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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6. 상하이의 거상, 옥관빈 암살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0년 12월 7일 방송
김구의 신화 (6)
상하이의 거상, 옥관빈 암살
- 만들어진 밀정의 비장한 생애 -
2020. 12. 7 (월)
정안기
1. 개요 및 배경
개요
◆ 1933년 8월 1일 오후 9시경 상해 프랑스 조계, 살인 사건 발생, 피살자는 안장호 계열 상하이 한인 거상 / 국민당 상해시 유력자 옥관빈 (향년 43세)
◆ 살인범은 '南華韓人靑年同盟' 조직원 겸 '韓人除奸團' 조직원 오면직 (양여주)과 엄형순
◆ 살인청부범은 '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별동대 '南華韓人靑年同盟' 맹주 겸 '韓人除奸團' 단장 정화암
◆ 살인청부의뢰범은 한국독립당 재무장겸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상하이의 한인 巨商, 옥관빈
1932년 말 임시정부계와 흥사단
◆ 臨時政府系가 종래 이동녕, 김구, 조소앙, 이시영 등 無職浮浪의 徒輩에 의해 대표되고 衣食은 僑民들의 원조에 俟하는 상태이다. 반면 興士團은 상당한 자산과 각자 生業從事해서 遠東委員部는 미국은행에 약 2만 불 적립금을 갖고 있다.
◆ 지난 韓人靑年黨 기관지 「醒鐘」 창간호는 安昌浩에 대해 (被逮捕 以前) 揶喩的 言辭를 配한 만화를 게재하여 興士團系 한인들을 激怒시키었던 바 집필자 한인청년당 이사장 金哲의 사죄 성명에 依해 겨우 낙착된 바 있다.
◆ 1932년 5월 21일 <時事新報>에 "안창호는 이미 非革命的 境地에 顚落한 者로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통솔하는 단체 (흥사단)에는 많은 親日的 走狗가 혼입하였다. 4월 29일 爆彈事件 당일 안창호는 그 사실을 不知하고 漫然히 배회하다가 逮捕된 것"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 해당기사는 安昌浩를 독립운동자가 아니라고 諷刺한 것으로 安昌浩에 대한 中國其他 각 방면의 同情을 저지하고 其명예를 毁損하는 것이다. 조금도 그의 被逮捕에 동정도 없이 오히려 興士團의 潰滅을 환호하는 것 같다.
◆ 興士團側은 해당기사가 앞서 만화 문제와 같이 한인청년당 이사장 金哲의 투서에 依한 것이라 해서 甚히 感情을 해치고 있다. "實力이 수반되지 않는 臨時政府系의 兇暴行爲는 추호도 우리들의 진정한 韓國獨立運動에 공헌하는 바 없다"며 분개하는 모양이다.
◆ 要컨대 興士團의 實力養成 漸進主義에 불만을 품은 臨時政府系와 이들의 兇暴猪突主義를 혐오하는 興士團系와는 앞서 투서 문제를 계기로 가일층 溝渠를 깊게 한 모양이다. 해당 투서 문제를 다음과 같이 관찰한 자가 있다.
◆ 신공원 폭탄사건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哀心으로 快哉를 부르게 한 것은 事實이다. 사건과 관련해서 安昌浩가 체포되었으므로 일반 중국인들로서는 安昌浩를 革命志士로 칭찬하고 동정하는 자가 많다. 그래서 義損金 등도 安昌浩의 興士團系에 모여드는 形勢이다.
◆ 그래서 金九는 李奉昌과 尹奉吉 양 사건 모두 자신이 計劃해서 실행시킨 것이라 발표했고, 더욱이 금번 金晢을 시켜 投書하게 한 것이라 한다. 더욱이 金晢의 투서는 嚴恒燮이 사주한 것이라 간주해서 興士團側에서는 김절과 엄항섭을 打倒하겠다고 격앙된 모양이다.
◆ 이후 이들은 행방을 감추었는데 엄항섭은 抗州로 도피하였다. 興士團에서는 安昌浩 被逮捕 이후 결속을 다지고, 쇠퇴를 방지하고자 6월 18일 佛租界內 사무소에서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安昌浩 재산은 安의 판결이 잇을 때까지 遠東委員部에서 보관할 것"을 결의하였다.
