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구 신화

김구 신화 5. 윤봉길 의거의 슬픈 진실

드무2 2021. 8. 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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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5. 윤봉길 의거의 슬픈 진실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

 

2020년 11월 24일 방송

 

 

 

 

 

 

 

 

 

 

1. 기억의 공간들

 

 

 

 

 

 

독립기념관 윤의사 동상

 

 

 

예산군 덕산 충의사

 

 

 

1965년 1월 예산군 덕산 저한당 경내 건립된 윤봉길 의거 기념탑

 

 

 

1988년 12월 건립된 서초구 양재동 매헌기념관

 

 

 

1994년 루쉰공원(구 홍구공원)에 건립된 매헌기념관

 

 

 

1992년 4월 일본 金澤에 건립된 순국기념비

 

 

 

개요

 

◆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상해 虹口공원, 在上海 일본관민 참가, 관병식 / 천장절 / 기념운동회, 물통폭탄 투척, 사망 2명 / 중경상 8명, 세계적인 폭탄테러 사건!

 

◆ 범인, 1908년 충남 예산 출생, 조선계 일본인 윤봉길(尹奉吉 / 李南山), 4월 29일 체포, 5월 25일 상해 군법회의 사형판결, 12월 19일 일본 金澤 총살형, 세계 = 테러리스트! 한국 = 義士 / 烈士!

 

◆ 주범, 1885년 평북 의주 출생, '대일전선통일동맹' 재무주임 이유필(이춘산) / 1876년 황해도 해주 출생 상해민단장 / 한인애국단장 金九? 누가 주범?

 

 

 

1. 김학준(1992), 《매헌 윤봉길 평전》 민음사.

2. 이현희(1994), 《春山 李裕弼 연구》 동방도서.

3. 신용하(1995), 「윤봉길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 『한국학보』 제21권 제4호.

4. 국사편찬위원회(2006),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29)》

5. 매헌윤봉길전집편찬위원회편(2012), 『매헌 윤봉길 전집(제2권) - 상해의거와 순국 -』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6. 김광(2017), 『나의 친구 윤봉길』 선인.

7. 김홍일(1972), 『대륙의 분노』 문조사.

8. 홍선표(2019), 「윤봉길 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 『한국 민족운동사』 제97집.

9. 이택복(2019), 《윤봉길 평전》 동녘.

10. 이광재(2002), 「윤봉길의 상해의거와 중국 측의 역할」 『한국 민족운동사 연구』 제33집.

 

 

 

 

 

 

 

 

 

신문 및 취조 문건

번호 작성월일 문서명 생산기관 생산자 임정(30) 전집(2)
1 '32. 4. 29 제1차 신문조서 상해헌병대 분견소 大石正幸 0 0
2 '32. 4. 30 제2차 신문조서 상해헌병대 본부 大石正幸 0 0
3 '32. 5. 18 제1~7차 신문요지 상해파견군(군법회의) 原 憲治 - 0
4 '32. 5. 25 판결문 상해파견군(군법회의) 三好次太郞 0 0
5 '32. 10. 11 청취서 상해헌병대 본부 須藤貞一郞 0 0
6 '32. 8. 5~12. 26 형 집행 등 제9사단 등 植田謙吉 등 0 0

1. 국사편찬위원회 (200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0)》

2.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2012), 《매헌윤봉길전집 (2)》

 

 

 

● '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부친 윤황 / 모친 김원상, 6남 1녀 장남, 본명 禹儀 / 봉길, 아호 매헌 (梅軒), 별명 살가지(狸), 가계 = 논 20마지기, 밭 약 4마지기, 산림 약 1만 평

● '13년, 백부 윤경 / 한학 수학 (6세)

● '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 입학 (11세)

● '19년, 덕산보통학교 자퇴, 마을 서당 입학

● '21년, 오치서숙 입학 / 梅谷 성주록 선생 문하생, 동아일보 / 개벽 등 구독, 漢詩짓기 (14세)

● '22년, 詩會 장원, 배용순 혼례

● '25년, <鳴椎> 등 4권 한시집 (약 300수) 발간

● '26년, 오치서숙 수료, 농촌계몽 / 부흥운동

● '27년, <農民讀本> 1~3권 저술 / 배포 (20세)

