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구 신화

김구 신화 9. 장덕수 암살의 진실, 법정에 선 김구

드무2 2021. 8. 17.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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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9. 장덕수 암살의 진실, 법정에 선 김구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1년 6월 21일 방송

 

 

 

 

 

 

 

 

 

 

 

 

김구의 신화 (9)

 

장덕수 암살의 진실

 

- 법정에 선 김구 -

 

2021. 6. 21 (월)

 

 

 

          개요          

 

◆ 사건 발생, 1947년 12월 2일 오후 6시 15분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57세), 제기동 자택, 경찰 포함 괴한 2명, 소총 2발 총격, 사망

 

◆ 암살범, 대한혁명단 소속 박광옥(23), 배희범(20), 최중하(19), 조엽(21), 박정덕(22), 김철(19)

 

◆ 암살공범, 국민의회 소속 신일분, 김중묵, 조상항, 손정수

 

◆ 암살진범, 한독장 중앙위원, 국민회의 동원부장, 大韓輔國義勇團 단장 김석황(54), 한독당 위원장 김구(73)

 

 

 

1947년 한민당 정치부장 시절

 

 

 

1931년 로마에서 인촌과 함께

 

 

 

재미유학 중 인촌이 마련한 설산자당 회갑연(명월관)

 

 

 

1947년 12월 8일 서울시청 앞 영결식

 

 

 

1947년 12월 망우리 겨울산에 묻힌 설산

 

 

 

1948년 3월 미국 군사재판정에 선 김구

 

 

 

1. 장덕수는 누구?

 

 

 

● 1894년 황해도 재령 나무리벌, 부친 장봉도, 모친 김현묘, 4남 1녀 중 3남, 덕주, 덕준, 덕수, 덕진, 덕희

● 1901년 (사립) 演義학교 입학

● 1907년 부친 장봉도 별세

● 1908년 진남포이사청 급사 취업

● 1910년 평양부청 용원 전근

● 1911년 보통문관 시험 합격 (18세 / 판임관)

● 1912년 와세다대학 입학 (김성수 / 송진우 교유)

● 1914년 '學之光' 편집위원, 유학생 강연회 조직

● 1915년 전일본 유학생 웅변대회 1등

● 1916년 와세다대학 정경과 2등 졸업

● 1917년 김씨와 혼인, 상해 망명

● 1918년 신한청년당 조직 (여운형 / 김규식 / 선우혁 등)

● 1919년 동경, 독립운동, 인천항 체포, 전남 목포 하의도 유배, 여운형 통역 渡日, 귀국 후 방면

● 1920년 <동아일보>주간, 조선체육회 창립, 덕진 = 평남도청 투탄, 덕준 = 훈춘사건 취재 중 실종

● 1921년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

● 1922년 부인 김씨와 사별, '사기공산당사건'

● 1923년 김성수 / 송진우 권유, 미국 오리건대학 입학

● 1924년 컬럼비아대학 정치과 입학, 덕준 상해 사살

● 1926년 박사학위 준비

● 1928년 박사논문 불합격

● 1929년 영국 런던대학 유학

● 1930년 김성수의 유럽여행 안내

● 1932년 박사논문 준비, 박은혜 만남

● 1933년 보성전문 미국지부 창설, 박은혜 귀국

● 1936년 컬럼비아대학 논문 통과 / 귀국 (유학 13년)

● 1937년 박은혜와 결혼 (44세), <보성전문> 강사

● 1940년 <보성전문> 교수, 장녀 숙원 출생

● 1941년 <보성전문> 교수 겸 수석 학생감

● 1943년 서호 근로동원 학병지원 연설

●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 결성, 외무부장 취임, <보성전문> 사직, <동아일보사> 취체역

● 1946년 3월 제1차 한민당, 한독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4당 합당, 한민당 정치부장 피선

● 1947년 2월 제2차 한민당 / 한독당 합당 추진, 한민당 교섭대표 참가, 6월 제2차 미소공위 참가, 국민회 / 애국단체 연합회 호소, 9월 웨드마이어 특사 / 단독정부 수립, 11월 총선거 대비 한민당 선거전략 수립, 12월 2일 제기동 자택, 殞命!