1934년 한국독립당 동향
◆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上海 민족파 重鎭 興士團長 安昌浩가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석 李東寧과 절충을 거듭해서 민족파 진영의 쇄신과 종래 지방적 감정의 청산 그리고 재외 독립투쟁전선의 통일을 기하고자 金九, 李東寧, 趙琬九, 玉觀彬 등 28명의 동의를 얻어서 1월 25일 결당식을 올렸다.
◆ 1933년 3월 9일 총무이사 李裕弼이 체포되면서 같은 해 10월 12일 총무부원 李秀峰이 체포되었다. 이사장 宋秉祚와 이사 朴昌世는 같은 해 8월 발생한 玉觀彬과 石鉉九 등 암살사건과 관련한 수사를 피해서 抗州 방면으로 도피하였다.
◆ 기타 당원 가운데 이사 崔錫淳은 사천성으로 피신하고, 이사 金枓奉은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상무위원으로 南京에 潛居한다. 金鉉九, 安恭根, 安敬根, 金東宇 등은 모두 金九를 따라서 抗州와 南京 방면으로 행방을 감추었다.
◆ 금년 (1934년) 다시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으며, 3월 3일 康秉學을 사주하여 上海神社 경내에서 招魂祭 식장에 電燈型 폭탄을 투척하는 등··· 9월 1일 '討崔麟書'의 인쇄물을 작성해서 천도교 간부 崔麟이 中樞院 參議에 취임한 것은 적에게 투항한 것이라는 성토문을 우송하였다.
◆ 금년도 한국독립당 활동은 약간 주목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사장 宋秉祚는 臨時政府 財務長으로 재미동포 및 南洋 僑胞들이 보내온 기부금을 매월 수천 원씩 취급하고 있다.
◆ 언제나 그는 기부금의 상당액을 개인적으로 소비하고, 다른 간부들에게는 매달 겨우 20원 안팎을 지급함에 불과한 것이 폭로 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內訌이 발생하였다. 최근 宋秉祚는 抗州에서 鎭江 방면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2. 연구와 자료
1. 김창숙 (1973), 『심산유고』 제5권, 국사편찬위원회.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 자료집 (11) - 의열투쟁사 -』.
3. 정화암 (1982), 『이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 나의 회고록 -』 자유문고.
4. 이정식 편 (1988),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5. 정화암 (1992),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6. 김광재 (2011),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 제59집.
7. 김광재 (2012), 「상해시기 옥관빈의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제63집.
8. 윤경로 (2012), 「105인 사건 피의자들의 사건 이후 행적에 관한 소고」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36집.
9. 이재석 외 지음 (2020), 『밀정, 우리 안의 적』 지식너머.
암살의 시대
◆ 최근 上海에서 불령선인 테러사건 빈발, 1932년 李奉昌 不敬 사건 아래 급격히 증가, 4월 尹奉吉의 上海 폭탄사건, 5월 崔興植과 柳相根의 국제연맹 릿튼조사단 암살미수 사건 등 중대 사건 속출!
◆ 이들 사건의 범인은 전부 검거, 1933년 8월 1일 친일파 조선인 玉觀彬 암살사건 발생, 8월 17일 일본 측 밀정 石鉉九의 암살사건, 8월 31일 朝鮮人親友會長 柳寅發 암살미수 사건발생!
◆ 1933년 12월 18일 프랑스 工部局 형사 玉成彬 암살사건 발생, 9월 8일 유인발 암살 미수사건 범인 金益星 검거, 1935년 3월 25일 조선인 거류민회 고문 李容魯 암살사건 발생, 11월 7일 일본 측 밀정 李泰瑞 암살사건 발생!
