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드무2 2021. 6. 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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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북한 공군기가 1950년 6월 28일 김포공항에 계류해 있던 미 공군 수송기를 폭격해 화염이 일고 있다. 국군은 한강 남쪽 시흥 지역에서 지연작전을 펼쳤다. [백선엽 장군 제공]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전쟁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부대가 도시에 오래 머물면 전투력을 상실하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도시는 평안함의 유혹을 풍기는 곳이다. 향락도 그 안에 숨어 있어 장병의 마음을 잡아끈다.



북한군 서울서 사흘 지체 … 김일성 “뼈아픈 패착” 훗날 토로

 

 

평안함에 묻혀 안일(安逸)함을 생각하다 보면 병사들은 탈선하기 쉽다. 전선의 살벌함과 피곤함이 싫어지면서 전투력이 크게 깎인다.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이 그랬다. 그들은 서울에서 사흘이라는 시간을 지체했다. 6월 25일 아침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던 그 기세가 크게 꺾인 것은 물론이다. 그 이유는 지금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단지 추측으로는 병사를 잡아먹는 도시병(都市病)에 걸려 버린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은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렀던 사흘을 반성하는 발언을 했다. 일종의 자아비판(自我批判)이었다. 북한군의 서울 체류 사흘은 그만큼 그들에게는 뼈아픈 전략적 패착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판단 실수도 있었지만, 아군 입장에서 보면 6·25 전쟁 중 지연전의 개념을 확실하게 세운 기간이었다. 그 주인공은 김홍일 소장이었다. 그는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인 국부군(國府軍)에서 활동했던 분이다. 김 장군은 국부군에서 별을 두 개까지 달았다. 외국인으로서 그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은 드물다. 그만큼 전쟁 국면을 크게 아우르는 능력을 갖춘 분이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김홍일 장군.

 

 

 

김 장군은 평북 용안포 출신이다. 일제 시기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오산중학교를 마친 뒤 중국 구이저우(貴州)의 군사학교 격인 강무당(講武堂)에서 수학했다. 국부군 소장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아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북지역 한국교민사무처 처장까지 지냈다. 조만식 선생은 생전에 가끔 “중국 군대에 왕일서라는 유명한 조선 장수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김홍일 장군이었다. 김 장군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왕일서(王逸曙)’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덕망과 리더십이 빼어나 따르는 군대 후배들이 많았다.



김 장군은 6·25 개전 초기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았다. 남쪽으로 내려간 육군본부를 대신해 적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시흥과 영등포 지역의 일선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했다. 도시병에 걸려 주춤하고 있는 북한군과 영등포 쪽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붙은 것이다.



김 장군은 중국에서 국부군으로 활동할 때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과 싸운 경험이 풍부했다. 그때는 일본군이 우세한 전력으로 중국 군대를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국부군은 그에 밀려 후퇴하면서도 시간을 끄는 지연전(遲延戰)을 벌였다. 시흥지구 사령관을 맡은 김 장군은 그때의 경험을 발휘했다. 적에게 밀려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는 병력을 수습하고 이를 재편성해서 전선에 내보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 1사단도 그중 한 갈래였다. 의정부와 동두천에서 밀린 병력,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임진강 북쪽에서 철수한 1사단이 그의 수습 능력에 힘입어 다시 전열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로써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벌어진 6·25 전쟁은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김홍일 장군의 지휘 아래 재편성된 각 부대는 일선으로 다시 나갔다. 그 때문에 시흥 지역에서 적은 5~6일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 정부와 군이 부산과 낙동강 등 후방에서 전선으로 내보낼 병력과 무기를 확보하는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 중요한 계기였다. 이른바 ‘지연전 수행’에 관한 틀을 세운 전역(戰役)이었던 셈이다.



김홍일 장군은 한강선 방어에 이은 지연전 상황에서 수도사단과 3사단, 8사단으로 신설된 국군 1군단장 임무를 맡았다. 우리 1사단도 조치원에서 1군단 휘하로 들어가 한동안 김 장군의 지휘를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6·25 개전 초기 서울이 함락된 상황에서 그가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아 한강선을 방어하고, 이어 1군단을 지휘해 7월 중순까지 지연전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 장군은 나중에 부산 동래의 육군종합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됐다. 여기서 그는 전쟁 기간 중 각급 부대에서 훌륭하게 전투를 치러낸 갑종 장교들을 대거 배출했다. 국군 장교단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김 장군은 51년 3월 전역한 뒤 당시 ‘중화민국’으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주요 수교국이었던 대만의 대사로 나갔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전쟁사 돋보기] 갑종장교

 

 

 

1948년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은 부대가 늘어나고 장교 수요가 많아지자 50년 갑종장교제도를 만들었다. 을종은 부사관 양성 제도다. 50년 1월 27일 갑종 1기생 465명이 경기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4월 21일에는 2기생 150명이 들어왔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후보생 신분으로 문산과 김포반도 전투에 투입됐다. 여기서 67명이 전사했다.


갑종장교단중앙회에 따르면 갑종장교는 6·25전쟁 중 1~49기 1만550명이 참전했다. 참전 국군장교 3만3000여 명의 31.8%에 해당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군 장교의 65.7%가 갑종장교였다.


68년 단기사관학교가 설립돼 갑종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4만5424명의 갑종장교가 배출됐다. 이 가운데 999명이 전사했다. 그러면서 3명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를 포함해 5318명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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