 

 

 

 

 

 

 

시량리가

 

1. 조화신공(造化神功) 가야산의 정기를 받고

   절승경개(絶勝景槪) 수덕산의 정기를 모아

   금수강산 삼천리 무궁화원에

   길이길이 빛을 내는 우리 시량리

 

2. 가야산은 우리의 배경이 되고

   온천들은 우리의 무대장(舞臺場)이라

   두 팔 걷고 두 발 벗고 출연하여서

   어서 바삐 자작자급 실현을 하자

 

3. 암흑동천(暗黑東天) 계명성(啓明星)이 돌아오나니

   약육강식 잔인성을 내어 버리고

   상조상애(相助相愛) 넉 자를 철안(鐵案) 삼아서

   굳세게 단결하자 우리 시량리

 

 

 

《農民讀本》 제3권 일부 내용

 

 

 

● '28년, <爲親契>, <月進會>, <수암체육회> 결성

● '30년, 3 / 6 부친 40원 횡령, '丈夫出家生不還' 유서, 3 / 7 평북 선천 검속 / 구류 (15일), 4월 상순 靑島 도착, 일본인 中原세탁소 취직

● '31년, 5월 상해 도착, 종품공장 취직, 미국 유학 / 영어학원 야습, 7월 한국독립당 가맹 (이유필 추천)

● '32년, 3월 虹口시장 밀가루 소매상

● '32년, 4 / 15 테러 공모 회합

● '32년, 4 / 26 한인애국단 입단

● '32년, 4 / 29 홍구공원 폭탄 테러 / 체포

● '32년, 5 / 25 상해군법회의 사형판결

● '32년, 11 / 20 大阪위수형무소 이감

● '32년, 12 / 29 일본 金澤 총살형

 

 

 

4. 剛毅한 사랑의 테러

 

 

 

1930년대 동양의 파리 상하이

 

 

 

1932년 제1차 상해사변과 국민당 제19로군

 

 

 

● 4 / 15, 茶館 회합, 4 / 20 회합, 虹口공원 테러 결의, 테러 자금 90불 수령

● 4 / 24, 虹口공원 / 勅諭 50주년 기념식 관람

● 4 / 26, 안공근 집,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서명

● 4 / 27, 안공근 집, 사진 촬영 3매, 홍구공원 관병식 연습관람, 동방공우 숙박, 이력서 / 감상문 작성

● 4 / 28, 동방공우 숙박, 홍구공원 관병식 예행 예습 관람, 白川 등 참석자 사진 / 일장기 구매

● 4 / 29, 6시 기상 / 김해산 집 조직, 폭탄 2개 수령, 7시 50분 홍구공원 입장, 식장 왼쪽 뒤편 19미터 지점

● 4 / 29, 관병식 10시 30분~11시 20분, 천장절 기념식 시작 / 기미가요 합창 / 降雨

● 4 / 29 11시 40분 4~5미터 전진, 물통폭탄 투척, 구타 / 체포 / 신문

● 4 / 29, 상해헌병파견대 1차 신문, 공모자 이유필

● 4 / 30, 상해헌병대 본부 2차 신문, 공모자 이유필

● 5 / 2, 예심조사

● 5 / 4, 상해군법회의 심리

● 5 / 25, 상해군법회의 사형판결 (살인 / 살인미수 등)

● 11 / 18, 상해항 출항

● 11 / 20, 神戶항 도착, 大阪 위수형무소 이감

● 12 / 15, 제9사단 군법회의 사형 집행 명령

● 12 / 17, 金澤 헌병대장 사형집행 명령서 수령

● 12 / 18, 金澤 위수형무소 이감

● 12 / 19, 오전 7시 15분 사형집행 시작

● 12 / 19, 7시 27분 정사수 제1발 미간 명중

● 12 / 19, 7시 40분 군의관 사망 확인 / 사형집행 종료

● 12 / 19, 10시 30분 공동묘지 매장 / 완료

 

 

 

청취서 ('32. 10. 11)

 

[문] 피고인은 4월 29일 관병식장에 폭탄을 투척하기 이전에 유서를 쓴 일이 있는가. 상황을 상세히 말하라.