년월 | 피살자 | 살인범 | 사주범 | 장소 | 흉기 | 결과 | |
1 | '32. 1 | 천황 | 이봉창 | 김구 | 동경 | 폭탄 | 미수 / 검거 |
2 | '32. 4 | 일군 수뇌 | 윤봉길 | 김구 | 상해 | 폭탄 | 성공 / 검거 |
3 | '32. 4 | 총독 | 이덕주 / 유진만 | 김구 | 경성 | 권총 | 미수 / 검거 |
4 | '32. 5 | 만철 총재 | 최흥식 / 유상근 | 김구 | 대련 | 폭탄 / 권총 | 미수 / 검거 |
5 | '33. 1 | 옥관빈 | 오면직 / 엄형순 | 김구 | 상해 | 권총 | 성공 / 미검 |
6 | '33. 3 | 有吉공사 | 오면식 / 백정기 / 원심창 / 이강훈 | 김구 | 상해 | 폭탄 / 권총 | 미수 / 검거 |
7 | '33. 8 | 석현구 | 이은로 / 이운환 | 박창세 | 상해 | 권총 | 성공 / 미수 |
8 | '33. 8 | 유인발 | 김익성 | 박창세 | 상해 | 권총 | 미수 / 검거 |
9 | '32. 12 | 옥성빈 | ㅡ | 김구 | 상해 | 권총 | 성공 / 미검 |
10 | '34. 3 | 일본 관민 | 강병학 / 박효경 | ㅡ | 상해 | 폭탄 | 실패 / 미검 |
11 | '35. 3 | 이용로 | 엄순봉 등 | 김구 | 상해 | 권총 | 성공 / 검거 |
12 | '35. 11 | 이태서 | 김창근 | 김구 | 상해 | 권총 | 성공 / 미검 |
옥빈관과 옥성빈 암살
건명 | 발생 년월일 |
검거 년월일 |
발생 장소 |
범인 | 배후관계 | 테러행위 개요 |
|
본적 | 성명 | ||||||
玉觀彬 암살사건 |
昭和 8년 1월 8일 |
미검거 | 上海 支部街 |
황해 | 黑色 恐怖 團員 楊汶舟 (당 41세) |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량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하여 권총으로 사살함 |
玉成彬 암살사건 |
昭和 8년 12월 18일 |
미검거 | 上海 프랑스 조계 |
미상 | 김구의 사주에 의해 同派 흉폭분자의 행위라고 여겨짐 | 프랑스 조계 공부국에 근무하는 형사인 피해자는 불령운동을 방해하는 자라고 여기고 잇었는데 상기 일시에 어떤 자인지 권총으로 사살함 |
3. 옥관빈은 누구인가
● 1891년 1월 평남 중화 출생, 玉潤의 장남, 아호 新島, 법명 옥혜관(玉慧觀), 평양 예수교 학교, 숭실학교, 대성학교, 보성전문, 안장호 / 대성학교 은사, 총명한 청년지사, 위대한 연설가, 광폭의 인적 연망, 대한매일신보 기자, '청년학우회' 창설
● 1911년 신민회, 105인 사건 피체, 6년 징역형
● 1915년 2월 4년 복역 / 특별사면 (밀정 혐의)
● 1916년 12월 진남포 三和은행 근무 (밀정 혐의)
● 1918년 (?) 關西목재상회 설립 / 경영
● 1919년 3 · 1운동 불참, 11월 모친 / 상해 망명, 11월 독립신문 간부 / 12월 대한교육회 간부
● 1920년 모친 사망, 남경 / 金陵소학교 (28세), 麗德洋行 (독일인 합작) 설립, 상인의 買辦.
● 1922년 시사책진회 간부, 倍達公司 (한인무역) 설립, 독일산 약품 / 기계, 중국산 비단 / 염료 / 잡화, 조선산 인삼 등 수출입, 경성 = 玉田양행 / 베를린지점 개설
● 1923년 상해대한교민단 간부, 한중무역 현황조사
● 1924년 재상해 한인 商社 현황조사
● 1926년 11월 太虛大師 수계 / 법명 慧觀, 항주 高麗寺 중건운동, 중국 여성과 결혼
● 1927년 三德洋行 (한중일 합작) 설립
● 1928년 중국적 회복 (운남), 仁成학교 2,000원 기부
● 1929년 고려상업회의소 창립, 상해시 상무위원
● 1930년 佛慈藥廠 (한중합작), 中樂제조, 중국 / 동남아 수출, 특약점 72개소, 閘北공장 / 직공 40~50명
● 1931년 '중국불교회' 집행위원 선임
● 1933년 8월 1일 김구 / 정화암 = 청부 살해
상해 인성학교 서광
중국 상해에서 동포 자녀의 교육기관 인성학교 (仁成學校)는 최근 경비곤란으로 거의 폐교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업애서 크게 성공한 삼덕양행(三德洋行) 총경리 옥관빈(玉觀彬) 씨가 전후 2번에 걸쳐 2,000원을 기부해서 다시금 계속해서 개교하게 되었다. 동교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동포들의 손으로 창립된 이래 항상 곤란한 와중에서도 동포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앞으로 상업계에서 활동하는 동포가 늘어가는 형편임으로 학교 경영의 기초도 잡힐 것이라 하더라.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
● 1932년 2월 28일 제1차 상해사변 발발 / 격렬한 시가전
● 상해동포 약 1,000명, 인명 손실 전무 / 재산 손실 34만 원
● 옥관빈 <佛慈藥廠> 피폭 20발 / 재산 손실 약 23만 원
《동아일보》 1932년 3월 9일자
너 자신을 혁명하라!