 

 

 

2. 해방정국의 카오스

 

 

 

1947년 6월 23일 제2차 미소공위와 반탁시위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          

 

●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제2항 "정당 및 사회단체화의 협의와 임시정부 수립 준비" (제1단계), 제3항 "임시정부 참여에 따른 4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 신탁통치 협약 작성 (제2단계)

● 제1차 미소공위 쟁점 = 임시정부 구성 산파역, "협의 대상 정당 및 사회단체" 선정문제

● 1946년 4월 18일 미소공위 공동성명 제5호, 협의대상 정당 및 사회단체 = 신탁통치안 서명 (찬성과 반대)

● 좌익계 = 찬탁 서명, 우익계 = 반탁 / 분열 (찬성과 반대)

● 미국측 = 우익 설득, 20개 정당 및 사회단체 서명

● 소련측= 반탁운동 정당 및 사회단체 불인정 / 배제!

● 1946년 5월말 제1차 미소공위 결렬!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 1946년 6월 3일 이승만 정읍 발언

● 1946년 9월 미군정, 김규식 / 여운형 = 좌우합작 추진

●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 제3조 = 장덕수 반발, 사회주의 국가건설인가 (농지개혁 / 중요산업 국유화)

● 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 재개!

● 소련측 =반탁운동 15개 정당 및 사회단체 배제

● 미국측 = 반탁운동, 의사 표현의 자유, 협의 대상 인정

● 1947년 8월 18일 제2차 미소공위 무기휴회

● 1947년 9월 17일 미국, 한국문제 유엔 이관 결정

●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 한국문제 의제 채택

● 1947년 10월 17일 유엔소총회, 한국문제 결의안 제출

● 1947년 10월 30일 결의안 통과 (찬성 41 / 반대 0 / 기권 7)

●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전국 총선거 / 유엔 한국위원단 파견 결정, 남북한 단정 현실화!

 

 

 

          1946년 4월 제1차 합당 논의          

 

● 4월 7일 합동교섭, 한독당 당명 / 당시 계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 총무, 재정, 선전, 조직 = 한독당, 나머지 10개 = 한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 김성수 = 민족분열 저지, 대동단결 정당, 합당 합의, 4울 9일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합당안' 부결, 장덕수 = "合黨이 아니라 獻堂" 한민당 = 격렬한 한독당 독주 비판

● 김구 / 한독당 = "합당을 깬 장본인은 장덕수다!" 김구와 장덕수 = 日月 관계의 月蝕현상!

 

          이경남 (1981),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351쪽          

 

 

 

          1947년 2월 제2차 합당 논의          

 

●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좌우합작론 / 단정론 대립, 한독당 / 한민당 합당교섭, 제2차 미소공위 공동대응, 경교장 회의, 한민당 = 김성수 / 장덕수, 한독당 = 김구 / 조완구

● 장덕수 왈 "(합당에 앞서) 미군정에 대한 견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민당 = 미군정 현실 인정 / 협력 / 독립, 한독당 = 미군정 현실부정 / 비협력 / 독자 노선, 김구(임정법통론)과 장덕수(신탁훈정론)의 대립 / 갈등

● 국민당 / 신한민족당 = 친일파 / 친미파 한민당과 합당 불가, 장덕수 왈 "백범 선생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한독당과의 합동은 단념합시다!" 한독당 = 합당 결렬 주범은 장덕수!!!

 

          이경남 (1981)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352쪽          

 

 

 

3. 마탄의 사수들

 

● 1947년 12월 2일 오후 6시 15분, 제기동 장덕수 자택 酒宴, 한민당 유홍종 / 재정부장 이영준 등

● 동대문경찰서 현직경찰 박광옥(23세), 연희대 상과 3년 배희범(20세), 칼빈소총 2발 발사 / 즉사

● 12월 4일 박광옥 / 배희범 검거, 가택 수색 / 사진 발견 = 이봉창 / 윤봉길 흉내, 한독당의 소행 의심?