[답] 4월 27일 오후 1시경 상해 신공원의 관병식장을 미리 조사하고 돌아와서 오후 6시 30분 경 김구가 동방공우를 찾아와서 "이것이 너의 최후이니 경력과 감상을 써라"고 해서 나는 평상시 수첩에 써서 그 수첩을 김구에게 넘겼습니다.

 

[문] 유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답] 이력서와 '시량리歌' 그리고 나의 자식과 조선 청년에 대한 감상을 썼습니다. 끝으로 4월 27일 상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조사하러 갔을 때 "내가 밟은 잔디가 그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 다시 일어서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도 또한 강한 자로부터 유린되었을 때 이 잔디와 하등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단히 슬픈 감정이 샘솟았습니다." 그 감정을 유서로 썼습니다.

 

 

 

 

 

 

살가지 / 狸 = 삵 / 살쾡이

 

 

 

1932년 4월 27일 유서

 

 

 

1932년 4월 27일 유서

 

 

 

 

 

 

 

 

 

 

 

 

 

 

 

 

테러 사상자

성명 직책 상해
村井倉松 주상해총영사 중상
植田謙吉 제9사단장 우측다리 절단
白川義則 상해파견군사령관 사망
野村吉三郞 제3함대사령관 왼쪽 눈 실명
重光 蔡 주중대리 공사 우측다리 절단
河端貞次 상해거류민단장 사망
伴野 盛 상해거류민단서기장 중상
헌병하사관 1명 경상
일반 병 2명 경상

 

 

 

 

 

 

 

 

 

 

1932년 5월 3일 촬영 윤봉길 가족

 

 

 

제1회 신문조서 (1932. 4. 29)

 

[문] 그 수류탄은 어디서 입수했는가?

[답] 조선인 이춘산으로부터 27일(?) 오후 7시경 수통형 1개, 도시락형 1개 모두 2개를 받았습니다.

 

[문] 李春山과 피고인과의 관계는?

[답] 1932년 7월 이춘산과는 상해 서해로의 찻집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李는 자기도 독립당원이라며 입당을 권유하므로 나는 자진하여 李의 소개로 독립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 후는 매월 2~3회 이와 조선독립운동을 이야기했습니다.

 

[문] 李의 현주소, 성명, 연령, 직업, 인상, 복장은 어떠한가?

[답] 李는 현주소, 직업 등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서로 주소, 직업을 알면 곧 영사관에 잡힐까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성명만 이춘산이라고 말하였다. 신장은 5척 7~8촌 가량 중간 키에 두발은 3~4촌 가량 기르고··· 따로 특징 등은 모릅니다.

 

[문] 본 사건을 계획한 시기와 동기는 어떠한가?

[답] 지금부터 20일 전에 찻집에서 협의하였습니다. 그 동기는 조선인 일본에 병탄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이 참기 어려운 고통이라 독립을 도모하려고 결행하였습니다.

 

[문] 李로부터 수류탄을 받기 이전에 아무 것도 받지 않았는가?

[답] 지금으로부터 10일 가량 전에 이춘산으로부터 찻집에서 중국은 200불(?)을 5원 지폐 40매를 받았습니다.

 

[문] 그것은 어떤 의미의 돈인가?

[답] 본 사건의 준비비유흥비로 받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 그 돈은 지금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

[답] 그 후 '오버'와 구두를 사고 기타 음식값으로 사용하고 지금 5불 가량 가지고 있습니다.

 

 

 

제2회 신문조서 (1932. 4. 30)

 

[문] 白川대장 등을 살해하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답]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황색인이면서도 일본이 세력이 있다고 해서 조선을 병탄하고···

 

[문] 피고는 이렇게 하는 일이 목적이라고 말하나, 그렇다면 금후에도 이 같은 행위를 속행할 생각인가?

[답] 금후는 이러한 일을 할 생각은 없다.

 

[문] 이번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고 있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그러면 4월 24일 칙유 50주년기념식 때 이미 천장절날 관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답] 알고 있었습니다. 이춘산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문] 피고인은 어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상해에 온 이래 매월 2회 내지 3회 가량 이춘산과 회담하였다고 말했는데 그 때의 회담 개요는 어떠한가?

