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김두얼 명지대 교수가 말하는 '한강의 기적' 의 진짜 출발점]

드무2 2024. 8. 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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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얼 명지대 교수가 말하는 '한강의 기적' 의 진짜 출발점]

 

 

 

5일 오전 서울 명지대 연구실에서 김두얼 교수가 한국의 근대적 경제성장이 1950년대에 시작됐다고 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태경기자

 

 

 

"한국의 근대적 경제 성장은 이미 이승만 정부 때 시작됐다"

 

 

 

"산업화로 지속 성장 현상 나타나"

李 정부 후반 연평균 성장률 5.3%

원조를 성장 토대 만든 드문 사례

수출 진흥도 1950년대 시작됐다

 

경제 3% 커져도 근대 성장 평가

'1960년대 성장 시작' 정설에 도전

 

 

 

이승만 대통령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이 100만 관객을 넘으면서, 이승만 정부 때를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국사 교과서엔 해방 이후 한국 경제를 ‘남북 분단과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됐다’ 고 서술하고 있다. 경제학계에선 한국의 경제 성장은 1961년 5 · 16 군사 정변 이후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수출 주도 경제 정책을 펼치면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 (定說)이다. 하지만 이런 정설과 달리 근대적 경제 성장의 시점을 이승만 정부 때인 1950년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사학자가 있다. 경제 이론과 통계 분석에 기반해 역사를 분석하는 수량 경제사학자인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난 5일 만나 그 근거를 들어봤다.

 

 

 

5일 오전 서울 명지대 연구실에서 김두얼 교수가 한국의 성장률 추이와 근대적 경제 성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태경기자

 

 

 

경제 성장의 시점이 왜 중요한가.

 

“1만 년이 넘는 인류 역사에서 지난 200년 동안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나타났다. 전근대 사회에선 어떤 땐 소득이 좀 느는 것 같다가도 다시 내려가고 해서 낮은 소득 수준이 크게 변하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그런데 근대 사회에선 1인당 GDP (국내총생산)나 소득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상태가 나타났고, 이를 근대적 경제 성장이라 부른다. 이는 산업화와 결합돼 나타난다. 한국에서도 근대적 경제 성장의 시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1950년대를 ‘침체기’가 아닌 ‘성장기’라고 주장하는데,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으로 경제 성장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폈고, 그 때문에 과거 침체기에서 벗어났다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물론 1960년대부터 성장률이 10% 가까운 고도 성장이 시작된 건 맞다. 그렇다고 근대적 경제 성장이 1960년대에 시작됐느냐는 다른 얘기다. 1954 ~ 1960년 평균 성장률이 5.3%다. 학계에선 3 ~ 4% 성장을 하면 근대적 경제 성장을 했다고 본다. 5% 넘는 성장률은 결코 낮지 않고, 분명히 지속적 성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시기 아니었나.

 

“1950년대 우리 경제는 어려웠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이는 상당 부분 소득 수준이 낮은 데 기인했다. 하지만 소득이 낮고 경제가 어렵다는 것과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건 구분해 봐야 한다. 흔히 1950년대 경제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성장이 없는 정체된 상황이라고 짐작하기 쉬운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성장률 외 다른 근거는.

 

“다양한 통계에서 성장과 산업화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유엔이 1950년대 각국 산업 분야 성장률을 비교한 자료를 보면, 한국의 산업 생산 증가율은 경공업과 중공업 모두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전력 생산량을 봐도, 1950년대에 연평균 13.1% 상승해 12.5%였던 1960년대 전반기보다 오히려 높았다. 제조업 생산 증가율도 1955 ~ 1960년 연평균 13.6%를 기록해 1960년대 전반의 12.3%보다 높았다.

 

 

 

 

 

1950년대 성장 이유

 

1950년대 성장은 전후 복구의 ‘반짝’ 효과 아니었을까.

 

“1950년대 성장률이 높았던 건 6 · 25 전쟁 후 복구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또 전후 복구엔 경제 원조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단순히 원조의 역할이 컸다고 하고 말 게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굉장히 많은 나라가 원조를 받았지만, 원조를 근대적 경제 성장과 연결했던 나라는 극히 드물다. 전후 복구 과정에 북한도 중국과 소련에서 원조를 받았는데, 1인당 원조액은 남북한이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북한은 1960년대 경제 발전에 실패했고, 이것이 장기적 침체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은 1950년대 원조를 통한 높은 경제 성장을 이뤘고, 이후 고도 성장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 경제 정책 중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수출을 1960년대부터 중요하게 생각했고 1950년엔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도 수출을 늘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다. 당시 총수출액이 총수입액의 10% 수준에 불과해 무역 적자가 극심했기 때문에 수출을 늘리는 게 아주 중요했다. 예컨대 수출입 링크제 같은 것이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 이는 수입에 필요한 달러를 배분할 때 수출을 한 기업에 달러를 더 배분하는 정책이다. 수출 진흥 정책도 1950년대에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다른 경제 정책의 영향은?

