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한국의 아버지 ㅡ 그가 남긴 유언] 02
[메트로신문] 영원한 이별,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격절감(隔絶感), 그러한 헤어짐이 영수를 향한 나의 사랑을 일깨워주었소.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자가 쏜 총탄이 나를 피하고 당신의 머리를 꿰뚫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오? 막은 올라갔고 관중이 있으니 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소.
나는 경축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머릿속으로는 수술을 받고 있을 당신의 생각보다 관중 앞에서,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시정의 잡개 앞에서, 미친개 옆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궁리하고 있었소. 그 순간에도 다음 장면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숙련된 배우가 되어 있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어느 장소에서, 어느 군중 앞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탁월한 배우였소. 그가 전 유럽을 무대로 삼았다면 나는 비록 한반도 반쪽이 무대였지만, 나도 그처럼 행동하려 했소.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웅 존경심리'를 갖고 있소. 그래서 열광적으로 섬길 영웅을 죽을 때까지 찾는 법이오. 그들의 영웅이 되기 위해, 그들의 '영웅 존경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도자는 연기를 해야 되는 거요.
나는 경축사를 다 읽고 난 다음 당신이 조금 전 앉았던 의자 옆에 흩어져 있는 흰 고무신 한 짝과 핸드백을 주워들고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식장을 빠져나왔소.
승용차에 올라탔을 때 당신이 앉았던 텅 빈 자리가 눈에 띄었소. 식장에 올 때까지 당신이 앉았던 그 자리가 내 가슴을 텅 비게 만들어서 눈을 감았소. 그리고 내 손에 들려진 당신의 흰 고무신 한 짝을 가슴에 꼭 껴안고 눈물을 흘렸소. 그것도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말이오. 내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아오? 당신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알고도 거짓 연기를 해야 하는 내 신세가…… 너무나 한탄스러워서……. 정말 내가 가증스러웠소.
그 순간 주석에서는 정신을 가다듬은 여가수가 가슴에 총탄을 맞아 옆으로 쓰러진 대통령을 반듯이 일으켜 앉힌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여가수가 묻는다.
"나는 괜찮아."
눈을 감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대통령이 말한다.
"진짜 괜찮으십니까?"
경호실장이 화장실 문을 빠끔히 열어 고개만 내놓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대통령은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긴 채 머지않은 지나간 과거, 아내와 이별한 후 지금까지의 과거를 회상한다.
나를 감싸안은 젊은 여인의 향긋한 체취가 내 후각을 자극한다. 젊은 여인의 나신이 눈앞에 다가온다. 반듯이 누워 두 다리를 공중에 들고 있는 젊은 여인의 나신…… 조그마한 발, 공중에 들려 있는 연약한 다리, 그 다리를 버티게 하는 강인한 골반, 으스러질 것같이 가느다란 허리와 풍만한 가슴이 보인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젊은 여인의 은밀한 곳, 왕관을 팽개치게 만들고,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천하의 성인을 천하의 악인으로 만들고, 일개 필부를 영웅으로 변화시키기도 하는 바로 그 내밀한 곳…… 악인과 선인, 범부와 영웅, 미녀와 추녀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곳…… 세상의 모든 변덕스러움이 도사리고 있는 곳…… 나 역시 그곳에 내 몸의 일부분을 맡기고, 뼈저린 외로움을 달래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꼭 감은 여자의 두 눈 가장자리에 희열의 감정이 흐르고, 꼭 다문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탄성이 내 귓전을 스쳐간다.
비록 순간의 착각이었다 해도, 그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외로운 남자의 휴식처였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위로였다. 혼자가 된,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변명일 수도 있지만, 나는 피할 수가 없었다. 반려자를 잃고 외로움에 방황하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안식처였으니 그 순간만은 모든 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이 대통령의 가슴을 꿰뚫은 지 2분 후, 중앙정보부장이 새로운 권총을 손에 들고 들어선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경호실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경호실장이 쓰러진다. 비서실장은 구석에 붙어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옆으로 다가간다. 여가수와 여대생이 혼비백산하여 방을 빠져나간다.
대통령의 상념이 계속 이어진다.
매콤한 화약 냄새. 그것을 앞세우고 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죽음이 공기를 압축하면서 나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구나. 내 바로 앞에서 머뭇거리다 살짝 피해간 과거의 죽음은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구나.
내 머리 옆에 다가온 싸늘한 총구, 그리고 그 총구에서 뿜어나오는 화약 냄새…….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댄다. 방아쇠를 당긴다.
"탕!"
대통령의 뇌가 치명적으로 손상된다.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고 있다. 경호실장은 숨을 거두었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비서실장이 경호실 직원 두 명과 함께 숨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기려고 한다.
대통령의 독백이 계속된다.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빠져나와 대기 속을 유영하고 있구나. 빠른 속도로, 편안한 마음으로……. 몸에 와 닿는 뭉게구름, 산뜻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 내 영혼이 잠시 머문다. 하늘에서 뻗어 내려온 돌층계가 보인다. 돌층계 맨 위에 빠끔히 모습을 보이는 옛 성곽 위의 지붕. 바람에 넘실거리는 연들처럼 층계 위를 오가는 형형색색의 구름 조각들,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다. 저 층계를 올라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이곳에서라도 마지막으로 세상을 한 번 내려다보자…….
