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뉴스 속의 한국사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드무2 2023. 12. 9.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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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새마을운동]

 

 

 

 1973년 11월 22일 광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박정희 (오른쪽) 대통령이 새마을 유공자에게 훈장을 달아주고 있어요. / 조선일보 DB

 

 

 

3만 3267곳 마을에 시멘트 공급··· '1000년 초가' 농촌 탈바꿈

 

 

 

꽃마을 · 개간촌 · 낚시대 마을···

정부, 우수 마을 선정해 전기 설치

3 ~ 4년 사이 농촌 경관 확 바꿨어요

 

 

 

최근 농촌으로 귀농하면 빈집이나 노후 주택을 개량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주는 지방자치단체가 많습니다. 덕분에 농촌 풍경이 다채로워지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가나 농촌은 어느 지역을 가도 모습이 비슷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벼락, 마을 회관 등 전국 어느 마을이나 경관이 거의 똑같았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농촌 자립의 전초지' 잇따라 소개

우리나라 농촌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초가지붕이 70% 이상이었어요. 길이 좁아 우마차 (牛馬車 · 소나 말이 끄는 수레)도 잘 다니지 못했죠. 그런데 일부 마을에선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기와나 함석, 슬레이트 등으로 개량하고, 마을 길을 넓혀 우마차와 차량이 다닐 수 있게 했어요. 마을 주민이 단합해 식량을 증산하고 축산, 과수 재배 등을 통해 소득 증대에 힘쓰기도 했죠. 농한기에는 가마니 짜기와 개간 사업 등을 벌였어요. 심지어는 '도박 추방' '술집 없는 마을' 등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죠.

1960년대 변화하는 마을의 모습이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1월 한 일간지는 '보람에 산다' 라는 제목으로 발전하는 마을 모습을 7회에 걸쳐 소개했어요. 기사에는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는 마을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전국 꽃의 70% 정도를 생산하는 마산 꽃마을, 개간한 산지에 과일과 가축을 키워 소득을 증대한 익산 개간촌, 화전민들이 황무지 150정보 (町步)를 개척한 철원 화전민 새 동네, 가정에서 만든 낚싯대로 일본산 제품을 대체하고 수출까지 하는 용인 낚싯대 마을, 갯벌을 막아 염전과 백합 양식장을 만든 오식도 섬마을, 온 동네가 닭을 길러 생산한 달걀을 미군에 대량 납품하는 순천 양계마을 등이 소개됐어요.

당시 중앙 부처였던 내무부 (현재 행정안전부)는 전국 21개 마을을 선정하고, 각 마을 발전 사례를 수집해 잡지 '지방행정' (1968년 2월호)에 소개했어요. 특집 기사 제목은 '농촌 자립의 전초지를 찾아' 였어요. 21개 마을에서 하는 지붕 개량과 마을 길 넓히기, 황무지 개간, 간척 사업, 원예 농업을 통한 소득 증대, 농가 부업 등을 소개했어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확산

이처럼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변화하는 마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경북 청도 신도마을과 1971년 경북 영일 문성마을을 방문했는데, 이후 이른바 '새마을 가꾸기 사업' 이 전국 모든 마을에서 들불처럼 번져갔어요.

신도마을은 1950년대 후반 이후 사과를 재배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마을이 됐습니다. 소득 수준이 향상되자 마을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마을 안길 정비, 지붕 개량, 담장 보수, 소하천 정비 등 사업을 벌였어요. 1967년에는 통일호 열차가 하루 2차례씩 정차하는 간이역 (신거역)이 개통했고, 1968년에는 전기와 전화를 설치했죠. 이후 청와대와 내무부 직원, 지방 공무원이 방문해 마을을 시찰했어요. 1970년 초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직접 방문해 마을의 모습을 돌아봤어요. 박정희 대통령과 공무원은 전국 농촌 마을을 신도마을처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죠.

정부는 1970년 10월부터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무상으로 336포대씩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주민은 공급받은 시멘트로 마을 길 넓히기, 작은 교량 건설, 지붕 개량, 작은 하천의 둑 개조, 공동 빨래터 만들기 등 20여 개 사업을 자체적으로 추진했어요. 전국적으로 기대 이상 큰 성과를 거뒀고, 이러한 마을 중 경북 영일 문성마을이 가장 잘 알려졌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9월 전국 시장과 군수들을 문성마을에 모이도록 했어요. 마을을 둘러보게 한 후 "전국 시장과 군수는 모든 마을을 문성동과 같이 만들라" 고 지시합니다. 이후 1971년 겨울부터 전국 시장과 군수, 내무부 소속 지방 공무원이 총동원돼 대대적으로 마을 개발에 나섰어요. 이 시기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새마을운동' 이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했어요.

 

 

소득 증대 등 추가해 '새마을운동' 으로

새마을운동은 기존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소득 증대 사업과 정신 계발 사업을 추가한 3대 부문으로 진행됐습니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환경 개선 10대 사업' 이라는 용어로 통일됐어요.

1972년 추진된 환경 개선 10대 사업에서는 마을 단위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새마을지도자를 선발해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을 기초 · 자조 · 자립 3단계로 나누고, 우수 마을에는 시멘트와 철근을 더 많이 공급해줬어요. 우수 마을에는 전기도 먼저 가설해 주고, 신문과 방송사까지 나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어요. 그러자 환경 개선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마을도 우수 마을을 따라가기 시작했죠.

1970년대에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멘트, 슬레이트, 철근 등이 대량생산됐어요. 전국 모든 마을에 환경 개선에 필요한 자재가 잘 공급된 점도 이 사업이 성공한 주요 배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73년 겨울에는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마을을 선정하고, 7대 일간지 1면 등에 컬러사진과 기사를 게재했어요. 당시 컬러사진에는 마을 입구의 넓은 길, 경지가 정리된 농경지, 지붕 개량이 끝난 마을의 농가, 뒷산의 푸른 나무, 열심히 일하는 농민의 모습 등이 나타나 있어요. 농촌 마을의 경관이 1000년 이상 큰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불과 3 ~ 4년 사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됐답니다.

 

 

 

 1973년 11월 2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새마을 특집 화보. 당시 신문에 이런 컬러사진은 매우 드물었어요. 화보 속 농촌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발전한 모습입니다.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974년 12월 1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 전면 광고.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974년 12월 1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새마을 지도자 대회 모습. / 조선일보 DB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9월 1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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