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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4

[영수 회담]

[영수 회담]    ▲ 1975년 5월 2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회담을 했어요. / 김영삼민주센터    정부 수립 이후 26차례 열려··· 김대중 정부 때 8회로 최다   '영수' 는 '우두머리' 를 뜻해요이승만, 좌익 박헌영과 마주 앉아정조는 반대파 심환지와 소통했죠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양자 회담을 가졌어요.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 회담은 현 정부 들어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선 이런 식의 양자 회담을 '영수 (領袖) 회담' 이라고 불러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영수' 의 영 (領)은 '옷깃', 수 (袖)는 '소매' 라는 뜻이에요. 옛날 옷에서 옷깃과 소매가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라는 이유로 '영수' 란 말에는 '..

[김일성과 박헌영 서열 바꾼 스탈린의 모스크바 면접]

[김일성과 박헌영 서열 바꾼 스탈린의 모스크바 면접]     일러스트 = 한상엽    조선공산당 1인자 박헌영은 왜'수령' 이 되지 못했나   스탈린이 호통쳤다"인민은 땅을 파고결정은 우리가 하는 것" 朴, 가정 파탄나도공산당에 몸 바쳤지만소련군 출신 金에 밀려    1900년생 박헌영은 1912년생 김일성보다 열두 살 위였다. 해방 이전 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세 차례에 걸쳐 10년 가까이 복역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을 때는 법정과 구치소에서 광인처럼 날뛰었고,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 “대변을 보고는 손에 쥐어 벽에 바르고 간수가 밥을 갖다주면 밥은 그대로 두고 변을···” (박갑동, ‘박헌영’)이라는 일화는 당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어서는 만삭 아내..

[반탁학생대회와 학병동맹사건 목숨 건 '전쟁' 의 시작]

[반탁학생대회와 학병동맹사건 목숨 건 '전쟁' 의 시작] 일러스트 = 한상엽 "신탁통치 반대" 학생 시위에 좌익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남북 좌익, 찬탁으로 돌변 박헌영 "소련 편입 희말" 우익은 반탁학생연맹 짜 "反민족 공산당 타도" 인민당 시설 습격하자 총 · 폭탄으로 피의 복수 1945년 세모 (歲暮), 한국인의 관심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 영 · 소 외상 (外相) 회의에 쏠렸다. 성급한 언론들은 협정 발표 전에 외신을 인용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12월 28일 (한국 시각) 모스크바에서 공포한 ‘조선 문제에 대한 3상 협정’ 의 주요 내용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미 · 영 · 중 · 소 4국 주도로 5년간..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이 회의장 바깥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초기 북한 정권을 이끌었던 두 사람은 6·25전쟁을 일으킨 뒤 국군과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반목과 갈등에 휩싸였다. 박헌영은 휴전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중앙포토] 이상하다면 이상한 인연이다. 나와 김일성, 그리고 한때 그 밑에서 북한의 2인자로 행세하던 박헌영과의 관계 말이다. 나는 김일성을 일찍 만났다. 1945년 광복 뒤였다. 나는 그때 스물다섯의 나이, 김은 나보다 여덟 살 위인 서른셋의 나이였다. 나는 당시 해방 정국의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였다.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 그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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