◆ 스승 안창호, "우리의 主義와 精神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物質과 金力이 없으면 그 좋은 주의와 정신을 실현시키기 불능할 것이요. 그 주의와 정신은 實現이 없으면 空想과 虛論이 되고 말지니 좋은 주의와 정신이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務實力行 / 실력양성주의!
◆ 제자 옥관빈, "권하노니 세계 시장은 광대하고 黃金의 海波는 양양하다. 반도의 一隅가 大하지 못한 줄을 하면 분연히 일어서 시선을 세계무역 무대에 一注해야 할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자여 돈 벌기를 배우며, 일하고자 하는 자여 장사의 일을 하라! 돈 벌고자 하는 자와 장사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여, 해외무역에 착수하라! 우리의 경제발전이 이로써 촉진될 것이다. 신문 / 잡지에 경제논설 게재! 선구적인 貿易富國論! 경제적 실력양성주의!
4. 암살과 풍문
含怨被殺!
상해 옥관빈 씨가 피살당하였다. 그는 안창호의 부하로 있었고 일도 많이 하다가, 정계에서 말을 끊고 실업에 종사하여 벌써 10년 獨逸化學 藥品의 東洋專賣特許를 맡아서 '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만 원의 巨富를 이루었다. 가끔 운동자금을 달라고 가면 "너 이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하였다. 이것이 '含怨被殺의 主因'이라 한다.
《삼천리》제5권 제9호 / 1933년 9월 1일자
떠도는 풍문들!
여운형 군이 금강산 외금강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렸다. 그는 옥관빈 씨가 1주일쯤 전에 상해에서 암살되었다고 했다. 옥씨는 약을 특허내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돈을 번 후, 다년간 원한을 품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 왔다고 한다. 그는 공적인 대의명분을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도와줄 법한 학생조차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잘 보여 자기의 신변을 보호해 왔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33년 8월 21일자
구익균 씨 증언
도산과 신인회 사건 이래의 동지인 옥관빈 같은 사람은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에서 일하다가 생활도 못하게 되니까 大藥廠을 경영했는데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독립운동은 못 믿겠고 오직 도산 선생만 믿을 수 있다며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무정부주의자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들이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옥빈관에게 돈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일이나 테러 비용이 거의 도산의 손을 통해 나갔습니다. 딴 사람은 신용이 없고 일본 형사에 고발하여 경을 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자금을 줄 수 없었습니다.
안창호 선생 비서
참 아까운 사람들!
옥관빈이는 평양 사람인데 대성학교를 다녔어. 도산을 숭배하고 인민회 회원이고··· 상해에 와서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중국은 하도 넓으니까 '佛慈大藥廠'을 만들어 가지고··· 그걸로 성공을 했단 말이야··· 도산이 필요한 받아쓰고 했는데, 아! 무정부주의자들이 말이야. 가서 돈 달라고 그러니까니 내가 목숨을 내더라도··· 못주겠다 그러고 말이야, 야단하고 욕을 해서 보냈는데, 그걸 무정부주의자들이 결국 총을 쏘아서 죽였지··· 이(옥성빈)가 불란서 경찰에 속하였거든, 그러니까 니 자기 동생을 위해 너희들 (무정부주의자들)을 一網墮盡할 것이라 그랬어. 그래서 옥성빈이를 역시 암살했지··· 아이구, 참 아까운 사람들이야!
《안창호 선생 비서 우익균 증언》
오면직 판결문 (1937. 4. 16)
● 1933년 7월 22~23일 정화암 및 각 혁명단체로부터 일본 관헌의 밀정이라 인정되는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 원의 재목을 제공햇으며, 혁명운동의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있다고 판명되었다.
