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숨어있는 세계사

[세계의 마지막 군주들]

드무2 2023. 2. 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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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마지막 군주들]

 

 

 

 

❶ 왼쪽 사진은 1987년의 콘스탄티노스 2세. 오른쪽 사진은 1960년 로마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 (드래건 클래스)에서 금메달을 딴 후 덴마크 국가대표 요트 선수였던 파울 엘스트림 (맨 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2세 (맨 왼쪽).

 

 

 

❷ 왼쪽은 나폴레옹 3세의 초상화. 오른쪽은 1864년 나폴레옹 3세가 퐁텐블로궁에서 시암 (태국의 옛 이름) 대사의 인사를 받고 있는 것을 묘사한 그림.

 

 

 

❸ 왼쪽은 만주국 황제 제복을 입고 있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 오른쪽은 푸이의 일생을 그린 영화 '마지막 황제' 포스터.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제2공화정>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황제죠

 

 

1870년 9월 혁명으로 군주자리 내놔

쿠데타에 망명한 콘스탄티노스 2세

푸이의 淸나라, 신해혁명으로 멸망

 

 

지난 10일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 톤스탄티노스 2세가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올해는 그리스에서 왕정이 폐지된 지 50년이 되는 해죠. 콘스탄티노스 2세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났어요. 이처럼 세계 여러 나라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이나 혁명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군주들이 꽤 있어요.

 

'요트 금메달리스트'의 몰락

콘스탄티노스 2세는 1964년 3월, 23세에 그리스 국왕이 됐어요. 그는 왕세자 시절 1960년 로마올림픽 요트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면서 큰 인기를 끈 적 있죠. 덕분에 왕실에 대한 여론도 호의적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국왕으로 즉위한 이듬해 국민들 지지를 받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중도연합 정부와 대립하다 총리를 해임해버려 비판을 받습니다.

이후 1967년 4월 그리스에서는 좌익 세력과 손잡던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섭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엔 이 군사 정권과 협조하다가 같은 해 12월 역 (逆)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이탈리아 로마로 탈출했어요. 그리스 군사 정권은 1973년 6월 왕정 폐지를 선언하고, 1974년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정을 채택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으로 남게 된 거죠. 그는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주로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했어요. 1990년대에는 국적까지 박탈당하고 왕실 재산을 두고 벌인 정부와의 소송에서도 지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73세인 2013년에야 그리스로 귀국해 여생을 보내다 지난 10일 뇌졸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칠전팔기 황제 도전,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이자 유일한 계승자를 자처했던 샤를ㅡ루이 나폴레옹은 기존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파리의 민중이 자신을 지지해 줄 거라 믿었어요. 1836년 10월 29일 스트라스부르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그는 경찰에 의해 바로 진압당하면서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죠. 이후 그는 영국 런던에 정착했지만, 프랑스 황제가 되려는 꿈은 버리지 못했어요. 1840년 여름 다시 병력을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도착했으나 또 바로 진압됐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암 (Ham) 요새에 갇히게 되죠.

1848년 2월 왕정이 무너지면서 프랑스에서는 제2공화정이 수립됩니다. 2년 전 감옥을 탈출해 영국에서 지내고 있던 샤를ㅡ루이 나폴레옹은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74.2%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이때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 이었는데, 그는 헌법을 개정해 다시 대통령이 되고자 했죠. 이후 헌법 개정에 실패하자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포해 버려요. 1852년에는 그의 황제 즉위 가부 (可否)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됐고, 97% 압도적인 지지율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게 되죠.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제2공화정이 무너지고 제2제정이 탄생합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국제적으로는 식민지를 넓히려고 노력했어요. 1856년에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에 참가했고,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1860년대부터 황제의 독재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합니다. 1870년 그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 맞선 전쟁에서 졌고, 심지어 프로이센군의 포로로 잡힙니다. 그의 권위는 저물어 가고 결국 1870년 9월 일어난 혁명으로 프랑스의 마지막 군주 자리를 내놓게 되죠. 그의 20년 동안 통치가 끝나면서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정이 선포됩니다.

 

청나라 최후의 황제, 정원사 되다

1908년 11월 청 (淸) 나라 광서제가 사망하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서태후는 광서제 동생 순친왕의 아들 푸이 (溥儀)를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푸이는 태어난 지 2년 10개월 만에 청의 12대 황제 선통제가 됐어요. 푸이의 나이가 어려 아버지 순친왕이 섭정 왕이 되어 통치했죠. 그런데 이 시기 '신해혁명'이 일어납니다. 군벌 출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지위를 얻기 위해 청 왕조 타도에 앞장선 거죠. 1912년 위안스카이 압박을 받은 당시 황태후 (광서제 부인)는 공화국 도입을 위해 황실 통치권을 포기했고, 푸이의 퇴위를 선언하는 조서를 공표했어요. 푸이는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됩니다. 이로써 286년간 지속했던 청 왕조가 무너졌어요.

이후 자금성에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던 푸이는 1924년 궁에서 쫓겨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게 됩니다. 1924년 11월 베이징 일본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925년에는 텐진의 일본 조계지 (租界地 · 외국인이 거주하는 치외법권 지역)로 이주했는데, 이 시기 그는 만주에 진출하고자 했던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어요. 마침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다시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가 됩니다. 하지만 관동군 고위 장교들이 황제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조언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함께 연합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어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하면서 8월 17일 만주국은 해체됐죠. 이튿날 푸이는 퇴위하겠다는 조칙을 내려 만주국은 13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푸이는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용돼 있다가 1959년 모범수로 사면됐고, 일반 시민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 중국과학원이 운영하는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가 되기도 했어요. 이후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해 힘쓰다가 1967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게 되죠. 파란만장했던 푸이의 삶은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어요.

 

장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1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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