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기억, 짙은 그리움] 02
가지 못한 고향,
잊힌 기억
정부는 이산가족 고령화로 생전에 가족을 만나기 어려운 이산가족들의 사정을 고려해 2005년부터 이산가족의 생전 모습과 사연을 영상으로 제작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영상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과 협의해 재북가족에게 전달할 계획으로 실제로 2008년에 남북 각각 20건씩 40건의 영상편지를 시범적으로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민간에서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산가족 상봉 교류 재개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다큐멘터리 등 영상으로 담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올해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출품작으로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의 아픔을 담은 '가지 못한 고향, 잊힌 기억' (감독 유승훈)의 인터뷰 영상 일부를 소개합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70년 넘는 이산의 세월을 살아오며 마음 깊이 간직해 온 그리운 부모님, 형제자매, 고향 산천에 대한 회한의 마음이 잘 담겨 있습니다.
나는
이산가족입니다.
성 명 : 장정연
출생년도 : 1933년
고 향 : 황해도 송림시 용봉리
영상시간 : 08초 ~ 4분 10초
장정연 선생님의 아버님은 의사로 송림시 황해제철초병원에서 일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연금되었다가 평양형무소에서 살해됐다.
1 · 4 후퇴 당시 어머니, 언니, 오빠 셋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지만, 어머니와 두 자매는 걸음이 느려 사리원시에서 재회하기로 하고 오빠 셋은 먼저 출발했다.
사리원시에 도착해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지만, 그곳은 이미 폭격을 당해 흔적도 없었고, 오빠들도 만나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와 두 자매만 월남했다.
성 명 : 김진권
출생년도 : 1930년
고 향 :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영상시간 : 8분 12초 ~ 13분 18초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아내에게 일주일 정도 "장연군 앞에 있는 달래섬에 피신해 있다가 오겠다" 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어머니와 아내를 데려오기로 마음먹고 고향에 알고 있던 노동당원을 포섭해 공작을 벌였다. 하지만 공작이 발각되었고, 아내는 가까스로 데리고 나왔지만, 나이 드신 어머니는 데려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생사를 모른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성 명 : 전옥분
출생년도 : 1934년
고 향 :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
영상시간 : 4분 12초 ~ 8분 10초
한국전쟁 중 황해도 장연군에 사는 한 청년과 약혼식을 올리고 두 달만에 남편을 따라 백령도로 피난을 왔다. 먼저 백령도로 피난 온 작은 오빠는 동키부대 유격대에서 활용하다 전사했다. 전쟁은 멈췄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됐다.
성 명 : 송용순
출생년도 : 1921년
고 향 : 황해도 해주시 북욱정
영상시간 : 13분 22초 ~ 16분 36초
독립군 집안 출신으로 공무원이었던 남편과 결혼해 살다가 1947년에 월남했다. 여동생 넷이 있었는데 나중에 월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내려오지 못했다. 동생들을 데려오지 못한 일을 일생의 한으로 남아 있다.
가슴에 품은
가족사진 한 장,
그리고 위로
가족사진 기증자 명단 가나다순, 미상자 사진 포
강병도, 강윤완, 구문기, 구정희, 권대근, 권영수, 권태정, 김병일, 김영길, 김영선,
김영한, 김우택, 김익제, 김정순, 김제수, 김창남, 김현숙, 나운형, 리종구, 리호권,
리희상, 박상신, 박영희, 박인규, 박호천, 백리성, 변종애, 삼 룡, 서경자, 서치정,
손양영, 신용옥, 신종균, 안옥호, 안종철, 양우룡, 양인숙, 오동걸, 왕종국, 우영식,
윤 근, 이경주, 이동섭, 이병덕, 이승재, 이승철, 이오환, 이종무, 이종연, 이준배,
이회수, 임화숙, 전석진, 전진성, 정기복, 정태수, 정태완, 정학선, 정현모, 정호상,
정흥산, 조병희, 조복래, 최병관, 최상민, 최영근, 한기홍, 한응호, 황정길
이산가족 상봉의 길
이산가족 상봉은 대면상봉과 화상상봉이 있습니다. 대면상봉은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3일까지 이뤄진 '남북한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서울, 평양 교환방문' 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이뤄지지 못했고, 2000년 남북정상이 「6 · 15 남북공동선언」에서 '8 · 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 친척방문단' 을 교환하기로 합의하면서 다시 성사됐습니다. 이후 2018년까지 당국 차원에서 21차례 (1985년 상봉 제외) 총 20,604명이 그리운 가족을 만났습니다.