[답] 그것은 지금 잘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번 한 것과 같은 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문] 그러면 어제 저지른 사건 이전에 또 달리 계획하고 있었던 일이 있느냐?

[답] 그러한 계획은 달리 없었습니다. (?)

 

[문] 피고인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을 분개한다고 말했는데 어떤 점을 분개하고 있는가? 특히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차별 취급이라도 하는 일이 있었는가?

[답] 차별 취급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일본인과 그 다지 접촉한 일이 없으므로 모릅니다. 오히려 당신 쪽이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요컨대, 자기의 것이 타인 권한 내로 들어간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쾌하리라 생각합니다.

 

 

 

신문조서 요약

(제1회~제7회)

 

[문] 무직인 로부터 200불을 받았을 때, 돈의 출처는 어디라고 생각했는가?

[답] 작년 11~12월 신문을 보고 미주와 하와이 조선 동포로부터 상해 한국독립당 앞으로 돈을 보내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서 이 돈도 그러한 종류일 것이라 생각했다.

 

[문] 피고인이 (1931년 5월 중순) 민단사무소에서 면회한 직원은 누구인가?

[답] 단장인 김구, 이동우와 마침 그 곳에 있던 이유필을 만났다.

 

[문] 피고인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답] 안창호, 김동우 (노종균), 김구, 이유필, 이동녕, 조소앙, 이춘산 등이다.

 

[문] 피고인은 白川 등 살해를 명령하고 폭탄과 돈을 준 것은 이춘산이라 진술했는데 그 말도 거짓은 아닌가?

[답] 이춘산으로부터 폭탄과 돈을 받고 白川 대장 일행을 살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은 거짓말이다. 이춘산이라 말한 것은 사실은 김구였고,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이춘산이라 엉겁결에 말이 나와 버렸기 때문에 그 후 계속해서 이춘산이라 이야기했다. 이춘산이유필의 호이다.

 

[문] 그러면 김구의 인상은 어떠한가?

[답] 김구 신장은 5척 8촌, 두발은 상고머리, 수염을 길렀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한 눈에 봐도 김구라 알 수 있는 것은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다. 나이는 55~56세라 생각한다.

 

[문] 피고인은 어떤 종류의 서적을 즐겨 읽었는가?

[답] 고향의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자치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이다. 위인 전기를 읽고 싶었지만, 조선 문학 중에는 없어서 읽은 적이 없다.

 

[문] 피고인은 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는가?

[답] 17~18세 때 신문과 책 등을 보고 조선에 일본인이 와서 조선을 통치하는 것은 왜일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조선에는 조선 고유의 언어와 문자와 풍속 병합되어 있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신문을 보고 상해에 한국독립운동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도 한국독립을 위해 활동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상해로 오게 된 것이다.

 

[문] 피고인의 행위는 독립운동의 의미에서 말하자면 효과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물론 한 두 명의 상급 군인을 죽여서 독립이 쉽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조선의 각성을 촉구하고 더 나아가 세계 사람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명료하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조선이라는 관념을 세계 사람들의 머리에 새겨두는 것도 독립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문] 피고인은 어떻게 김구로부터 白川 대장을 살해하도록 명령받았는가?

[답] 올해 3월 종품공사를 해고당하고, 밀가루 장사(?)를 시작햇는데, 虹口에 매일 가기 때문에··· 4월 초순··· 노상에서 우연히 김구를 만났으므로 (?) 내가 인사를 했다. 김구는 나에게 공장을 그만두고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물었기 때문에 虹口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虹口에 있는가 라고 물어서 가게만 내고 프랑스 조계 계춘건의 집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구는 虹口에 가게 되어 기분이 어떤가(?)하고 물어서, 나는 虹口에서 장사는 하고 있지만, 원래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상해에 왔기 때문에 虹口에 가도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하자, 그러자 너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가까운 시일 안에 통지할테니 그때는 와 달라고 말하고 그곳을 헤어졌다.

 

"독립 운동을 단념하지는 않았는가?"

혹시 왜놈 밀정질! 김구의 위협과 협박!?