● 12월 10일 공범 5명 (국민의회 소속 신일준, 김중목, 최중하, 조상항, 손정수) 체포, 15일 엄항섭 / 조소앙 소환 / 취조

● 12월 16일 김석황(54) 체포 / 한독당 성명 발표, 20일 조소앙 정계 은퇴 선언

 

 

 

          한독당 김구 담화          

 

암살행위는 容許할 수 없다. 장덕수씨의 피살의 흉보를 듣고 놀랬다. 민주정치 국가에서 자기와 정견이 다른 사람을 암살하는 행위를 용허할 수 없다. 나와 장덕수씨는 그 형 장덕준씨나 동생 덕진씨와의 관계로 과거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특히, 덕준씨는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만주에 파견 (훈춘사건 취재) 되었을 때 우리 독립군 토벌대의 기사를 취급한 사건으로 日軍에게 피살당하였으며, 아우 덕진씨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인과의 충돌사건(도박장 습격)으로 서거한 일로 미루어, 이를 삼형제는 모두 獨立運動의 鬪士들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5일자          

 

 

 

          한독당 담화 발표         

 

故 장덕수 살해사건에 혁명 선배들이 다수 검거되었다. 그 진상을 타진하고 책임 당국의 답변을 듣고자 지난 15일 한독당 중앙상위에서 조각산 외 4명을 선출, 하지 중장과 교섭하기로 하였다.

 

1. 혁명 대선배를 반동, 파괴, 분열, 모략, 암살범과 관련 있다는 듯이 문초 운운은 절대 관련이 없는 명백한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2. 애국 지도자에게 체포령을 발령하여 국민의 신뢰를 강하게 하던 당국은 전과를 거듭하지 않기를 바란다.

3. 국민의회가 암살을 결의하지 아니한 국민의회를 중지케 함은 언론 및 집회 자유란 기본권리를 약탈한 것이니 민주주의의 모독이다. 책임당국의 답변을 요구한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16일자          

 

 

 

          1948년 2월 21일 피의자 기소          

 

(1)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관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 등은 공동행위와 공동의사에 의하여 김철 등 성명 미상의 여러 사람과 함께 서울에서 작년 8월 14일에 혹은 그날 경에 고의적으로 부당히 불법적으로 장덕수, 안재홍, 배은희 및 기타 인사 약간 명을 살해하려고 음모하고 공공연히 행위를 혹은 음모에 의한 또는 그 실행을 해위하였다.

 

(2)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은 공동행위로 또 공동의사에 의하여 서울에서 작년 12월 2일에 혹은 그날 경에 악의를 가지고 불법적이며 계획적으로 장덕수를 다단총으로 사격하여 살해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27일자          

 

 

 

4. 테러의 緣網

 

 

 

          대한혁명당          

 

박광옥(22), 종로경찰서 경사, 대한학생총연맹 전무

배희범(20), 연희대 상과 3년, 대한학생총연맹 전무

최중하(19), 연희대 문과 2년, 대한학생총연맹 위원장

조  엽(21), 서울대학 문리대 2년, 대한학생총연맹 선전부장

박정덕(22), 연희대 이과 3년, 대한학생총연맹 총무부장

김  철(21), 성균관대 철정과 2년, 대한학생총연맹 조직부장

 

윤봉길 폭탄테러를 흉내내어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을 들고 종이를 가슴에 붙이고 사진을 촬영했다.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

 

민국(民國) 29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홍길동

 

      韓國反託 · 反共學生運動紀念事業會(1986), 『韓國學生建國運動史』, 495~496쪽      

 

 

 

          대한학생총연맹          

 

1947년 6월 운현궁 발족, 건국학생연맹 / 한국학생단 모체 / 통합, 최중하, 박선규, 조엽, 김철, 박정덕 등 주도세력,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임시정부 법통으로 살린다.

(2) 임정을 보호 / 육성한다.

(3) 이북의 적색 마적을 분쇄한다.

(4) 남한의 단독정부 음모를 분쇄한다.

(5) 오로지 임정봉쇄를 목적한다.

 

한독당 주석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

 

    한국반탁· 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1986), 『한국학생건국운동사』, 495~496쪽    

 

 

 

          대한보국의용단          

 

● 1946년 4월 29일 조직 결성

● 한독당 지하단체

● 테러리즘 실천, 강고한 조직

 

● 단장 = 김석황

● 참모장 = 신일준

● 노장층 : 조상항, 손종수, 송종옥, 이덕원 등

● 청년층 : 박광옥, 최인, 배희범, 조엽

 

* 장덕수 테러 : 대한혁명단, 대한학생동맹, 대한보국의용단, 한독당

 

          서울특별시 경찰국사찰과 (1955), <査察要覽>          

 

 

 

5. 공판과 판결

 

 

 

           공판 / 경과          

 

● 1948년 3월 2일 공판 개시, 과도정부 제1회의실, 미군사위원회 재판장 해럴드 대령 등 판사 4명, 검사측 = 스틸 소령, 라만 대위, 피고인 10명, 미국인 법정변호인 2명 / 한국인 변호인 3명

