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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51

[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⑬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포사격 훈련 보는 이승만 · 아이젠하워 · 백선엽 1952년 12월 4일 경기 광릉 수도사단에서 아이젠하워 (앞줄 왼쪽에서 둘째) 당시 미 대통령 당선자가 망원경으로 기갑부대의 기동, 포 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모습. 앞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오른쪽 끝에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서 있다. 1953년 7월 12일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했고, 미국은 휴전이 성립된 뒤 빠른 시일 안에 한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 조선일보 DB '조국 수호' 밀서 들고 美 찾은 지 50년만에··· 한미방위조약 맺었다 이승만 끌어내리려 했던 美 李가 반공포로들 전격 석방하자 美, 비밀리에 李 내치려 했지만 한국민 반발 우려해 대화 ..

[⑫ 6 · 25 반공 포로 석방]

[⑫ 6 · 25 반공 포로 석방] 풀려난 반공 포로들, 이승만 초상화 들고 행진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태극기와 이승만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승만은 6 · 25전쟁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7000여 명을 석방했다. 반공 포로들이 고국에서 추방되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위험에서 구한 것이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美 반대에도 반공포로 석방··· 납북될뻔한 남한 청년 2만명 구했다 휴전 회담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北에 갈제징집 당한 남한 장정들 수용소서 친공포로들 박해 시달려 매일 인민재판 받고 처형까지··· 유엔군은 회담 의식해 대응 안해 美 주도 휴전 반대하며 '석방 작전' 수용소 철조망 끊고 포로들 구출 美 등 전세..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아이젠하워 만나 태극기 선물 6 · 25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당선인 아이젠하워가 미군 부대 시찰 도중 이승만에게 태극기를 선물받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휴전에 반대하자 미국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막는 방식으로 축출하려고 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적이 다시 힘 키울 기회를 줄 순 없소"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미국의 휴전 협상에 적극 비판 "언젠가 중국이 다시 침입한다면 누가 함께 싸워준다는 보방 없다" 국군 내부선 모반 움직임 참모총장 이종찬 등 日軍 출신들 미국에 은밀히 군사 반란..

[⑨ 6 · 25 반격과 북진]

[⑨ 6 · 25 반격과 북진] 38선 돌파하는 국군 ㅡ 6 · 25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 라는 문구를 말뚝에 쓰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가 38선 돌파를 망설이자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에게 '38선 돌파에 관한 지령' 을 내린 바 있다. 정 총장은 김 군단장과 함께 9월 30일 3사단 23연대를 찾아 북진 명령을 내렸다. / 조선일보 DB 맥아더가 망설이자, 이승만은 국군의 38선 돌파를 결심했다 미국 방어선에서 한국 · 대만 제외 애치슨 라인은 "침공하라" 초대장 한달 후 매카시 "공산주의자 침투" 미국 내 공산주의 득세 논쟁 가열 트루먼 정권 6 · 25 개입 이끌어 내 맥아더, 인천 상륙 후 북진 유보..

[⑦ 건국 과정의 완결]

[⑦ 건국 과정의 완결]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이승만과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승만은 선포식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 고 했다. / 조선일보DB 득표율 90%로 대통령 당선··· 취임식 끝나자마자 집무 시작했다 위기 속에 탄생한 대한민국 경제 빈약하고 치안마저 불안 행정 경험 있어도 친일파 몰려 국가 운영할 인적 자원도 부족 제대로 된 軍 없는데 미군 철수 신생국가 안착시킨 국정 운영 유엔 "한반도 유일 합법국가" 정적 조봉암을 발탁해 농지개혁 건국 마지막 시험대 2대 총선도 공정하게 치르며 '자유민주' 확립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⑥ 대한민국 헌법 제정]

[⑥ 대한민국 헌법 제정]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취임 1948년 7월 24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연단에 선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며,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 이라고 선서했다. 당시 거의 모든 의원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의원 대부분 내각제 지지했지만, 혼자 힘으로 대통령제 이끌다 내각제로는 혼란 수습 힘들다 판단 입헌군주제서 연유한 내각책임제 군주 없는 국가선 제 기능 힘들어 "내각제 땐 어떤 지위도 안맡겠다" 한민당 압박, 대통령제 관철시켜 이승만 하야 ..

[인하대 있던 동상, 훼손된 채 방치]

[인하대 있던 동상, 훼손된 채 방치] 1979년 2월 인하대 인경호 (湖) 인근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제막식에 우산을 쓴 시민들이 모여 있는 모습. 해당 동상은 건립된 지 5년 만인 1984년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 인하대 총동문회 제공 운동권이 철거한 이승만 동상, 40년째 창고에 이승만 "美 MIT 같은 대학 만들자" 하와이 학교 매각금에 성금 더해 인천 · 하와이 글자 따 인하대 설립 1984년 총학생회, 밧줄로 끌어내려 상자 넣어진 채 자재 창고에 보관 동창회 일각서 '재건립' 의견 나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된 인천 인하대학교에는 1979년 이 전 대통령 동상이 세워졌다. 이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었다. 하지만 1984년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철..

이승만 2023.12.03

[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제헌의회 개원… 이승만 "투표율 90% 넘는 건, 세계에 민족의 애국심 보여준 것"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개원식에는 5 · 1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98명 (정원 200)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개원식에 앞선 예비 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소련은 남로당을 앞세워 5 · 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선거는 95.5%의 투표율로 마무리됐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투표율이 90%를 넘은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피의 세례' 에도 투표율 95.5%··· 제헌의회 선거의 기적 이끌다 소련, 남로당 앞세워 전국..

[④ 한반도 문제, 유엔에 회부]

[④ 한반도 문제, 유엔에 회부] 한국 문제를 UN에서 다루도록 제안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이승만이 중국 난징에 들러 장제스와 회담한 후 19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프란체스카. 한국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UN으로 이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이승만의 중요한 성취였다. 이를 통해 두 강대국 간 협상이 아니라 UN의 주관 아래 자유민주국가 수립이 가능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소련 지시로 남한서 폭동··· 자유민주 정부 수립 위해 유엔 설득하다 소련, 北에 위성국가 세우고 사회 혼란 유도해 남한 장악 야욕 이승만 "통일 고대하나 여의치 않아, 남방 임시정부 조직하자" 시민 모금으로 방미··· 미국에 '유엔 주재 정부수..

[③ 얄타 회담 비밀협약 폭로]

[③ 얄타 회담 비밀협약 폭로] 얄타 회담 참석한 미·영·소 정상 - 1945년 2월 얄타 회담을 위해 모인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 앉은 사람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 이승만은 같은 해 국제연합(UN) 창립총회가 열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얄타 회담 때 '조선을 소련 영향권 안에 둔다'는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 미 정부 문서보관소 한반도 운명 바꾸려… 루스벨트 · 처칠 · 스탈린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다 정치는 돈이다. 정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독립운동은 순수한 정치 활동이지만, 망명정부 지도자는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짓누른 짐이었다.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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