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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24

[근대공화국 대한민국 ① 조선시대에 없었던 대한민국 풍경들]

[근대공화국 대한민국 ① 조선시대에 없었던 대한민국 풍경들] 식민 시대인 1926년 경복궁 앞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후 건국을 선포한 중앙청으로 사용됐다. 전쟁으로 파괴됐던 중앙청은 훗날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철거됐다. 그 사이 이 땅에는 봉건 왕조와 식민 시대가 지나고 공화국 시대가 도래했다. 경복궁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시산을 즐긴다. 부국과 강병으로 부활한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 시대다. / 박종인 기자 우리는 조선을 뛰어넘은 근대 대한민국이다 '부국과 강병을 통한 국민의 행복' 새 시대정신 무장한 대한민국 모순 많았던 조선왕조를 극복하고 조선에 없던 근대적 가치 도입해 식민지와 전쟁을 이겨낸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은 어떤 경로를 거쳤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

[식민시대에서 공화국까지 모란공원에 얽힌 땅의 역사]

[식민시대에서 공화국까지 모란공원에 얽힌 땅의 역사]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문안산 북쪽 기슭에는 흥선대원군 묘가 있다. 공식 명칭은 흥원 (興園)이다. 그 옆에는 흥선대원군 장남인 흥친왕 이재면과 그 가족 납골묘, 서장자 이재선 묘가 있다.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이재면의 양손자이자 운현궁 궁주였던 이우가 일본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이곳에 묻혔다. 1966년 이우 아내이자 박영효 손녀 박찬주는 운현궁 소유지인 문안산 주변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이 묘지가 모란공원이다. 부산에 있던 박영효 묘도 이곳 모란공원에 이장돼 있다. 운현궁 후손은 흥원과 가족묘를 경기도에 기증했다. / 박종인 기자 박영효 손녀가 시댁 운현궁 땅에 만든 공동묘지, 모란공원 1966년 조성된..

[근대로 가는 길목 ④ 조선 식민지 정책을 결정한 1894년 8월 17일 일본내각회의]

[근대로 가는 길목 ④ 조선 식민지 정책을 결정한 1894년 8월 17일 일본내각회의]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 (建春門). 1894년 7월 23일 새벽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 혼성여단이 건춘문과 서쪽 영추문 (迎秋門)을 부수고 경복궁을 공격했다.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던 경복궁 수비대는 고종 명에 의해 무장해제하고 퇴각했다. 이틀 뒤 일본이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운명의 8월 17일 일본 내각은 조선 문제 처리를 안건으로 올리고 독립국화, 보호국화, 청일 공동 관리, 중립화 4개 가운데 보호국화를 향후 대조선 정책으로 채택했다. 이에 앞서 고종이 미국에 일본군 철병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 클리블랜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훗날 35년 식민지..

[근대로 가는 길목 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근대로 가는 길목 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충청남도 아산에 김옥균 무덤이 있다. 도로명 주소 또한 김옥균 호를 따서 고균길이다. 1911년 당시 아산군수였던 양자 김영진이 일본에 있던 김옥균 묘에서 머리카락을 가져와 이장한 묘다.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된 뒤 조선으로 끌려온 김옥균 시신은 4월 14일 밤 온몸을 토막내고 칼집을 내는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을 받고 팔도에 뿌려졌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10년째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 김병태는 아들 시신이 추가형을 받은 다음 날 천안군 감옥서에서 처형됐다. 역적이 죽은 뒤 그 시신에 처벌을 가하는 '역률 추시'는 영조 때, 가족을 연좌해 처벌하는 '노륙형'은 정조 때 법으로 금지된 형벌이었다. 법을 무시하고 복수를 완성한 고종은 "10년 동안이나..

[미군 항공사진에 숨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두 가지 비밀]

[미군 항공사진에 숨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두 가지 비밀] 1945년 9월 8일 조선에 진주한 미군은 서울 일대를 항공사진으로 남겼다. 그해 창간된 사진보도 잡지 '국제보도'도 해방 정국을 사진으로 보도했다. 이들 사진에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몇 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우선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사진으로 퍼져 있는 아래 사진 ⑥ 촬영 날짜와 장소는 하루가 지난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아래 삼거리다. 항공사진항공사진 확대 사진 ④ (오른쪽 위)와 해당 사진 ⑤ (오른쪽 아래) 속에 무악재가 보이고 건물 지붕들 (파란동그라미)이 동일하다. 대략적인 장소는 현재 서대문역사공원 삼일운동 기념탑 부근이다. 또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던 사형장 미루나무는 해방 이후 심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

