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명지휘자 '마에스트라']
▲ 미국과 영국 명문 오케스트라들을 여성으로서 처음 지휘한 프랑스 음악 교육자 · 지휘자 · 피아니스트 나디아 불랑제. / 게티이미지코리아
명문악단 첫 지휘한 여성 불랑제··· 음악계 유리 천장 깼죠
바렌보임 등 명음악가의 스승이기도
美 올솝, 주요 악단 첫 여성 음악감독
한국의 김은선 · 장한나 세계서 맹활약
'마에스트로 (Maestro)' 는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거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입니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뛰어난 명지휘자들을 일컫지요. 이 마에스트로의 여성형이 바로 '마에스트라 (Maestra)' 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여성 명지휘자' 라는 뜻이 되지요. 올해 초 종영한 배우 이영애 주연의 드라마 제목처럼, 최근 세계 음악계에도 '마에스트라 열풍' 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지휘는 남성의 전유물' 이라는 낡은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마에스트라들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나디아 불랑제
마에스트라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음악 교육자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인 나디아 불랑제 (1887 ~ 1979)입니다. 우선 그는 미국 작곡가 에런 코플런드와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 명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마이클 잭슨 음반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퀸시 존스 같은 음악가들을 길러낸 스승으로 유명합니다. 클래식과 현대음악, 탱고와 팝 음악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여기에 불랑제의 교육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작곡 세계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대위법과 화성학, 작품 분석 같은 기본기 훈련에만 매진했다고 합니다. "창의력은 내가 주거나 빼앗을 수 없다. 단지 악보를 읽고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자유를 선사할 수 있을 뿐" 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매주 수요일이면 불랑제의 집에 제자들이 모두 모여서 공개수업을 받았는데, 이때마다 학생들이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불랑제의 수업이 얼마나 철저하고 혹독했는지는 제자들의 훗날 고백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렌보임은 불랑제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악보를 펴놓고서 "그 자리에서 조옮김을 해서 연주하라" 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눈앞의 악보와 손으로 연주하는 음표가 서로 달라지는 '음악의 곡예' 를 펼쳐야 했던 것이지요. 더욱 놀라운 건 불랑제가 '피아노의 구약성서' 로 불리는 이 작품을 열두 살에 모두 외웠다는 점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빵집 주인 (Boulanger)' 이라는 뜻인 불랑제의 불어 이름에서 따온 '빵집 (Boulangerie)'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불랑제는 영국 BBC 심포니와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같은 명문 악단들을 처음 지휘한 여성으로도 유명합니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을 의미하는 '유리 천장' 이 음악계에서도 깨지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1938년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에 기자들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하는 소감을 물었습니다. 당시 불랑제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50년 이상이나 여자로 살다 보니 이젠 여성이라는 것이 새삼 놀랍지는 않군요." 지휘대에는 본래 남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 그의 삶은 다큐멘터리와 영화로도 재조명됐어요. / 위키피디아
안토니아 브리코
영화를 통해서 재조명받고 있는 여성 지휘자도 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안토니아 브리코 (1902 ~ 1989)입니다.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브리코는 베를린 예술대를 졸업한 뒤 1930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습니다. 그 뒤에도 1938년 여성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했고, 여성 단원들로 구성된 악단을 창단하기도 했지요. 1974년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카데미상 최우수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그의 업적도 다시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2018년에는 브리코의 삶에 바탕한 네덜란드 영화 '더 컨덕터' 도 나왔지요.
이처럼 선구적 여성 지휘자들이 있지만, 여전히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음악 감독에 오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음악 감독은 연주 곡목과 협연자 선정부터 단원 선발까지 악단의 음악적 부문을 총괄하는 자리입니다. 미국의 여성 지휘자 마린 올솝 (68)은 콜로라도 심포니 (1993 ~ 2005), 영국 본머스 심포니 (2002 ~ 2008), 볼티모어 심포니 (2007 ~ 2021)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면서 이 악단들의 '첫 여성 음악 감독' 기록을 연이어 작성했지요.
올솝은 어릴 적 레너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 를 보고서 지휘자의 꿈을 키웠고 나중에 번스타인을 사사하기도 했지요. 한국에서도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당시 우승자가 된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던 지휘자로 친숙합니다.
최근에는 바로크와 현대음악 같은 분야에서도 여성 지휘자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아임 (62)과 로랑스 에킬베 (62) 같은 여성 지휘자들은 바로크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악단을 직접 창단하고 이끌고 있지요. 핀란드의 수잔나 맬키 (55)는 프랑스 현대음악 전문 단체인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여성 지휘자들의 진출 분야도 점점 다양해지고 전문화하고 있는 셈입니다.
▲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당시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협연한 지휘자 마린 올솝. 그는 미국 · 영국 악단들의 '첫 여성 음악 감독' 으로도 유명해요. / 반 클라이번 콩쿠르
한국 출신 마에스트라
한국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인 김은선 (44), 첼리스트 출신으로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를 이끌고 있는 장한나 (42),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인 성시연 (49) 등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 중입니다. 김은선은 지난 4월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을 한국 여성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지휘했지요. 크게 보아서 이들은 모두 '불랑제의 후예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베를린 필 같은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와 오페라극장의 여성 감독은 탄생하지 않았지요. 여성 지휘자들이 클래식 음악계의 마지막 '유리 천장' 까지 모두 깨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 한국 지휘자 김은선. 그는 지난 4월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어요. / 서울시향
김성현 문화전문기자
기획 · 구성 = 오주비 기자 (jubi@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4년 8월 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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