 

● 1948년 3월 12일(금) 제8회 공판 증인, 김구(73) 출두(약 270분 증언), (1) 국민의회와 한독당과 관계, (2) 미소공위 참가문제, (3) 살인교사 여부

 

● 1948년 3월 15일 (월) 제9회 공판, 증인진술 거부, 증인 퇴청 소동, 박광옥 난동 등

 

          <동아일보> 1948년 3월 13일 / 3월 16일자          

 

 

 

          제5회 공판 김석황 진술          

 

본인은 국민회의 동원부장이다. 중국 망명생활동안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을 1년 동안 친히 모신 일이 있다. 귀국 후 별로 가깝지 않았으며, 1947년 11월 31일 민대民代 · 국의國議 합동문제로 찾아갔었다. 장덕수를 살해한 박광옥은 모른다. 장씨 살해사건에 관해서는 1947년 7월경 신일준(피고)으로부터 민족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운데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을 죽여야 한다고 들었으나 말렸다. 그 후신은 김중묵(피고)이 적임자라 말했다. 며칠 후 김구 선생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했더니 "이 놈들은 나쁜 놈이야"라고 했다. 이때 본인은 이 말이 장덕수를 죽이라는 직접 명령은 아니나 원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신 · 김에게 말했다. 그 후 살해계획을 김구 선생께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 말했다. 본인의 주머니 속 편지는 김구씨에게 보내려한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9일자          

 

 

 

          김석황 편지          

 

1. 미군을 배경으로 임정법통을 무시하는 도배들이 무죄한 사람을 다수 체포하여 죄를 구상하려 하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소생이 숨어 다님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임정을 타도하고 선생을 모함하려는 화를 피하기 위해서···

 

2. 선생님께서 대권을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流離丐乞하며 伏願합니다.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시오. 대권은 반드시 선생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명을 받으셨으나 소생은 잡힐 이유가 만무합니다.

 

3. 이박사와 한민당 도배가 음모를 하고 있으니 선생님은 특별히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박사에게 가면 인민이 도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이 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시오···

 

          <동아일보> 1948년 1월 17일 / 3월 4일자          

 

 

 

          김석황은 누구인가          

 

● 1894년 황해 봉산 출생

● 1919년 와세다대학 재학, 동경 2 · 8독립운동 참가

● 1919년 임정, 황해도 대의원, <독립신문> 창간 참여

● 1919년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위원

● 1920년 김구 등 의용단 결성, 국내잠입, 자금조달

● 1920년 만주 봉천, 일경 체포, 압송

● 1920년 평양 복심법원, 10년 징역형

● 1925년 서대문형무소 가출옥

● 1944년 국내 광복군 첨병 활동

● 1945년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위원

● 1946년 한독당 중앙위원, 구민의회 동원부장, 대한보국의용대 대장

● 1949년 장덕수 암살 사주 공범, 무기징역형

● 1950년 6 · 25전쟁 발발, 옥사

●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제8회 공판 조상항 진술          

 

국민의회 정무회 비서실장이며,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이박사 밑에서 소란스럽게 하는 장덕수를 죽여야 한다고 말이 있을 때 辛(신일준)이 부하를 시켜서 혁명단을 조직하였다. 1947년 8월 중순경 경원여관에서 김석황으로부터 김구 선생의 지령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 말하는 가운데 좌익의 김원봉, 박헌영도 죽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9일자         

 

 

 

          결심공판          

 

● 1948년 3월 2일~4월 2일, 총 21회 공판

● 1948년 4월 2일 결심공판, (1) 박광옥 / 배희범 = 교수형, (2) 김석황, 조상환,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 교수형, (3) 조엽 / 박정덕 = 10년형

● 1948년 4월 22일 하지 중장, 감형조치, 박광옥 / 배희범 = 교수형 / 집행보류, 김석황 등 = 무기징역, (3) 조엽 / 박정덕 5년형, 서울, 대구, 대전, 부산형무소 수용

● 1949년 2월 9일 최중하 = 형 집행정지(신병), 2월 12일 조엽, 박정덕 = 일반사면 출옥, 조상덕, 손정수, 신일준, 김중목 = 감형 / 사면 출옥

● 김석황 / 박광옥 / 배희범(대전형무소), 1950년 6 · 25전쟁 / 처형, 최중하(최서면) = 일본 밀항 / 국제한국연구원

 

 

 

6. 법정에 선 김구

 

 

 

          김구 증인 출석 소환장          

 

1948년 3월 8일 제6회 공판, 12일 미대통령 명의 법정 증인 소환장, 담임검사 밀튼 로만 육군대위 발부, 교통비 일금 250원을 동봉.