['역사 복원' 상관없이 재건축 중인 조선 궁궐]

['역사 복원' 상관없이 재건축 중인 조선 궁궐] 경복궁 경회루를 동서남북 사방으로 에워쌌던 담장은 식민 시대 때 철거됐다. 애초에 네 담장을 모두 복원하고 전망대를 설치하려던 문화재청은 동쪽과 북쪽 담장만 복원했다. 이유는 '관람객 편의'. 경복궁 동쪽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가 훼손한' 대표적인 건물인데 경복궁관리소로 쓰고 있다. 문화재청이 설정한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는 1888년이다. 완공을 앞두고 있는 덕수궁 돈덕전은 2층이던 건물을 3층으로 증축했다. 3층 용도는 덕수궁관리소 사무실이다. 대한문 앞에는 원래 규모에서 축소된 형태로 월대를 공사 중이다. 축소한 이유는 '보행자 편의'. 문화재청은 문화재 '복원'을 '..

[경부고속도로와 대한민국 ㅡ 달래내 고개 비석 이야기]

[경부고속도로와 대한민국 ㅡ 달래내 고개 비석 이야기]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성남시 달래내 고개 옛길 고갯마루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달래내 구간 공사 때 순직한 육군 1201건설공병단 소속 병장 한기영 순직비다.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져 상공업을 천시했던 조선왕조는 왕조초기 건설했던 대로 (大路)들을 방치했다. 물류 인프라 부재로 상공업은 발전 기회를 상실했다. 대한민국이 성립하면서 한반도에 본격적인 도로 건설 작업이 진행됐고 그 상징이 경부고속도로다. "길은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저절로 닦이게 된다"며 도로 건설을 주장했던 18세기 북학파 박지원의 꿈은 200년이 더 지나 이뤄졌다. / 박종인 기자 "우리의 적은 달래내 고개다, 무조건 길을 뚫어라" ㅡ 1968년 ..

[근대로 가는 길목 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인 사건]

[근대로 가는 길목 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인 사건]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무덤이 있다. 1894년 이래 갑오개혁 정부를 이끌던 김홍집은 을미사변 (1895) 넉 달 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한 1896년 2월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육조거리에 있던 경무청에 구금됐다가 경무청 경무관 안환 (安桓)을 비롯한 고종이 보낸 경무청 순검들에게 살해됐다. 시신은 함께 살해된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시신과 함께 새끼줄에 묶여 종로거리를 끌려다니다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돌팔매질을 당했다. 거리에 방치됐던 시신들은 "외국인 눈에 민망하다"는 신하들 조언에 따라 고종이 가족에게 인수시키라 명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유해는 그래서 지금 대자..

[근대로 가는 길목 ② 갑신정변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근대로 가는 길목 ② 갑신정변 홍영식의 야만적인 죽음] 경기도 여주 문장마을에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홍영식 무덤이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민비와 고종 부부 측근인 무당 진령군의 북묘 (北廟)로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살해됐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따르면, 홍영식은 살해된 뒤 다시 한번 토막이 나고, 가족이 수습한 그 시신 또한 한 번 더 참시됐다. 근대를 지향했던 한 지식인에게 닥친 가장 전근대적인 죽음이었다. / 박종인 기자 근대를 꿈꾸다 두 번 죽은 홍영식, 그가 여주에 잠들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 홍영식 북촌 노론 명문가 출신 개화파 박규수에게 '근대' 배워 1881년 수신사..

[교과서에는 감춰져 있는 고종의 反근대적 친일 행각]

[교과서에는 감춰져 있는 고종의 反근대적 친일 행각]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돼 있는 동학 관련 공문서들. 맨 왼쪽은 주한일본공사관에서 보관 중이던 '일본군 철군에 반대한다'는 고종의 문서. 가운데와 오른쪽은 조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이 '동학 민란 토벌에 일본군이 필요하다'고 적은 편지. ① 옆 나라 군사로 요상한 기운을 일소하고 새 정치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중도에서 철수한다면 [若中途調回] 망할 위험이 곧 다가오게 될 터이니 [危亡立至]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② 10만 일본 육군이 개선하는 날 [陸兵十萬凱旋之日] 도적 떼도 두려워 흩어지리라 [匪徒亦當望風消散] ③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공사가 신중하여 많이 파병하지 않았다. 일청전쟁이 한창이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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