● 그래서 (오면직은) 엄형순과 협력하여 옥관빈이 평소에 자주 출입하는 그의 종형 상해 프랑스 조계 망지로 남영리 거주 옥성빈의 집 맞은편 중국인 집 2층에서 수일간 잠복하였다.
● 피고인 (오면직)은 옥관빈의 출입을 감시하였다. 1933년 8월 1일 오후 9시경 옥관빈이 자동차로 옥성빈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엄형순은 재빨리 자동차에 다가가서 휴대한 권총으로 사격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케 하였다.
1934년 김구 일파 동정
上海 주재 사무관 中野勝次
김구 일파 애국단의 유력한 한패라 생각되는 安恭根, 安敬根 및 金東宇에 관해서는 그 후 계속해서 엄밀히 내사중, 안공근은 8월 26일 南市 德潤坊 집을 떠난 채로 그 후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9월 4일에 이르러 이 집에 돌아온 것을 보아 확인했음을 이미 보고한 바 있음. 그 후 여전히 주소를 변경하지 않고 최근에는 玉成彬이 玉觀彬의 암살을 김동우의 소행이라 하여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평소의 출입처인 韋惠林 집에도 겨우 3~4일에 한 번 정도 내방하는 데에 지나지 않음. 그런데 지난 9월 16일 표연히 그 주소지를 떠난 이래 다시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음.
5. 옥관빈은 밀정인가?
密偵과 懲罰
임시정부가 상해에 설립된 이래 日人이 파견한 密偵도 믾거니와 우리 당원이 제조한 密偵도 적지 않다. 무슨 감정만 있어도 '그 놈 密偵이다'해서 동지의 명예를 汚損하며, 조금 의견만 충돌해도 '그 자가 疑心스럽다'해서 동지의 신용을 추락시킴을 能事로 삼는 자가 허다하여 동지간의 信義가 심히 薄弱하니 이를 그냥 두면 우리 당원간에 信義는 결국 零이 되고 말지라. 이를 구제하는 방책으로 일절의 경찰권은 정부 경무국에 두고 타 당원은 모든 偵探한 일을 경무국에 密告하고 경무국은 신중히 조사하여 확실한 證憑을 얻은 후에 處刑하고 경솔히 流言惡評으로 惡影響을 미치지 않도록 함이 第一良策일까 하노라.
《독립신문》 1925년 11월 1일자
才勝德!
옥관빈 군이 來訪해서 말하기를 자기를 偵探이라 嫌疑함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함이 좋을지를 물어서 현재 군에 대해서 그러함은 사회의 정도가 幼稚하고 無情한 것을 慨歎한다. 그러나 군은 罪가 社會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自信에게 있다고 해서 이 시기에 비상한 警醒으로 反省에 힘쓸지라. 군이 그러한 誤解를 받는 것은 군의 才가 德을 勝하기 때문이니 지금부터 淳實한 道德 방면에 着意하라 하였다. 군이 말하기를 자기는 代議士를 사직하고 南京 등지로 나아가 修學함이 어떠하랴 하기에 可合하다고 하였다.
《안창호 일기》 1920년 2월 18일자
윤치호의 한탄!
양주삼씨에 따르면, 옥관빈이 일본인들의 밀정으로 변신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옥씨는 내가 본 조선인 청년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11년부터 1915년까지 陰謀事件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非凡하게 잘 견뎌냈다. 이런 인물이 反逆者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윤치호 일기》 1921년 4월 15일자
105인 사건 연루자 서훈
서훈명 | 서훈자 | 합계 |
대한민국장 | 이승훈 (이인환) | 1 |
대통령장 | 양기탁, 양전백, 유동열, 이명룡, 편강렬 | 5 |
독립장 | 선우혁, 안세환, 안태국, 임치정, 차리석, 홍성익 | 6 |
애국장 | 강봉우, 곽태종, 김봉수, 양준명, 정원범 | 5 |
애족장 | 강규찬, 길진형, 김두화, 김순도, 김시점, 김일준, 노정관, 백남준, 백용석, 백일진, 서기풍, 선우훈, 신효범, 안광호, 오학수, 오희원, 이용혁, 이재윤, 이태건, 장광선, 정주역, 주현칙, 차희선, 최성주, 최예항, 홍규민, 홍성린 | 27 |
대통령표창 | 김창건 | 1 |
합계 | 45 |
◆ 2009년 편찬 《친일인명사전》, 총 4,389명 가운데 105인 사건 연류자는 김동원, 나일봉, 윤치호, 장웅진 총 4명!