 

 

 

"虹口公園炸彈案의 眞相"

(5월 9일 김구 투고 기사, 중국 및 외국 신문 게재)

 

1) 계획과 실행 => 1월 8일 이봉창 동경 / 천황 습격 사주, 4월 29일 윤봉길 虹口공원 폭탄테러 명령 / 파견, 폭탄 2개

 

2) 윤봉길은 누구 => 충남 예산 / 빈핍한 가정, 가족관계, 아주 영리한 怪童, 청도 / 상해생활, 虹口시장 채소가게 점원(?)!

 

3) 한인애국단이란 => 비밀 사조직 / 훈련된 인간 = 애국 폭력단체, 중요 인물 암살, 집정기관 파괴, 조국 독립 회복!

 

4)나는 누구 => 우리 황후 살해 / 국모보수, 弑逆 범인 土田대위 살해, 인천 감옥 투옥 / 탈옥, 승려생활, 1909년 안중근 사건 투옥, 1911년 총독 암살 사건 / 15년 징역형, 1919년 상해 탈출 / 독립운동, 나의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

 

 

 

6. 폭살의 추억

 

 

 

● 어느 날, 동포 박진의 종품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는 윤봉길 군이 홍구시장 채소장사(???)를 하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 인즉,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를 울리며 천화영웅 윤봉길을 싣고 虹口公園을 질주하였다. 그 길로 조상섭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에게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냈다.(???)

 

● 채소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虹口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나 이외에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였을 뿐이고, 그 날의 거사는 나 혼자 알고 있었다.(???)

 

● 나는 즉시 서문로의 왕웅(김홍일) 군을 방문하고 상해 병공창장 송식표에게 교섭하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어깨에 메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서 보낼 터이니, 속에 폭탄을 장치하여 3일 이내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강남조선소를 찾아갔다. 그곳 내부에는 일부분 병공창이 있는데,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아서 대포나 소총 등을 수리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듯했다. 기사 왕백수의 영도하에 물통과 도시락, 두 종류의 폭탄을 시험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 상해 병공창에서 이 같이 친절하게 폭탄을 무료로 제고하여 주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봉창 의사가 은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창장은 자기네가 빌려 주었던 폭탄의 능력이 미약하여 일본 황제를 폭살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김구가 다시 요구한다고 하니 성심으로 제조해 주는 것이었다.

 

● 날마다 왜놈들이 미친개와 같이 사람을 잡으려고 돌아다녀 우리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한 것도 없고, 심지어 부녀단체까지도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포들 사이에서 나를 비판하는 소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 "이번 홍구사변의 주모책임자는 따로 있으면서, 자기가 사건을 감추고서 관계가 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이유필(이춘산) 등 일부 인사들의 말이다.(???) 나의 편지를 보고도··· 이씨 집을 찾아갔던 안창호 선생이 체포된 것은 그의 불찰(?)이나, 주모자가 아무 발표가 없는 관계로 사람들이 함부로 체포된다는 원성(???)이 있었다.

 

● 나는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여러 동지들에게 주장했다. 안공근은 펄쩍 뛰면서 "발표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합니다"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는 엄항섭에게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하였다.

 

 

 

7. 충격과 반향

 

 

 

 

 

 

 

 

 

 

 

 

《윤치호 일기》

 

안창호는 상해에서 체포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상해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 행사에서 단상에 앉아 잇거나 서있던 일본의 고위층 인사들을 향해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수류탄을 던졌다. 만약 안창호가 그 비열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면, 그로 인해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가 이런 일을 할 만큼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1932년 5월 30일자>

 

 

 

학계의 거짓말 잔치!

 

● 장개석,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 한국청년이 해내었다!" 독립운동사의 이정표, 영원불멸의 업적! (신용하, 1995)

 

● 장개석,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 "테러가 아닌 의열투쟁! 일본군 관내 확전 단념! 정전협정 서둘렀다! (이광재, 2002 / 김준영, 1988 / 王明飛, 2010 등)

 

● 《장개석 일기》 "일본이 조선의 원한을 사서 생긴 일, 무력 남용 일본의 자중, 반성의 계기되었으면··· 하지만 아마도 희망사항에 불과! 일본 침략행위 비판, 윤봉길 테러 = 지지 / 찬양하지 않았다!!!