 

북미합중국 대통령이 김구씨에 書翰

 

조선 서울시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개정하고 있는 미국군율재판위원회에서 귀하를 소환하오니 서력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두할 事. 미국군율재판위원회는 서울에 있는 김석황 등 소송사건을 변호하기 위하여 증인으로 지정하고 증언할 목적으로 서력 1947년 12월 16일 제24군 군사령부 郵函 1225 특령 320호 제1항에 의하여 임명되었음.

 

담임검사 육군대위 밀튼 로만

 

 

 

1948년 3월 12일 법정에 출석한 김구

 

 

 

          3월 12일 (금) 제8회 공판          

 

[검사] 작년 (1947) 8월이나 9월 중에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신일준 4명이 찾아 왔을 때 장(덕수)을 없애버리라고 말한 적은 없소?

[김구] 없소.

[검사] 물론 '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혹은 '제거하라'는 말은 쓴 일이 있소?

[김구] 없소.

▲ 검사, 앞서 4명의 진술서 낭독, 이들 4명의 공통된 진술은 (1) 김석황이 "김구 선생은 장씨를 처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다. (2) 그래서 사실 확인 차 김석황외 3명이 김구를 찾아갔더니 "장덕수, 명제세, 배은희 등은 이박사 밑에서 일하면서 미소공위에 참가한다니 모다 죽일놈들이다."라는 김구씨의 말을 듣고, 그 본심을 짐작하는 동시에 김석황의 말을 확인했다.

[검사] 김석황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일이 있소?

[김구] 허허(웃으며) 내게 무슨 권리가 있길래 그런 명령을 하겠소.

▲ 그래서 검사는 6장의 사진을 김구씨에게 보였는데 각각 청년들이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혈서가 적힌 사진이다.

[검사] 이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김구] 이런 혈서는 많소. 그것을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소.

[검사] 사진이나 혈서를 갖고 온 본인들과 면담한 일이 있소? 특히, 최중하와 조엽 두 명이 왔을 때 기억이 없소.

▲ 검사는 2명의 진술서 낭독한다. 대한혁명단 단원으로 조소앙씨로부터 계획을 들었다. 단원 선서 사진을 찍고서 김구씨를 찾아가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겠으니 맡아달라"고 청했다. 김구씨가 격려차 말하기를 "그 정신은 좋지만 조심하라. 그러한 청년은 많으나 성사를 못하더라. 학생은 공부해야 된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는 궐기해야 한다!"

[검사] 그러면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된 내용이 일치할까요?

[김구]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

[검사]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

[김구] 그것은 모 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말하지 않겠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이라 한 적이 없다."

[검사] 그러면 김석황은 선생은 가리켜 거짓말을 한 샘이요?

[김구] 그렀소, 거짓말을 아니 할 수밖에 없는 환경때문이요.

[검사] 무슨 환경으로 그랬을까요.

[김구] 그야 경찰에서 고문도 했다고 합디다.

▲ 이때 재판장은 다소 흥분된 어조로 "철저히 추궁하라" 지시.

[검사] 고문의 증거를 제시하거나 아니며 즉시 취소하시오.

[김구] 가령 모모 신문, 또 피고인의 진술 내용도 있소.

[검사] 그러면 고문했다는 확증은 없지요.

[김구] 그렀소.

 

 

 

          3월 15일 (월) 제9회 공판          

 

[검사] 지난 제8회 공판에서 증인이 말한 모략은 무엇인가?

[김구] 내가 여기에 나온 것은 國際禮儀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애국자를 자인하는 나를 죄인같이 심문함으로 나는 이후 대답을 못하겠소. 만일 나를 죄인으로 인정할 바에는 체포장을 내리시오.

[검사] 증인은 지난 금요일 모략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모략은 무엇이오.

[김구] 여러 가지 모략이 있는데 내가 말한 것은 막연한 뜻으로 한 것이오.