◆ 105인 사건 6년 징역형 수형자는 옥관빈,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독립운동가도 친일파도 아닌 옥관빈!!!
"버드나무 그늘, 異域의 孤影"
《동광》 제24호, 1931년 8월 4일
가난과 고생, 눈물과 비애 와중에서 반생을 지내었고 받은 바 은혜도 없고 누린 바 복락도 없지만은 고향은 왜 이렇게 클클히 그리운지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이 막히고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맑은 하늘 어여쁜 산악 그 얼마나 다시 보고 싶으며 구슬 같은 청계수에 이 마른 목을 축이고 싶으며 울울창창한 松栢을 대하야 이 신세를 하소연 하고 싶음이 그 얼마인가, 鄕愁! 고향생각.
이것은 아마도 이 몸이 이역에서 漂浪하는 동안 없어지지 못할 비애이며 또는 내 마음 속에 思慕에 찬 유일한 戀慕다. 고향서 나온 도라지 한 뿌리에서도 고향의 흙 냄새가 나고 고추장 한 숫깔에도 고향의 맑은 물 향기가 나는 것 같다.
兩袖淸風으로 주머니 속을 툭툭 털어 단돈 1원 밖에 없는 것을 밑천 삼아 지금까지 奮鬪해 오던 것을 回顧하야 보면 눈물도 많았지만 꿈같기도 하다.
협잡군! 大滑頭! 하고 시기 많은 사람의 독살스런 눈살을 받을 때 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네가 무엇이라 하든지 나는 내 길을 걸어가겠다고 이를 갈고 몸부림을 쳐왔다. 그리하야 계획하든 일이 혹 하나 둘씩 이루어질 때문 형용할 수 없는 快感을 느끼었다. 독한 놈! 무정한 놈! 하고 사람들은 나를 誹訪한다.
고향은 나를 내쫓았고 고향 사람은 나를 버렸다. 그러나 고향은 내 머리 속에 너무나 굳세게 박힌 憧憬의 뿌리며, 내 앞 길의 오직 하나인 目的地다.
黃浦江의 어스름 달이 동편 하늘 구름 위에 비추고 진흙물을 헤치며 동쪽으로 향하는 기선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 나는 뻐꾹새와 함께 남 모르는 한 구석에서 피눈물을 울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 눈물이 변해서 광채나는 성공의 구슬이 되어 고향 햇살에 휘황하게 빛날 때가 있으리라!
6. 암살과 논란
<斬奸狀>
1933년 8월 8일 南華 한인청년동맹 = '韓人除奸團' 명의, 친일주구 '玉逆觀彬' 可殺 죄상, 신문 지상 발표!
1) 이미 국내에서 귀순하고 밀정으로 상해에 왔다.
2) 무역상을 개설하고 중한 양국 사정을 정탐했다.
3) 중국인들로부터 만여금을 편취했다.
4) 신문과 전단으로 한국의 혁명자를 이간했다.
5) 유림대표 김창숙 등 혁명가를 체포시켰다.
6) 1932년 상해사변 때 중국 군정을 정탐했다.
7) 참호용 목재 등을 일본군에 헌납했다.
8) 폭력단을 조직해서 혁명운동자 암살을 기도했다.
9) 일본 영사관이 지급한 권총을 소지하고 과시했다.
=> 1), 5), 밀정 운운은 거짓말, 기타는 확인 불가!
<爲玉慧觀先生辯誥>
국민당 상해시, 옥관빈 무고함 변고, 1933년 8월 12일자 상해 <申報> 게재!
"옥관빈은 천성이 쾌활 솔직하고 公을 먼저허고 義를 좋아했으며··· 勤勉好學하여 동서의 사서에 潛心 연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어진 이를 존경하여 사람들이 異口同聲으로 찬미하였으니 적과 내통했다는 말을 누가 믿을 것인가?"
1) 한말 혁명당에 투신하여 5년 동안 옥살이
2) 1919년 상해에서 광동 손문과 중국 혁명 원조
3) 중국불교회 상무위원, 국민당 상해시 당직 역임
4) 1932년 1 · 28사변 이후 약 2만 금 손실
=> 2)는 확인불가, 1), 3), 4)는 사실!
