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아시아 민주화운동]
1986년 2월 23일 필리핀 마닐라 근처 데드사 (EDSA)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 / 필리핀대통령박물관
필리핀은 '노란 혁명', 미얀마는 '8888항쟁' <1988년 8월 8일> 으로 민주화 외쳐
'마르코스 독재' 필리핀서 반대 시위
미얀마에선 새로운 黨 만들어 저항
민주화 요구에 中 정부는 무력 진압
지난 4일 (현지 시각) 영국 런던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의 천안문 (天安門) 사건 34주기를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어요.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6월 4일을 잊지 말라' 는 문구가 담긴 손팻말을 들었지요. 매년 홍콩에서 열렸던 집회가 최근 3년 동안 코로나 등 여러 이유로 열리지 않자 올해는 이를 대신해 영국과 미국 등에서 열렸답니다. 그렇다면 천안문 사건과 더불어 1980년대 후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아봐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 신화 연합뉴스
필리핀 '피플 파워 혁명'
식민지에서 벗어난 동남아시아 신생 독립국에선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가 나타났어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탈냉전에 접어들고 시장경제가 확대하면서 권위주의는 더욱 강화됐죠. 그러자 동남아시아 국가 곳곳에서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20여 년 동안 필리핀을 통치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했어요. 마르코스 독재에 저항하던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귀국길에 오른 1983년 마닐라 공항에 도착한 직후 암살됐어요. 그의 죽음을 계기로 필리핀 전역에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어요.1986년 2월 마르코스 대통령이 부정 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자 시민들은 '피플 파워 혁명' 을 일으켰어요. 그동안의 국가 경제 악화와 부정부패, 횡령, 민간인 학살 등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거예요. 이때 시민들이 노란색을 두르고 에드사 (EDSA) 거리로 쏟아져 나와 '에드사 혁명' 혹은 '노란 혁명' 이라고도 불러요.
결국 마르코스가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권좌에서 물러났고, 대신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필리핀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그런데 현재 필리핀 대통령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아들이에요. 그래서 지난 2월 '피플 파워 혁명' 조형물 앞에서는 마르코스 주니어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 고문. / AP 연합뉴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은 현재 진행형
미얀마에서는 1988년 3월 '양곤의 봄' 에 이어, 그해 8월 8일 '8888 항쟁' 이 일어났어요. 권위주의와 경제적 어려움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규모 민주화 항쟁을 시작한 거예요. 당시 수도였던 양곤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가 한 달 넘게 이어졌어요. 3000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 승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당시 미얀마에서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지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아웅산 수지는 고국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민주주의민족동맹 (NLD)' 을 만들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어요. 1990년 NLD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어요. 하지만 아웅산 군사 정권은 부정 선거를 이유로 들어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어요.
이후 민주화 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졌어요.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 NLD를 중심으로 이듬해 첫 문민정부가 탄생했어요. 문민정부는 수십 년 계속된 군사정권의 부정부패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군부가 저지른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던 중 군부가 2020년 총선이 부정 선거였다고 주장하며 202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미얀마 시민들은 지금도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천안문 사건 34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3일 홍콩 코즈웨이베이에서 경찰이 한 시민을 연행하고 있어요. / AP 연합뉴스
중국 '천안문 사건' 과 우리나라 '6월 민주 항쟁'
중국에서는 1989년 6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어요. 중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지식인과 학생, 노동자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이를 천안문 사건이라 불러요.
1970년대 후반부터 중국이 추진한 개혁 · 개방 정책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졌어요. 경제 개방으로 빈부 격차가 커지고 생활고가 심해진 것도 불만을 키웠죠.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단식 투쟁과 시위가 이어졌고, 수많은 시민이 동참했어요. 중국 정부는 이에 강력하게 대응해 전차와 장갑차를 투입하고 최루 가스와 실탄을 사용해 이들을 해산시켰어요. 이 무렵 중국을 방문한 소련 지도자 미하일 구르바초프를 취재하던 각국 언론을 통해 불타는 탱크와 시민에게 실탄을 발사하는 영상이 전 세계로 송출됐어요. 전 세계는 이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죠. 중국은 천안문에서 벌어진 시위를 '반혁명 폭동' 으로 규정하고 학생들과 지식인을 탄압했어요. 서방 세계는 중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어요. 이후 중국은 정치적 민주화보다 경제 성장을 우선시했고, 천안문 사건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실패 사례로 여겨져요.
지난 10일 6 · 10 민주항쟁 36주년을 맞아 서울 중구 서울광장 근처에서 추모제가 열렸어요. / 뉴스1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부터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어요. 1987년 1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분노했죠. 그해 4월 전두환 정권이 4 · 13 호헌 조치로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한다고 발표하자 전국적으로 거센 시위가 잇달았어요.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많은 시민들이 다음 날인 6월 10일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 시위에 나섰어요. 이를 '6월 민주 항쟁' 이라고 해요. 결국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내용의 6 · 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고, 5년 단임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는다는 내용의 개헌이 이뤄졌죠.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거둔 승리였어요.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6 · 10 민주 항쟁 36주년 추모제에서 한 참가자가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들고 있어요. / 뉴시스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6월 21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