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선진 한국의 아버지 ㅡ 그가 남긴 유언 ④]

드무2 2023. 11. 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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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한국의 아버지 ㅡ 그가 남긴 유언 ④]

 

 

 

 

 

 

 

나는 외로움에 시달리기 시작했소. 고독은 지루함으로 이어졌고……. 배신당한 남자가 지루함에 빠질 때 무엇을 원하는지 아시오? 전쟁이오. 나는 전쟁을 원했소. 대포 소리, 비행기 소리, 신음 소리, 피비린내……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된 그 순간은 외롭고 무료한 남자의 가슴에 평온을 가져다주었소.

대통령은 순간 힘이 치솟는 듯, 불끈 쥔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독백을 시작한다.

'유신'은 내가 선택한 전쟁이었소. '유신' 의 대군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 빈곤이라는 적을 무찌르는, 인류 전사 (戰史)에 영원히 기록될 전쟁 영웅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오.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중을 나의 친구로 받아주었소. 그들이 나에게 보내는 뜨거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박수 소리를 듣고 있었소. 잠이 찾아올 줄 모르는 깊은 밤이면 나는 그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잠들려고 애썼고, 그들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며 미소를 짓곤 했소.

나는 시끄러운 자들을 냉정하게 잠재웠소. 그러나 그들 영혼의 눈길은 어찌할 수 없었소. 지금도 그 원망의 눈초리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나의 가슴속을 후벼 파고 있소. 일생을 울분 속에 보낸 원망의 눈초리, 동포의 잔인함에 생의 의욕을 잃어버린 멍한 눈길, 컴컴한 지하실에서 동료들에게 당한 수모에 치를 떨고 있는 젊은이들의 공포에 질린 눈길,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보내는 절규의 눈길, 눈길들이…….

어머니의 절규하는 눈길이 멀어지면서 검은 상복을 입은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변한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두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절규한다.

"그대에게 저주가 내리리!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저주가 내리리! 그대 영혼에게 고통을 주리다. 내가 받은 고통의 수천 배의 고통을……. 기나긴 밤 아들 모습을 그리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한지 아느냐? 저주, 저주, 저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가 그대의 자식에게 내릴 것이다."

대통령이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그대들에게 간절히 애원하나니…… 제발, 내 아들만은 그냥 내버려다오!"

필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내 아들…… 오늘 저녁도 가족과 떨어져 육사의 싸늘한 막사에서 흉탄에 빼앗긴 어머니를 꿈꾸며 잠들어 있을 내 아들은 그냥 내버려두시오. 대신 그대들이 내민 복수의 칼날 앞에 내 앞가슴의 가죽을 벗기고 시뻘건 심장을 서슴없이 갖다 대겠소. 제발 내 아들만은 그냥 내버려두시오!

영수! 어디로 가는 거요? 우리의 자식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들을 따라간단 말이오? 제발, 그들과 같이 가지 마오. 왜 나를 두고 혼자 가려는 거요? 어서 와 내 손을 잡아주오. 나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끌어주오. 왜 날 버리려는 거요? 뭐?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 알겠소.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소. 지상으로 내려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당신 뒤를 따라가겠소.

내 영혼이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구나. 차 속에 실려 있는 내 육체를 찾아서.

비서실장! 네 품속은 따뜻하고 네 무릎은 몹시도 포근하구나. 눈물을 거두어라.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내가 다시 내 몸속에 돌아왔다. 네 가슴속의 분노를 풀어라. 김 부장이 오히려 내 고통을 끝내주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모진 고통이었다. 그 고통에서 이제는 나도 해방되어야겠다. 비서실장! 이제부터 내가 남기는 마지막 말을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전해다오.

역사여! 냉혹하고 잔인한 역사여! 이 말을 내가 그대에게 남기는 마지막 부탁으로 이해해다오. 사랑하는 아내의 가슴에 흉탄을 박아 피를 쏟게 했고, 그래서 외로운 생애를 살다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흉탄으로 인생을 끝마쳐야 하는 불쌍한 독재자의 기구한 운명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는 말아다오. 이제 내가 국민에게, 조국에, 조국의 산야에, 조국의 역사에 바라는 것은 망각 (忘却)이다. 사랑하는 역사에 버림받고서도 자기를 미워하지는 말아달라고 애원하며 비는 불쌍한 남자로만 기억해다오.

정치꾼들아! 거간꾼들을 동원해 장터를 벌여놓고 민주주의란 허망한 단어로 착하고 어진 국민들의 땀에 젖은 돈을 후려내려는 그대들! 이것을 내 마지막 경고로 엄숙히 받아다오. 그대들끼리 물고 물어뜯기는 아수라장 노름판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판에 순박한 사람을 끌어들여 타락시키지는 말아다오. 그 약속만 지킨다면 다른 것은 눈감아주겠다. 그러니 제발 민족의 장래와 민족의 고통을 판돈으로 걸지는 말아라.

그대들의 입에서 어떤 미사여구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와도, 그대들의 몸가짐이 어떤 기막힌 연기를 해나가더라도 그대들 가슴속에 숨겨져 있는 고약한 심보는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오직 배고픔 때문에 외국인들 앞에서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옷을 훨훨 벗어던졌던 민족의 어린 딸들을 기억해보았느냐? 멀쑥한 양키들 앞에서 과자부스러기를 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했던 민족의 아들들을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느냐? 역사는 변덕스러운 것, 역사가 또다시 미쳐버려 그대들을 벌하지 않는다면, 서글픈 부모가 짓는 한숨이 대지를 뒤집는 회오리바람이 되어 그대들 정치꾼들의 더러운 육체를 세상 밖으로 내던져버릴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여! 이것을 내 작별의 말로 받아들여다오. 나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 그 누구이든 간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외로운 통치자의 서글픈 임종을 기억해다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당신들이 주는 그 어떤 원망과 저주도 저승에서나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먼 훗날, 그곳에서 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한 한반도를 내려다보며 맛볼 수 있는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을 너희들 모두에게 돌려주겠다.

