현하여, 12지가 지닌 시간과 방위 개념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물레방앗간

20세기

재현품

 

정미나 제분을 하는 도구인 물레방아를 설치한 너와지붕 형태의 방앗간이다. 물레방아는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의 힘으로 물레의 바퀴가 돌아가면서 방앗공이를 들어 올렸다. 내리 찧는 원리로 작동한다. 방앗공이는 두 개가 있는데, 물레가 한 바퀴 도는 동안 번갈아 한 번씩 움직인다. 이 물레방앗간은 강원도 삼척이 도계읍 신리의 사례를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너와지붕과 건물 내부의 외양간, 항아리, 지붕 등은 강원도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촌댁

1848년

남병혁 기증

원 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 1리

 

조선후기 이 지방의 중산층 가옥 형태를 잘 보여주는 가옥으로, 경상북도 영덕군 원구 1리에 있던 것을 남병혁씨로부터 기증받아 옮긴 것이다. '오촌댁 梧村宅' 이라는 명칭은 영양 남씨 英陽南氏 남용진 南龍鎭, 1887 ~ 1912 이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출신의 재령 이씨 載寧李氏와 혼인하면서 붙여진 택호에서 비롯되었다. 건물 이전을 위한 해체 과정에서 " 道光貳拾捌䄵戊申三月二日申時立柱上樑同日時 도광이십팔년무신삼월이일신시입주상량동일시" 라고 적힌 상량문이 발견되어, 건립 연대는 1848년 임을 알 수 있다. 가옥의 중앙에 마당이 있는 ☐자 형태로, 지붕의 용마루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안채와 사랑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거주 공간으로 네 개의 방 (안방, 상방, 사랑방, 문간방) 을 비롯해, 안마루 (안대청), 사랑마루 (사랑대청), 정지 (부엌), 물건을 넣어두는 도장방 (방에 부속된 수장공간) 과 고방 (庫房, 창고방) 이 있다. 외부 출입은 뒤쪽을 제외한 세 방향이 다 가능하며 뒷마당에는 장독대를, 오른쪽 마당에는 디딜방앗간과 우물, 화장실을 배치했다.

 

 

 

 

 

 

 

 

 

 

 

 

 

돌하르방

19세기 이전

 

돌하르방은 대개 제주 내 읍성 邑城의 문앞에 설치되어 성문을 지키는 수호신이면서 민간 신앙의 대상물이기도 했다. 돌하르방은 '돌할아버지' 란 뜻으로, '우석목 偶石木', '무석목 武石木', '백하르방'. '옹중석 翁仲石' 이라고도 한다.

구멍이 많은 현무암을 사용해 입체감이 강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 눈망울을 하고 벙거지 모자를 머리에 꾹 눌러쓴 모습이다. 현재 제주도 내 45기의 돌하르방은 제주도 지방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돌하르방은 제주시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정주목과 정낭

20세기

 

소와 말의 출입을 막고 주인의 외출 여부를 표시하기 위해, 제주도의 살림집 안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로인 올레 입구 좌우에 돌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보통 긴 나무로 만든 정낭을 걸칠 수 있게 3 개의 구멍을 양쪽의 정주목에 뚫어 놓는다. 정낭은 주인이 잠깐 이웃집에 갈 경우에는 맨 아래 구멍에만, 반나절 집을 비울 경우에는 맨 아래와 중간에 두 개, 먼곳으로 '마실' 을 갔을 때에는 세 개의 구멍 모두에 걸쳐 둔다.

 

 

 

 

 

 

 

동자석 · 벅수 · 문인석

19 ~ 20세기

천신일 기증

 

동자석

무덤 앞에 세워져 죽은 자의 시중을 들어 영혼을 위로하고 무덤을 지키는 석상이다.

 

벅수

장승의 다른 이름으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거나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문인석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석상이다.

좌우 한 쌍을 세우는데, 머리에 복건을 쓰고 손에 홀을 지녀 문관임을 나타낸다.

 

 

 

 

 

 

 

수표

18세기

복제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하천의 물 높이를 재는 측량기구로, 수표의 몸체에는 1 척부터 10 척까지의 눈금이 표시되어 있는데, 3 척 이하는 가뭄, 9 척 이상은 홍수의 위험을 알려주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쉽게 상하는 단점이 잇어 돌로 바꾸었다.

수표는 세종 23년 1441년에 처음 만들어져 청계천 마전교 (馬廛橋, 후에 수표교로 이름이 바뀜) 서쪽에 세워졌다. 이곳에 전시된 수표는 영조 (재위 1724 ~ 1776) 때 다시 제작해 청계천 수표교 앞에 세운 것을 1997년에 복제한 것으로, 1960년에 청계천 복개공사 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긴 것을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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