북악산 기슭이 보이고, 청와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근처 한곳에 있는 아담한 2층 양옥집 안가의 뜰로 성급히 내려서는 세 사람이 보인다. 그중 어느 건장한 사람의 등에 업혀 있는 왜소한 체구의 사나이…… 짧은 순간과도 같았던 62년의 세월 동안 내 영혼이 머물러 있었던 육체로구나. 저토록 보잘것없고 볼품없이 병들어 있었단 말인가. 주색에 찌들고, 분노에 멍들고, 탐욕에 윤기를 잃고, 비루한 욕망에 퇴색된 내 영혼이 머물렀던 육체…… 개골창에 팽개쳐져도 안타까워할 사람이 하나 없을 정도로 볼품이 없구나.
신이 자비를 베풀어 다음 생에 내 영혼이 머물 육체가 개돼지와 같은 동물의 그것이 아니고 또다시 인간의 몸이라면, 나는 단호히 신의 은총을 거부하겠다.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인간의 육체보다 들판이나 산속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때가 되면 나보다 강한 것의 먹이가 되어 뼈만 남기는 맹수이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음률이 옛 성 쪽에서 들려온다. 아, 저기 누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구나. 검은색 도포를 입고 검은색 갓을 쓴 백발의 노인과 노인 뒤를 따라오는,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소복을 입은 여인이 보이는데…… 누구지? 구름이 그들의 모습을 가려서 분별이 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을 누르면서 시선을 아래로 향해본다.
저 땅 위에서 등에 업힌 내 보잘것없는 육체가 내 차에 실리는구나. 내 공기를 마시고, 내 음식을 먹고, 내 여자와 동침했고, 내 삶을 살아온 그 하찮은 육체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낯모르는 육체다. 뒷좌석 비서실장의 무릎에 놓인 허물어진 나의 육체, 그래도 영혼이 빠져나간 줄도 모르고 육체 속에 남은 피로 영수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구나.
피야! 더러운 피야! 빠져나와라, 빠져나와라, 한 방울의 피도 남겨두지 말고 너의 육신에서 흘러나와 의자를 적시고, 내 차를 잠기게 하고, 궁정동 안가를 휩쓸어버리고,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오늘 저녁을 영원히 너의 핏속에 가두어다오. 역사의 판관들이 찾아낼 수 없도록, 누구보다도 내 아들딸들의 귀와 눈이 듣거나 볼 수 없도록 내 핏속에 깊숙이 가두어다오.
비서실장! 김 장군! 그 육체의 등에 뚫린 총구멍을 왜 손으로 막느냐? 당장 손을 떼라. 제발 부탁이다. 김 장군! 그 육체는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 지난 18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육체는 '위기감'이라는 진흙탕 속을, '외세'라는 비바람 속을, '과욕'이라 불리는 늪지대 속을, 그리고 '냉혹'이라 일컬어지는 얼음판 위로 끌려 다녔다. 이젠 지칠 대로 지쳐버려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뭐라고?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제 우리의 조국은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길로 가야 한다. 바로 그 길로만 가면 된다. 1960년대는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 우리의 시대정신이었고, 1970년대는 '공산화의 방지'였다. 앞으로 다가올 1980년대는 '민주화', '번영 속의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어야 하고, 1990년대는 세계화된 '문화시민 의식의 창달', 그리고 2000년대는 '선진국 진입'이 시대정신일 것이다.
뭐라고? 과욕이라고? 김 장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선진국 진입에는 50년이면 충분하다. 50년 안에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못하는 것이다. 선진국 진입 문턱에서 좌초한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일본을 보아라. 메이지 유신 후 50년 만에 미개한 국가에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본 육사생도 시절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 그것은 일본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장군! 이 말을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꼭 전해다오.
김 장군! 김형! 눈물을 흘리지 마라. 너의 무릎에 놓인 가련한 육체를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리지 마라. 그토록 한심한 육체가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느냐? 한 군인으로서, 한 남편으로서, 한 아버지로서 그 육체는 더러운 인생살이를 살아왔다. 전쟁터의 포화 속에 전우 옆에서 죽어야 할 군인이 젊은 여자들을 옆에 끼고 부하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비참한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는 중이다. 착한 마누라를 만인이 보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흉탄에 피를 흘리며 젊은 몸으로 죽게 했다. 그리고 어린 자식을 홀로 남겨두고 버림받은 탕아로 횡사를 자초한 수치스러운 아버지로서 그 육체는 이제 이 험악한 세상살이를 끝마치려고 한다.
김 장군! 비서실장!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그 남루한 육체를 둘러메고 당장 청와대로 들어가라. 청와대 2층 내 침실 침대 위에 올려놓고 내 육신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폭파해버린 다음 국민에게 말해다오. 국민의 사랑을 받던 대통령은 서기 1979년 10월 26일 밤 적군이 설치한 폭탄에 희생되어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고.
대통령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누군가를 노려본다.
뭐라고? 후계자가 누구였으면 좋겠냐고? 비서실장! 조금도 걱정 말아라. 권력은 더러운 작부(酌婦), 가장 강하고 가장 잔인하고 가장 무자비한 자의 품에 안겨 연지 곤지 찍고 아양을 떨게 마련이다.
[출처 : metro 2023년 10월 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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