한편, 2005년 남북 당국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인 이산가족이 거리가 먼 금강산 면회소까지 직접 가야하는 번거로움과 불편을 털어주고자 화상상봉에 합의했습니다. 2005년 8월 15일에 첫 화상상봉 이후 2007년까지 총 7차례 557가족 총 3,748명이 화상으로 가족을 만났습니다.
이 밖에도 남북 당국은 생사 및 주소확인 (2000년 6월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서신교환 (2000년 9월 23일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영상편지 교환 (2007년 4월 13일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 합의했고, 서신교환은 1차례 600통 (2001년 3월 15일), 영상편지도 1차례 40건 (2008년 2월 1일)이 성사됐습니다.
이산가족 대면상봉은 2018년 21차 이후 6년째, 화상상봉은 2007년 7차 이후 16년째, 서신교환은 2000년 이후 23년째, 영상편지는 2008년 이후 17년째 중단됐습니다. 이산가족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상봉하는지 살펴보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하루 속히 재개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2000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교류 현황
* 민간 상봉교류 실적 제외
생사확인
8,097건
59,406명
서신교환
679건
679명
대면상봉 21회
4,290가족
20,604명
화상상봉 7회
557가족
3.748명
영상편지 교환
1회
40건
영상편지 제작
25,108건
영상편지 제작
이산가족 상봉 제약 및 고령화로 생전에 가족을 만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생전 모습을 영상에 담아 기록 관리하는 것으로 향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과 협의해 재북가족에 전달할 계획으로 제작 중
남북 당국간 이산가족 상봉절차
1
(남북 합의)
이산가족 상봉 관련 남북 당국 간 합의
1985. 08. 22.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에 관한 합의서
상봉의 주선과 범위
가. 쌍방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에 대해 적십자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그들의 가족과 친척을 찾아서 상봉을 시켜주는
편의를 제공한다.
나. 상봉의 범위에 있어, 직계 존 · 비속은 헤어질 당시의 가족과 그 이후에 출생한 가족을 포함하고, 친척의 경우
방계는 8촌, 처 · 외가는 4촌으로 하되, 본인의 희망에 따라 생사나 소재가 확인된 친척도 포함한다.
↓
2000. 06. 15.
6 · 15 남북공동선언
남북은 올해 8 · 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2000. 6. 27. ~ 8. 30. 금강산)
↓
2000. 06. 30.
남북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면회소 설치 · 운영 및
비전향 장기수 송환에 관한 합의서
남북적십자단체 대표들은 역사적인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6월 27일부터 6월 30일까지 금강산 호텔에서 올해 8 · 15에 즈음하여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면회소 설치 · 운영 및 비전향 장기수 송환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고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① 이산가족 방문단은 2000년 8월 15일부터 8월 18일깢; (3박 4일) 동시 교환한다.
② 방문단은 책임자 1명, 이산가족 100명, 지원인원 30명, 취재기자 20명으로 구성하며, 방문단 책임자는 각기
편리한대로 한다.
③ 방문단의 방문지는 서울과 평양으로 한다.
④ 쌍방은 방문단 후보자 명단을 방문 30일 전 각기 200명씩 교환하며, 그 중 생사 · 소재를 확인한 후 확정된 방문자
명단을 방문 20일 전에 통보한다.
↓
2005. 07. 19.
남북이산가족
시범화상상봉에 관한 합의서
1. 남과 북은 광복 60주년이 되는 올해 8월 15일에 이산가족들의 화상상봉을 시범적으로 실시한다.
2. 남과 북은 이산가족들의 시범화상상봉 규모를 각기 20명 씩으로 하며, 1명의 상봉자가 만나는 살대측의 가족,
친척은 5명 정도로 한다.
이를 위하여 남과 북은 이산가족들의 화상상봉 후보자를 쌍방 각기 100명씩 정하고 후보자 명단은 7월 18일에,
회보서는 7월 27일에, 최종명단을 8월 2일에 판문점을 통하여 교환하기로 한다.
↓
2007. 10. 04.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10 · 4 남북정상선언)
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금강산 면회소에 쌍방 대표를 상주시키고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상봉을 상시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
2018. 09. 19.
9월 평양공동선언
남과 북은 이산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인도적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① 남과 북은 금강산 지역의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빠른 시일 내 개소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면회소 시설을
조속히 복구하기로 하였다.
② 남과 북은 적십자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의 화상상봉과 영상편지 교환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하였다.
