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서울 거쳐 평양으로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드무2 2021. 6. 2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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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이 회의장 바깥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초기 북한 정권을 이끌었던 두 사람은 6·25전쟁을 일으킨 뒤 국군과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반목과 갈등에 휩싸였다. 박헌영은 휴전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중앙포토]

 

 

 

이상하다면 이상한 인연이다. 나와 김일성, 그리고 한때 그 밑에서 북한의 2인자로 행세하던 박헌영과의 관계 말이다. 나는 김일성을 일찍 만났다. 1945년 광복 뒤였다. 나는 그때 스물다섯의 나이, 김은 나보다 여덟 살 위인 서른셋의 나이였다. 나는 당시 해방 정국의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였다.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 그는 두어 차례 찾아왔다.


술 마신 김일성은 급기야 박헌영에게 잉크병을 던지며 …

 

 

번듯한 외모에 노련한 화술을 구사했고, 수완이 좋아 보였다. 당시 그의 뒤로는 소련 고문단이 버티고 있었으며, 김일성이 북한 정국을 주도하는 실력은 대개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는 그가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연설을 했던 평양 공설운동장 현장에도 가봤다. 그리고 나는 그해 12월 월남했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으로서 그의 군대와 총구를 마주하게 됐다.



그 뒤 나는 다부동에서 김일성이 총력을 기울여 대한민국 군대를 공략하고자 보냈던 선봉을 꺾고 이제 북진해 평양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박헌영은 남한 내의 공산당 조직이었던 남로당을 세우고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와 대면(對面)한 인연은 없었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심고자 했던 남한 내의 공산당 조직을 두고 보면 나와의 인연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1948년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統衛部)의 정보국장으로 숙군(肅軍) 작업을 책임졌다. 당시 정보국이 주도해 진행한 숙군작업으로 대한민국 군대 내부에 남아 있던 좌익 조직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4000여 명의 군인이 남로당과의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것으로 조사돼 일부는 처형되고 대부분은 옷을 벗었다.



그때 펼쳐졌던 그 작업. 1950년 10월 말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관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김일성은 6·25 전쟁을 낙관하고 있었다. 단기간에 대구와 부산까지 치고 내려간다면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근거는 박헌영이 제공했다. 전쟁 전 월북해 북한 수뇌부에 올랐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이 터지면 남한 내의 군 조직과 사회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예견했던 것은 국군과 노동계를 비롯한 남한 사회에 깊이 심어 놓은 남로당 조직의 봉기였다. 북한군을 맞아들이고, 남한 각 사회 부문에서는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그런 봉기였다. 그런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초반에는 그들의 꿈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몽상에 불과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남한 내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조짐조차 찾기 힘들었다. 국군은 장비와 인원, 그리고 무기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남침에 처절하게 맞섰다. 그들이 바라 마지않았던 노동계의 봉기도 없었고, 일반 사회의 소요도 없었다.



그 때문에 둘은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이 시작되면서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됐다고 한다. 전쟁을 수행 중이었던 나는 그 둘 사이의 심각한 갈등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자세히 연구해 놓은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성과물을 보면 내가 청천강을 넘어서는 시점에 둘의 사이는 험악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번졌다.



박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내가 평양에 입성할 때인 1950년 10월 19일 김일성은 덕천의 철도 터널에 들어가 있었다. 미군의 공중폭격을 피해 기차를 타고 터널 안에 들어가 있던 것이다. 21일에는 그의 정부를 이끌고 동창이란 광산 지역에 도착했고, 그날 중공군을 이끌고 참전한 펑더화이(彭德懷)와 회담했다.



뒤에 평북의 대유동으로 옮겨 갔던 김일성은 깊이 30m에 경사가 33도에 이르는 지하갱도를 나무사다리로 오르내리며 작전을 지휘했다. 마지막으로 머물면서 조바심을 키웠던 곳은 고산진이다. 만포진이 그 옆이고, 압록강을 건너면 고구려의 왕도가 있던 집안이다. 그곳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심하게 다퉜다.



김일성의 참모들이 밝힌 당시의 정황은 이렇다. 술을 마신 김일성은 박헌영을 나무랐다. “당신이 말한 그 빨치산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는가”라는 호통이었다. 그러자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병력을 왜 하나도 안 두었는가?… 그러니 후퇴할 때 다 독 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라면서 “그러니 다 내 책임은 아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일성이 “야, 이 자식아. 이 자식아, 무슨 말인가?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너 무슨 정세판단을 그렇게 했는가”라며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던졌다는 것이다. 11월 7일 만포진으로 옮겨가 있던 주북한 소련 대사관에서의 일이었다. 우리가 평북 운산에서 후퇴를 하고 청천강 근처에서 새로 맞은 적, 중공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시점이다. 북한 지도부는 중공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내분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들 휘하에 남아 있던 병력의 대부분도 한반도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만주 지역으로 넘어가 재편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국군과 연합군이 평양 입성 뒤 벌인 전쟁의 대상은 북한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도부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을 대신한 적군은 그 즈음에 나타났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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