 

“이승만 정부의 어떤 특정 정책이 성장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주제다. 예컨대 ‘유상몰수, 유상분배’ 식의 농지개혁이 성장에 기여했다는 말이 많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연구는 거의 없다. 학자들이 할 일이 많다.”

 

 

성장 출발점을 왜 다시 보나

 

경제학계 정설은 박정희 정부 때 성장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고도 성장과 근대적 경제 성장을 구분하지 않고, 고도 성장이 언제 시작됐느냐를 갖고 우리 경제를 이해하는 접근을 하다 보니 나오는 설명이라고 본다. 성장률을 갖고 근대적 경제 성장을 따지는 것은 사이먼 쿠즈네츠, 월터 로스토우 등의 학자들이 했던 경제발전론의 전통적 연구에 기반한 것이다.”

 

성장 시작을 몇 년 더 앞당겨 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우선 역사적으로는 1950년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경제 성장을 정권별로 토막 내지 않고 쭉 이어서 본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체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전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하다. 많은 외국 학자가 한국 성장에 관심을 갖는 건 그간 선진국이 원조를 하거나 개발도상국이 많은 다양한 경제 정책을 썼지만 한국 빼고는 눈에 띄게 성장한 사례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실패에서 배우는 것보다 성공에서 배우는 게 훨씬 많다. 이런 관점에서 1950년대 성장이 시작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

 

 

☞ 수량 경제사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으로 경제학 이론과 통계 분석에 기반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 김두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UCLA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군사관학교, UC 데이비스, 한국개발연구원 (KDI)을 거쳐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제사, 제도경제학, 법경제학이 주요 관심분야다. 저서로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살면서 한 번은 경제학 공부', '경제성장과 사법정책' 등이 있다. 계간서평지 '서울리뷰오브북스' 의 편집장도 맡고 있다.

 

 

 

"한국이 받은 1인당 원조액은 세계 평균에 못 미쳐"

 

 

한국의 경제 성장과 원조

 

 

 

김두얼 교수는 “세계적으로 경제 원조를 받았던 나라들은 많지만, 원조를 성장의 토대로 만들었던 나라는 드물다” 며 1950년대 한국이 받았던 원조가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은 공식 통계로는 1999년까지 원조를 받았다. 김 교수는 우선 한국이 받은 원조의 총액을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와 우리 정부, 한국은행 등의 자료를 갖고 산출하고 이것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따져봤다.

 

 

한국이 받은 원조 규모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1945년부터 1999년까지 증여받은 공적개발원조액에 양허성차관액을 합하면 약 77억달러가 된다. 이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원조 통계에 수록된 181국과 비교하면, 상위 20위 정도다. 최상위국엔 인도, 이집트,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베트남, 이라크, 중국, 탄자니아, 이스라엘 등이 들어간다. 그런데 1인당 원조액으로 따지면, 비교 가능한 134국 중 70위 정도다. 평균보다 더 낮았다.”

 

 

한국 원조에 대한 평가는.

 

“1960년대 초 우리나라가 세계은행에 철도 건설과 관련한 원조를 받기 위해 신청서를 냈다. 당시 신청서를 평가한 문서를 봤더니, 세계은행은 ‘이 나라는 돈을 줘봤자 과연 경제 성장을 할 수 있겠느냐’ 는 식의 평가를 하면서도 ‘어쨌든 저개발국을 도와줘야 하니 1500만달러를 빌려 주자’ 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2차 신청서에 대한 평가를 보면 ‘이 나라는 원조를 했더니 정말로 그걸 가지고 뭔가를 한다’ 며 ‘그러니까 이 나라는 계속 원조를 해야 한다’ 는 식으로 바뀐다. 한국은 원조를 책임감을 갖고 썼다는 것이고 그래서 효과성도 크게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원조 없이 한국이 성장을 했을까.

 

“불가능하진 않았더라도 몇 십 년은 늦어졌을 것이다. 원조 자체는 1차적으로 경제 안정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1950년대 원조는 식량 등의 공급 부족을 완화시켜 줬다. 더 나아가 투자를 활성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방현철 기자 경제부 차장 / 경제학 박사

<방현철의 경제로 세상 읽기>

 

 

[출처 : 조선일보 2024년 3월 1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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