2
(인선 기준 마련 → 1차 인선 → 2차 인선)
이산가족 대상 인선
인선위원회에서 인선기준 마련
남북 당국 간 합의로 상봉 일정이 결정되면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을 위원장으로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인선위원회' 에서 이산가족 신청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인선기준을 마련, 컴퓨터 추첨 방식을 이용해 투명하게 대상자를 선정
2018년 8 · 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1차 후보자 컴퓨터 추첨 장면
↓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선정
대면상봉
고령자, 직계가족 순으로, 출신지는 균등하게 가중치를 부여하여 컴퓨터로 후보자 (1차 인선, 방문자의 5배수)를 선발하고, 본인 의사확인 · 신체검사 등을 감안한 적격자를 대상으로 컴퓨터 추첨을 통해 북측에 생사확인을 의뢰할 대상자 (2차 인선, 방문자의 2배수)를 선정
화상상봉
1차 후보자는 90세 이상 고령자를 우선 선정하되 80세 이상도 포함하여 직계가족 우선으로 가중치를 부여해 선정 (2차 인선은 대면상봉과 동일)
* 가족관계별 가중치 부여 : 부모 / 부부 / 자식 3, 형제자매 3, 기타 1
3
(생사확인 의뢰 → 생사확인 회보서 교환 → 최종인선 대북통보)
생사확인 및 최종인선
생사확인 의뢰서 및 회보서 교환
생사확인 의뢰서 교환
남북이 각각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인선을 마무리한 후 서로 명단을 전달해 생사 및 소재를 확인하는 절차
2018년 8 · 15 계기 이산가족 상봉후보자 생사확인 의뢰서 교환
↓
회보서 교환
남북이 상호의뢰한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의 생사 및 소재를 확인해 회신하는 절차
2018년 8 · 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북한 후보자 생사 확인 회보서
↓
최종인선 및 대북통보
북한에서 온 생사확인 결과를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들에게 통보하고, 전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상봉 의사를 확인한 뒤 북한과 합의한 상봉 인원 내에서 최종 대상자를 결정해 북한에 통보하는 절차
4
(상봉)
대면상봉 또는 화상상봉
대면상봉
이산가족 첫 대면상봉은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3일까지 이뤄진 '남북한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서울, 평양 교환방문' 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지 못하다가 2000년 남북정상이 「6 · 15 남북공동선언」에서 '8 · 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 친척 방문단' 을 교환하기로 합의하면서 다시 성사됐습니다. 1985년 이산가족 상봉 이후 15년만이었습니다.
이후 2018년까지 당국 차원에서 21차례 (1985년 상봉 제외) 상봉이 이궈졌고, 총 20,604명이 그리운 가족을 만났습니다.
2000년 6 · 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성사된 제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
화상상봉
2005년 남북 당국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인 이산가족이 거리가 먼 금강산 면회소까지 직접 가야하는 번거로움과 불편을 덜어주고자 화상상봉에 합의했습니다.
2005년 8월 15일에 첫 화상 상봉이 성사된 이후 2007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557가족 총 3,748명이 화상으로 가족을 만났습니다.
2007년 제5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장면
기억 넘어
그리움의 저편, 희망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긴 분단의 시간민큼 이산의 시간도 길게 이어지고 있어 헤어진 가족과 떠나온 고향 산천의 기억을 희미할 수 있지만,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리운 마음은 가실 길 없기에 그 마음이 쌓이고 쌓여 염원하는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의 희망도 실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2회 이산가족의 날을 기념해 마련한 이산가족 기증품 전시 《희미한 기억, 짙은 그리움》이 이산가족의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고, 그리움이 더해져 이산가족이 꿈꾸는 가족 상봉과 재결합의 희망이 곧 현실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拉
끌려갈 납
北
북녘 북
: 북으로 납치해 감
전쟁 중 납북되는 사람들
또 하나의 이산가족,
납북자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산가족이 있습니다. 바로 납북자들입니다.
납북자란 6 · 25전쟁 중 북한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북한에
억류된 민간인을 말합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를 대략
1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납북 사건은 6 · 25전쟁 중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필요한
지식인, 전문가 및 기술적 등을 계획적으로 혹은 전쟁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젊은 청 ·장년층 남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납치한
사건입니다. 우리 정부는 전쟁 중 오랜 협상 끝에 납북자를
교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그 후 오늘날까지 남한으로
돌아온 납북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북한은 현재까지도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은 남겨진 가족들은 6 · 25전쟁
이후 74년째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납북자
조사활동
현재까지 발간된 납북자 명부들은 '납북' 을 인정하지 않은
북한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귀중한 증거 자료입니다.
국내에서 제일 처음 발간된 명부는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로
아래는 주요 명부로 분류되는 12종입니다.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 공보회 통계국, 1950. 12. 1.
『6 · 25 사변 피랍치인사 명부』, 6 · 25 사변 피랍치인사가족회, 1951. 8. 27.