▲ 모략이 무엇이냐는 거듭되는 질문이 오가는 가운데 피고석의 장덕수 살해 하수인 박광옥은 "이 사건은 모략이다 등" 고함을 지르며 발악하기 시작해서 공판정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검사] 지난 금요일 선생은 "내가 日人을 죽였을 망정 동족을 죽이라 한 일은 없다!"라고 말하였는데 언제입니까?

[김구] 약 15년전 상해에 있을 때요.

[검사] 누구에게 명령했는가?

[김구] 직접 명령이지, 한 사람도 간접으로 한 것은 없소. 이봉창과 윤봉길이요.

[재판관] 그 명령을 실행했소.

[김구] 그렀소, 일본 천황을 살해하려던 이봉창은 실패하고 일본 白川 대장을 죽이려던 윤봉길은 성공했소.

[재판관] 선생은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서 장덕수씨가 애국자라 생각하시오.

[김구] 국외에서 불러왔으니 국내에서 누가 애국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하고 같이 일을 했으니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오!"

 

 

 

6. 진범은 누구?

 

 

 

          최중하(최서면) 증언          

 

처음 반탁을 지지했던 한민당이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겠다고 돌아서는 바람에 반탁전선에 분열이 일어났다. 이에 반탁 진영의 김석황 등이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한 나머지 장덕수를 제거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그가 임정계열이었기 때문에 김구 주석이 정적들로부터 모함을 받게 된 것이다.

 

          김교식 <월간경향> 1983년 2월호          

 

 

 

          박헌영의 증언          

 

소위 '임정'이란 것은 브로커 같이 행동하는 하나의 정당에 지나지 않소. 지난 25~26년간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느라고 세월을 보낸 자들이오, 현재 '임정'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들의 정책은 극도로 보수적이오. 김구씨로 말하자면 '테러 집단의 두목'이라 할 수 있겠소.

 

          <조선인민보> 1946년 3월 28일자          

 

 

 

          테러의 수괴, 김구!          

 

나(김구)를 테러의 魁首라 하였으니, 이것을 자신은 부정치 않는다. 尹 · 李 양 義士의 擧義에 있어서 김구가 사주하였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표된 것이다. 나는 조국 광복을 위하여는 이 이상의 방법이라도 취하였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          

 

 

 

          허정의 증언          

 

나는 그때 설산 암살사건의 재판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방청했고 김구 선생이 증언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구 선생을 증인 신문하는 미군 법무장교들의 질문은 매우 날카로웠고, 주로 설산 암살을 그가 직접 지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 쏠려 있었다··· 김구 선생은 법무장교의 집요한 추궁에 호통을 치기도 했다··· 결국 설산 암살의 배후는 김석황의 선에서 처형이 끝나고 그 이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설산이 암살당한 날, 조소앙 씨에게 달려가서 "왜 설산을 죽였오"하고 격렬하게 항의한 일이 있었다. 조소앙씨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십니까.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 나왔다.

 

          허정 (1979), 『내일을 위한 증언』, 144~145쪽          

 

 

 

          블랙타이거(黑犯) 김구!          

 

하지는 김구가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있다고 자신했다. 사적인 술자리에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김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리처드 로빈슨 (1987), 『미국의 배반』, 116쪽           

 

 

 

          서중석 교수 지적          

 

12월 2일 한민당의 실질적인 리더인 장덕수가 암살되었는데 범인이 체포되면서 범인의 배후에 한독당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덕수 암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때 그가 한민당을 이끌고 공동위원회에 참가하였기 때문으로 추측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그가 "중경임시정부 측의 우익 헤게모니 장악"에 장애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중석 (1991),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546쪽          

 

 

 

          어느 밀고자의 투서          

 

어째서 당국은 '진범(김구)'을 밝히지 않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밀고자는 김구의 정치적 위신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으며, 이제는 더 이상 잠재력을 가진 중요 인물이 아니라고 자신의 희망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그 밀고자는 김구가 아직도 '자유의 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신동아』 제353호, 1989년 2월호          

 

 

 

          암살의 진범은 김구!          

 

김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黨利的 意慾은 그칠 바를 모르고 1947년 12월 2일 대한보국의용단에 지령하여 당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를 살해하였다. 그 경위는 장씨가 한민당 세력을 동원하여 이승만 박사를 장차 대통령에 추대할 공작을 추진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였다.

 

          서울특별시경찰국 사찰과, <査察要覽> (1955년)          

 

 

 

https://www.youtube.com/watch?v=JdJnaNoa4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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