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임진강을 건너온 적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㊵ 참전한 미군부대를 만나다

드무2 2021. 6. 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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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㊵ 참전한 미군부대를 만나다

 

 

 

경기도 시흥에서 병력을 수습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때에 육본으로부터 명령이 왔다. 경기도 용인의 풍덕천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었다. 1950년 7월에 들어서면서 적의 공세가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한강 방어선을 뚫은 적이 수원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서남쪽으로 내려오던 상황이었다. 육본은 내게 풍덕천 방향으로 진출해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뒤 처음 받는 명령이었다.



“그런 적쯤은 … ” 장담하던 미 선발대, 하루 만에 허겁지겁 …

 

 

많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당시 1사단 병력은 3000명이 채 안 됐다. 사단이 아니라 연대 규모의 병력이었다. 지금은 골프장 ‘수원CC’가 들어서 있는 풍덕천 골짜기에 병력을 우선 배치했다. V자(字) 형으로 가운데를 비우고 양쪽으로 길게 병력을 늘여 골짜기에 포진하게 했다.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의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타격으로 큰 성과를 거두는 데는 매복이 최고다.



북한군은 그 매복에 걸려들었다. 선두가 나타나고, 이어 중간 대열이 다소 긴 풍덕천 골짜기로 들어올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리게 했다. 후미 대열이 골짜기에 완전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사격 명령을 내렸다. 적들은 반격할 틈이 없었다. 총도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한 채 우리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결코 큰 승리는 아니었다. 부대 규모도 대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강에서 당했던 적들을 직접 쓰러뜨렸다는 점에서 통쾌했다. 일종의 복수였던 셈이다.



그 직전에 사관학교 생도 100여 명이 사단에 배속됐었다. 이들은 “개전 뒤 광릉 근처에서 적에 항거하다가 광나루를 넘어 후퇴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들을 일선 방어에 투입했으나 육본은 “한 사람의 장교라도 더 길러야 하는 상황이니 이들을 대전으로 보내라”고 전해 왔다. 간신히 이들에게 대전으로 내려가라고 설득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 있는 곳을 죽을 장소로 삼고 끝까지 싸우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들 가운데는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황영시 생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못내 아쉬워하면서 전장을 떠나 후방으로 이동하는 생도들의 모습은 늠름했다. 결전의 의지가 충만한 젊은 생도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또 다른 희망이었다.



1사단이 우선 갈 곳은 조치원이었다. 그쪽으로 행군했다. 오산 북쪽 어디선가 미군 대열과 만났다. 참전한 미군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6월 29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과감하게 영등포 전선에 직접 와 전황(戰況)을 살피고 갔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전격적인 결정에 의해 급히 파견된 군대였다. 나는 직접 한국전에 뛰어든 미군을 보면서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105㎜ 포를 끌고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미군 대열 중에 한 일등상사가 눈에 띄어 말을 건넸다. 그는 나에게 “북한 군대가 어떻더냐”며 적의 전력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나는 “전차를 앞세우고 있는 강한 부대”라고 강조했다. 그 일등상사는 “나는 포병 경력이 10년 이상이다. 그런 적쯤은 걱정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들은 6·25 발발 뒤 도쿄 유엔사령부의 지휘로 일본 규슈(九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미 24사단의 ‘스미스부대’였다. 부대장 스미스의 이름을 딴 대대급 병력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평택에 도착했던 이튿날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허겁지겁 적에게 쫓겨 온 모습이었다. 북한군에 당한 것이다. 북한군은 수적 우세에 무기 체계 또한 미군에 쉽게 밀릴 정도로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6·25 전쟁 초기에 한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처음 살포됐던 삐라의 뒷면. 미군의 첫 제트 전투기인 P-80/F-80의 사진과 함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사령부에서 내보내는 라디오의 주파수와 방송 시간 정보를 담았다. 앞면에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지원 소식을 전하면서 맥아더와 주요 지휘관들의 사진을 실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당시에는 전체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단이 별로 없었다. 육본은 당시 무너진 사단을 재편하고 있었다. 나는 1사단과 5사단을 함께 지휘하도록 명령받았다. 김백일(51년 1군단장 재임 시 비행기 사고로 사망) 당시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전쟁 직전 내가 통솔한 경험이 있는 5사단을 이끌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부대는 계속 남하했다. 조치원 북쪽에서 신설 1군단장으로 1사단을 지휘하게 된 김홍일 장군을 다시 만났다. 김 장군은 “대전에서 오는 길인데 미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을 만났다”며 “평택과 안성에 1개 대대씩을 배치했는데 솔직히 걱정이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경부선을 축으로 서쪽은 미군, 동쪽은 국군이 방어하도록 계획을 짰다는 말도 들었다. 1사단은 동북쪽인 충북 음성 방향으로 진출해 적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딘 소장이 이끄는 미 24사단은 금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남쪽 대전까지 방어선을 펼치면서 적의 남하를 저지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루 만에 쫓겨 온 스미스 부대의 상황을 감안하면 24사단의 방어선이 제대로 유지될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미군 선발대의 참전은 어떤 효과를 불러들였을까.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㊵ 참전한 미군부대를 만나다

 

 

 

[전쟁사 돋보기] 스미스 부대

 

 

 

스미스 부대의 오산 전투 모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 승인을 받은 미국이 6·25 전쟁 발발 뒤 처음으로 한반도에 파견한 대대급 미 지상군 부대다. 부대장인 찰스 스미스 중령에게서 이름을 땄다. 미 보병 24사단 21연대 1대대의 병력 406명과 52포병대대 A중대의 병력 134명으로 이뤄졌다.


미 참전 알리려 서둘러 전투
540여 명으로 5000여 명 상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출동 명령을 받고 1950년 6월 30일 항공기 편으로 선발대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미군이 본격 투입되기 전에 참전 사실을 적에 알려 충격을 줌으로써 시간을 끌 목적으로 급하게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해 7월 5일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벌어진 ‘오산 전투’에서 20명이 전사하고 130명이 부상했으며 36명이 포로가 됐다. 상대는 105탱크사단 107연대를 중심으로 한 5000여 명의 북한군이었다. 이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으로 기록된다.



스미스 부대는 6문의 105mm 곡사포, 6문의 2.36인치 바주카포, 2문의 75mm 무반동총, 2문의 4.2인치 박격포, 4문의 60mm박격포만 보유해 화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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