 

 

 

장개석 지원과 의도

(1933년 5월 南京 장개석 공관, 김구 면담)

 

● 김구 제안, "국민당 100만 원 지원 / 2년 이내 일본, 조선, 만주 대규모 폭동 / 다수의 교량 폭파!"

 

● 장개석 답변, "특무공작 = 천황 / 대장 테러, 또 다른 천황 ? 대장 등장! 장래 조선 독립 = 武人 양성해야!"

 

● 장개석 / 국민당 = 장기항전 전략! 폭탄테러 = 충격 / 당혹, 정전협정 = 돌발변수, 냉소적 / 부정적 반응!!!

 

● 김구 = 중앙군관학교 한인특별반 / 긴원봉 = 南京 조선혁명간부학교 인가 / 지원, 한인군관 양성 = 동북의용군 동원, 한인테러집단 통제 / 장기항전 용병 활용

 

 

 

● 상해에서 중대사건이 발생한 것을 알고··· 우리는 물질상으로 만이 아니라 여타 방면에서도 중국 측으로부터 많은 편의를 제공받았다. 중국의 유명인사인 은주부, 주경란, 사랑교 등의 면회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야간에 자동차를 타고 홍구 방면과 정안사로 방면으로 돌아다녔다.

 

● '만보산 사건'이 터졌다. 이를 기화로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에 대한 감정이 폭발하여 조선 곳곳에서 한인 무뢰배들이 총원되어 그들을 만나는 대로 때려 죽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4. 29 사건으로 중국인들의 한인들에 대한 감정은 놀랄만큼 호전되었다. (???)

 

● 이 거사로 인하여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한인 교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원이 대단하였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나에 대한 후원은 급격히 증가하여··· 그러나 관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낙관적이라기보다도 비관적인 편이 많았다.

 

 

 

 

중국측 자금지원

(달러)

연월 교부자 금액 수령자 적요
'32 / 5, 초 상해시상회 5,000 김철 / 조소앙 안창호, 윤봉길 가족 구휼비 명목, 횡령착복 의혹
'32 / 5, 중 朱慶瀾 13,000 최동오 외 4명  
'32 / 5, 중 朱慶瀾 2,000 박남파 안공근 ㅡ> 김구
'32 / 5, 하 朱慶瀾 1,000 박남파 한국독립당 교부금 명목 이유필 / 박남파 쟁탈권
'32 / ???? 19路軍 10,000 王雄 (김홍일) 안공근 ㅡ> 김구, 윤봉길 가족 구휼비
'32 / ???? 朱齊靑  ? 주해공 (한국혁명당)
'32 / 6, 초 東北災民 救濟會 5,000 상해 한인 교민단
'32 / 10, 초 禇輔成 5,000 안공근 교부 승낙, 수취 미확인

 

 

 

국내외 언론

 

● 구미 언론 : 상해 폭탄투척 테러! 상해폭탄 만행! 상해폭거! 반인륜적 만행, 윤봉길 = 테러리스트! 1914년 이래 가장 충격적인 정치테러!

 

● 중국 언론 : 소극적 / 신중함, 지극히 불행한 사건 / 유감 표명, 사실관계 보도 치중, 국민당 = 일본 / 국제연맹사과 성명서, 4월 30일 상해사변 정전협정 예정 = 불발 / 연기 / 관내 확전 우려!

 

● 국내언론 : <동아일보> 29 / 30일 호외 발행, 주범 = 조선인 윤봉길! 정전협정 전망 / 국제연맹 반응, 주관적 논평 배제, 5월 1일 <동아 / 조선일보> 1면 톱 = 공범 이유필, 안창호 체포, 윤봉길 / 가족사진 게재

 

 

 

8. 주범은 누구?

 

 

 

 

 

 

도산 안창호 체포

 

● 4 / 29, 윤봉길 진술 / 주범 이춘산 = 이유필 단정 / 수사 착수 / 프랑스공부국 협조 / 오후 5~6시경 안창호 체포, "나는 중국인이다!" 중국 여권 제시 / 假政府 대단한 거물!

 

● 중국 정부와 법조계의 안창호 석방요구, '民國 12년 7월 중국 정부 발행 귀화증 소지, 그러나 조선 국적 무이탈 = 당연히 조선인! "일본 신민의 신분을 상실한 자가 아니다!"