내 딸들아! 착하게만 자란 너희들! 이 험한 세상에 너희들을 내팽개치고 떠나야 하는 이 아비의 비통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 이 몹쓸 아비를 마음껏 꾸짖어다오. 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이 통증이 영원히 지속되는 벌을 받고 싶구나. 내 생명과 세상의 그 어떤 명예와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너희들, 세상의 어느 자식들보다 아버지를 사랑한 너희들, 그런 자식들을 천애의 고아로 만든 이 아비가 너희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못난 아비를 잊어버리고 열심히 꿋꿋하게 살아다오. 그래서 내세 (來世)가 있다면 ― 분명히 있어야 한다 ― 나는 거기서 밀짚모자에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논을 일구고 밭을 갈며 낮을 보내다가, 해가 지면 쇠죽을 쑤고, 밤이면 물레를 돌리는 어머니 옆에서 새끼를 꼬며 너희들이 올 때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 훌륭한 아버지가 되겠다고 너희들에게 약속하마.

아들아! 너의 존재는, 비록 내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내겐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었고 원동력이었다. 너는 항상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의연한 음성으로 나를 움직여왔다. 네가 살아가야 할 조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나는 내 생명을 한줌의 흙으로 바꾸는 데 서슴지 않았고, 너에게 명예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 어떤 혹독한 고통도, 천하가 공노할 그 어떤 잔인함도, 그 어떤 비굴함과 간교함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 내 조그마한 심장이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터져 온몸의 피가 목구멍으로 치받아 올라온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너에게 미안하다고,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달라고, 메마른 대지 위에 쓸 수만 있다면!

가여운 아들아! 그러나 역사가 아무리 변덕스럽고 가혹하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조국의 헐벗은 산을 푸르게 만들었고, 조국의 농촌에서 초가지붕을 몰아냈으며, 조국의 농민들에게서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영원히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언젠가 때가 되면,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나의 야망이, 나의 집념이, 나의 냉정함이 풍요로움의 원천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등장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아들아, 아버지 · 어머니를 흉탄에 빼앗기고 고아가 되어버린 너의 고통도 한 가닥 흐뭇한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쌍한 아들아! 이 말을 내가 너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로 받아들여다오.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비가 용서를 빈다는 말을.

김 장군! 과묵 (寡默)을 방패로 삼고 살아온 내가 너무 혓바닥을 많이 놀린 것 같구나. 혓바닥은 항상 화를 자초하게 마련! 이젠 나를 영수에게로 보내다오. 그래도 시간이 있다면 세월을 거꾸로 돌려 '모래실' 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로 보내다오. 마지막으로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보고 싶구나. 모래실의 초가지붕에서 흘러나오는, 5천 년 동안 계속되는 가난의 한숨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모래실' 의 봄은 항상 마을 뒤쪽 재실 (齋室) 옆 묘지 잔디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사로운 햇볕에 얼었던 땅이 녹으며 폭신해진 잔디밭 위에서 동네 아이들 틈에 끼여 활을 쏘며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둠이 다가와 비지땀을 흘릴 때쯤이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에게 어머니가 차려주는 나물죽 한 사발은 언제나 꿀맛이었다.

'모래실' 의 여름은 모래실의 소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느티나무 밑에 멍석을 깔아놓고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냇가에서 미역을 감느라 텀벙대는 벌거숭이 소년들에게 여름은 어른들의 엄한 감시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모래실' 의 가을은 모래실의 소년들에게 때때옷과 먹을 것을 선물해주었다. 벼이삭으로 뒤덮인 들판 사이를 하나, 둘, 하고 일렬로 걸어다니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미소를 대하면 소년은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모래실' 의 겨울은 얼어붙은 논 위로 쌩하고 썰매를 지치고 싶을 때면 영락없이 찾아와주었다. 그것은 모래실의 소년에게 쇠고깃국과 흰쌀밥을 의미했다. 어느 설날, 쇠고깃국과 흰쌀밥으로 포식한 후 때때옷을 입고 골목에서 제기를 차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아! 모래실의 가난이 그립구나. 그곳에서의 가난은 나를 이토록 외롭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 순간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탄 차는 국군서울지구병원 정문에 도착한다.

"정지!"

경비병이 소리치며 막아선다. 비서실장이 차창을 내린다.

"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빨리 통과시켜라."

비서실장의 고함에 경비병이 경례를 한다.

"충성! ……통과!"

비서실장이 손목시계를 본다. 정확히 7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다.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이 대통령의 가슴을 꿰뚫은 지 14분 만이었다.

 

<끝>

 

 

 

홍상화 작가

 

 

◆ 홍상화 작가는 1940년 대구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거쳐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겸임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장편소설 '피와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해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 장편소설 '정보원' '거품시대'(전 5권) '사람의 멍에' '범섬 앞바다' '디스토피아' '30-50 클럽', 소설집 '내 우울한 젊음의 기억' 등이 있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됐다.

 

 

[출처 : 메트로신문 news@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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