『6 · 25 사변 피랍치인사 명부』, 6 · 25 사변 피립치인사가족회, 1951. 9. 1. 이전
『6 · 25 사변으로 인한 사망 · 납치 · 행방불명자 등 조사표』, 경기도 양평군, 1951. 11월 이전
『6 · 25 사변으로 인한 인신피해자 명부』,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1951. 9월 경
『6 · 25 사변 피랍치자 명부』, 공보처 통계국, 1952.
『6 · 25 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 내무부 치안국, 1954.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 대한적십자사, 1956.
『우리 측 안부탐지 조퇴서』, 대한적십자사, 1956.
『실향사민 소식조사 회답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1957.
『실향사민 명부』, 국방부, 1963.
납북자
귀환 노력
정부와 납북자 가족들은 납북 사건 발발 직후부터 납북자 현황에 대해 조사하고 이에 대한 명부를 작성했습니다. 이 명부들을 통해 정전협정에서 납북자 귀환을 협상하려고 했지만 북한의 비협조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1957년에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일부 납북자의 신변에 대한 회신을 받은 바 있으나 귀환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납북자 문제는 전후 戰後 복구 등 현실적인 문제에 밀려 해결되지 못한 채 잊히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6 · 25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진상조사 및 국립 6 · 25전쟁 납북자 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2023년 8월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 · 미 · 일 3국 정상이 만나 '납북자, 억류자 및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 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공동 성명에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2023년 통일부는 장관 직속의 납부자 대책팀을 신설하여 납북자 문제해결 및 인도적 송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납북의
규모
『6 · 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1950년 이후 발간된 납북자 명부 등을 종합한 결과, 6 · 25전쟁 중 납북된 남한 민간인 규모를 10만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서울시 23,790
경기도 18,052
강원도 11,088
충청북도 13,871
충청남도 9,332
경상북도 7,876
경상남도 1,275
전라북도 5,997
전라남도 3,825
기타 11
미확인 339
출처 : 『6 · 25전쟁 납북피해 진상보고서』,
『6 · 25전쟁 납북진상규정위원회』
하나뿐인
마지막 가족사진
최영수 崔永秀, 1911 ~ 1950
납북자 최영수의 가족사진입니다.
1950년 1월 1일 새해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최영수의 다섯 식구가 모두 나온 마지막 가족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아들 최영재의 저서인 『마지막 가족사진』의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최영수는 경향신문 출판국장이었습니다. 그는 1950년 7월 13일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내무서원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이봉우 李鳳雨, 1924 ~ 미상
납북자 이봉우가 결혼 전 아내와 인연을 맺어준 처고모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이봉우, 그의 오른쪽에는 아내, 맨 앞 왼쪽에 있는 사람이 처고모입니다.
이봉우는 서울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수원의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는 1950년 8월 21일 경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에서 내무서원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이길용 李吉用, 1899 ~ 미상
납북자 이길용의 가족사진입니다. 그는 체육부 신문기자였으며 한국 체육의 발전에 공헌했습니다. 한국체육기자연맹은 스포츠 취재기자들을 위한 '이길용체육기자상' 을 1989년에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재직시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우승 사진에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게재한 일로 총독부에 의해 언론탄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0년 7월 17일 경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내무서원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이종령 李鐘齡, 1909 ~ 미상
납북자 이종령의 가족사진입니다. 1942년에 찍은 사진으로 서 있는 사람 중에 왼쪽 첫 번째 사람이 이종령입니다. 이종령은 서울지방법원과 청주지방법원에서 판검사를 했으며,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법조인이었습니다. 현재 그의 딸 이성의가 '(사) 6 · 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의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1950년 7월 10일 경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에서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전봉빈 田鳳彬, 1908 ~ 미상
납북자 전봉빈이 영양 군수 관사에서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전봉빈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해 28세부터 지방의 군수로 재직하였고, 미군정시대가 되면서 대구대학 (現 영남대)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맡다가 서울로 상경해 국회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1950년 8월 3일 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내무서원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납북자 상징물 물망초
정부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주목 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산가족인 납북자, 억류가, 국군포로의 송환 노력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물망초 상징물을 제작했습니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 로 납북자, 억류가, 국군포로의 '잊혀지지 않을 권리' 를 뜻합니다.
'전시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세대 조경가 정영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첫 조경 전시] (2) | 2024.09.21 |
---|---|
[서울의 지하철] 01 (0) | 2024.09.17 |
[89세 조각가 김윤신 인터뷰 ㅡ 평단 · 시장 열광하며 완판 행진] (2) | 2024.09.13 |
[희미한 기억, 짙은 그리움] 01 (0) | 2024.09.12 |
[추사를 잇다] 03 (0) | 202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