 

● 1914년 흥사단 조직, 1919년 5월 임정 내무총장, 務實力行 / 실력양성주의 독립운동 = 교육 / 경제력, 1931년 11월 중국측 4불 지원 = '대일전선 통일동맹' 결성 = 상해 한인 사회 지도자!!!

 

● 안창호 취조 / 신문, 윤봉길 폭탄 테러와 무관, '32 / 6 / 7 신의주 압송, 5년 징역형, 1937 / 6 수양동우리 사건 = 서대문형무소 재수감, 병 보석 치료 (윤치호 / 김성수), 1938 / 3 사망

 

 

 

春山 이유필은 누구?

 

● 1885년 평북 의주 출생

●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 신민회 회원 / 105인 사건 / 유배형 1년 / 1919년 3.1운동

● 1919년 상해 망명, 임정 내무총장, 1931년 상해교민 단장

● 1922년 한국노명회 회장, 한독당 이사, 상해신문 사장

● 1932년 '대일전선통일동맹' 재무주임, 흥사단 단우!

● 1933년 3월 체포 / 3년 징역형, 1936년 3월 만기 출소

 

항주 임정 (1932~35년) 국무회의, 이춘산 국무위원 파면!

 

 

 

5월 9일 이유필 호소문

 

● 수신 : 재중 프랑스 공사 앙리 A. 윌덴 / 급진사회당 헤리오

● 발신 : 한인교민단장 이유피

 

4월 29일 발생한 홍구공원 폭탄사건 이후, 상해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인 보호 정책을 위배하고 귀국의 정치 망명자 보호 전통을 깨뜨리며, 비합법적으로 40년 동안 독립운동자였던 안창호를 포함한 한국인 12명을 체포, 일본 경찰에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귀하가 다시 우리를 보호해 주는 문제를 귀 정부와 논의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1. 김구 "주모자 미발표 때문에 한인들 체포되고 있다" 그러나 4월 29일 폭탄테러 발발 이래 이유필 체포 혈안!

 

2. 김구, "이유필이 불만을 제기했다", 5월 9일 김구 = 로이터 통신 = 테러 주범! 서로 다른 피신 / 대응, 김구 거짓말!!!

 

 

 

테러 협력자들

 

● 안공근 (1889~1939), 큰 형 안중근 (1879~1910), 작은 형 안정근 (1884~1949), 1919년 진남포보통학교 교사, 1919년 안창호 권유 / 상해임정, 1920년 모스크바 대사, 1921년 의정원 의원, 1926년 상해교민단 단장, 1932년 한독당 / 한인애국당 재무담당, 이봉창 / 윤봉길 테러 기획 / 공모, 1937년 김구 / 한독당 결별 / 대항, 1939년 5월 상해 실종 / 암살 (김구)

 

● 왕웅 / 王雄 (1898~1980), 김홍일, 평북 용천 출생, 오산학교 졸업, 1920년 강무당 졸업 / 국민혁명군 장교 임관, 1926년 국민혁명군 북벌 참전, 1927년 제22사단 연대장, 1932년 제19로군 후방 정보국장, 상해 병공창 주임, 이봉창 / 윤봉길 테러, 폭탄 제작 / 지원

 

 

 

김홍일 (1972), 《대륙의 분노》

 

● 제19로군 후방 정보국장 / 상해 병공창 주임, 일본 군사 정보 수집 / 군사시설 파괴공작, 2월 12일 홍구항 일본해군 함선 出雲號 폭파 작전 실행 = 실패!

 

● 이후, 홍구항 군수창고 폭파공작 / 김구 협의, 윤봉길 하수인, 도시락 / 물통폭탄, 각 10개 구매 / 시한폭탄 제작 / 실험, 그러나 停戰 성립 / 폭파 공작 무산!

 

● 낙담한 윤봉길 / 29일 천장절 폭살계획 제안, 28일 예행연습 관람, 제1탄 투척 / 제2탄 자폭, 테러범 = 중국인 = 중일전쟁 도화선!, 29일 상해군사령부 = 범인 중국인 = 일본군 남경 진격 발표 (!?), "한민족의 기개를 온 천하에 드높인 사건!" 김구 존재는 없다!

 

 

 

 

 

 

1934 / 12, 李圭彩 신문조서

在上海 일본 총영사관 경부보 藤井忠夫

 

[문] 朴南坡 (박찬익)는 金九의 股肱이다. 朴南坡를 방문한 것은 金九파 후원으로 중국측의 자금을 인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답] 그랬는지도 모른다. 金九는 尹奉吉을 먹이로 삼은 사람이다··· 朴은 중국 요인과의 교제도 넓어서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 득책이다. 우리는 金九 무리를 혁명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답] 金九와 朴南坡는 서로의 혁명운동을 위해 활약했는데, 金九가 중국 측에서 신용을 얻게 된 것은 朴南坡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金九는 朴南坡 때문에 지위를 얻었으면서 朴을 부하처럼 대우하고··· 그것에 분개하여 서로 다투게 되었다.

 

[문] 朴南坡는 金九파에게 암살되었다고 들었다는데··· 어떤가?

[답] 그런 풍문이 있다. 쌍방이 항쟁상태였다.

 

 

 

김광 회고

 

● 본명 고영희, 성도사범 졸업,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 활동

● 윤의사와 전체 직공들이 공임을 내리는 방안을 철폐하라고 주장··· 혁명의 우두머리 안창호 선생과 한국교민단장 이춘산 선생이··· 윤의사와 서씨 그리고 공장주를 청하여 전후 사정을 물었다··· 이춘산 선생의 해석과 조정 아래···

4월 중순 어느 날 윤의사는 애국단장 김구 선생을 만나 시국에 대응한 활동계획을 의논하였다. 김구 선생은 원래 윤의사의 미래에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일본의 수뇌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윤의사의 계획을 듣고, 고개를 숙여 묵묵히 사색한 다음 참 좋은 계획이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의 결행을 위임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여러 의문들!

 

● 윤봉길 제1~2차 진술, 주범 = 이유필! 종래 해석 = 김구 도피 시간 벌기 / 교란 전술 = 김구 주도설 지지! 안창호 / 이유필과 관계, 공모 = 일정 부분 사실!

 

● 5 / 9 김구 성명서 발표 = 안공근 반대, 임정 내분 / 갈등 우려, 비밀 거사 = 4월 26일 임정 보고, 안창호가 몰랐다 = 안창호 자신의 불찰! 사건 이후 김구 일파 = 안창호 / 이유필 모략 = 사죄 성명서 발표!

 

● 1931년말 이래 안창호 세력 =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 중국측 거액 지원, 김구 일파 = 정치적 경쟁자 안창호 세력 모략 / 제거! 해외동포 / 중국 측 지원 독식 = 백범의 임정체제 완성!

 

 

 

1932년 이후 빈발하는 암살 테러

회차 년월 행위자 장소 대상 흉기 결과
1 1932. 1 이봉창 동경 천황 폭탄 미수 / 검거
2 1932. 4 윤봉길 상해 군수뇌부 폭탄 성공 / 검거
3 1932. 4 이덕주 등 경성 총독 권총 미수 / 검거
4 1932. 5 최흥식 등 대련 만철총재 등 폭탄 / 권총 미수 / 검거
5 1933. 1 오면직 상해 옥관빈 권총 성공 / 미검
6 1933. 3 백정기 등 상해 有吉공사 폭탄 / 권총 미수 / 검거
7 1933. 12 상해 옥성빈 권총 성공 / 미검
8 1935. 3 엄순봉 등 상해 이용로 권총 성공 / 검거
9 1935. 11 김창근 상해 이태서 권총 성공 / 미검

 

 

 

윤봉길 거짓말

 

1. 중국 망명 여비 40원 원천은? 월진회 공금 차용! 그러나 사실은 부친 자금 횡령!

 

2. 공모 및 사주자는 누구? 제1~2회 취조 신문 = 이유필! 5월 11일 제4회 취조 신문 = 김구! 안창호 체포!

 

3. 테러 자금은 얼마? 제1회 취조 신문 = 200불! 5월 25일 판결문 = 90불

 

등등

 

 

 

https://www.youtube.com/watch?v=ZEf2GUqp6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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