3. 암살자들
살인청부업자 정화암
● 1896 / 9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장화리 출생, 본명 정현섭 혹은 정윤옥
● 1914 / 0 한학수학
● 1921 / 4 북경 경유 상해 망명
● 1923 / 9 호남성 / 농촌자치운동 전개
● 1924 / 4 이회영, 이정규, 백정기 등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사, 기관지 '正義公報' 발행
● 1924 / 11 영국인 철공장, 폭탄 제조 기술 습득
● 1925 / 5 상해공단연합회, 대일 / 대영 총파업 참가
● 1928 / 8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탈환' 편집위원
● 1931 / 9 한중대 연합항일구국연맹 결성
● 1932 / 2 항일구국연맹 별동대 (흑색공포단) 조직
● 1932 / 2 장개석 암살 청부 / 미수
● 1932 / 5 '南華韓人聯盟' 결성, 除奸團 결성
● 1933 / 3 有吉明 공사 암살 모의 / 실패
● 1933 / 8 옥관빈 살인청부 사주 (이른바 除奸團 사건)
● 1934~1939 남산입달학원, 노동 / 농민운동가 양성
● 1935 / 3 재상해거류민단장 이용노 살인청부 사주
● 1937 / 10~45 / 8 중일전쟁 / 한중합동유격대 대일항전
● 1947 / 3 상해 / 조선학전관 및 신채호학사 설립
● 1949 / 7 대만 경유 홍콩 이주
● 1954 / 6 귀국
● 1956 / 4 민주사회당 발기위원 / 최고위원
● 1961 / 1 통일사회당 정치위원
● 1964 / 3 한국민주사회주의연구회 의장
● 1973 / 1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 상임고문
● 1981 / 1 (86세)
살인범 (1) 오면직
● 1894년 황해도 안악군 출생, 양산학교 / 대성학교 중퇴, 조선 / 동아일보 지국장 / 기자, 한인무정부동맹 조직원 / 1934년 12월 한국독랍군 특무대 김구 / 안공근 / 본인
● 1921년 11월 김동우(노종균) / 상해 망명 / 김구 해후
● 1922년 2월 김립 암살
● 1926년 4월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 1932년 4월 윤봉길 폭탄테러 공모 / 8월 이규서 등 암살
● 1933년 3월 有吉공사 암살 미수 (63亭 사건) / 5월 밀정 이종홍 암살 / 8월 옥관빈 암살
● 1935년 11월 밀정 이태서 암살 / 12월 총영사관 경부보 藤井 폭살 미수
● 1936년 3월 상해 / 검거, 맹혈단 소속
● 1938년 4월 해주형무소 사형 (45세)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살인범 (2) 엄형순
● 1906년 경북 영양군 출생, 본명 엄순봉, 가정빈곤 / 무학
● 1924년 만주 이주 / 농업노동자
● 1931년 10월 북평 이주 / 농업 경영
● 1931년 1월 상해 / 남상 이주 / 농업 경영
● 1932년 12월 '南華韓人靑年聯盟' 가입
● 1933년 3월 有吉공사 '암살 미수' (63亭 사건) 공모 / 5월 밀정 이종홍 암살 공모 / 8월 옥관빈 암살 / 12월 옥성빈 암살 공모
● 1935년 1월 조상섭 협박 / 강도 미수 / 3월 이용노 암살 공모 / 공모자 이규호 (20세, 이회영 셋째, 징역 13년형)● / 3월 25일 사건 당일 검거
● 1936년 4월 사형판결 (31세), 강도 / 살인 등
● 1938년 4월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7. 청부살해 진상
- 정화암의 회고 -
● 상해에 佛慈藥廠의 제약회사를 차려놓고 일제 관헌과 내통하면서 매국노적 비행을 서슴지 않고 돈을 많이 번 거부가 있었는데 바로 옥관빈이다. 그는 105인 사건으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던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어느새 일제에 투항하여 돈을 벌면서···
●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고 일제에 아부하여 안하무인격으로 횡포를 부리고 다녔다. 홍구공원 사건이 이후 중국정부의 신임을 얻은 김구는 옥관빈을 제거할 생각으로 안공근을 통해서 나에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 자리를 같이한 김구는 옥관빈의 매국노적 비행 18가지를 적어 보이며 그의 세력이 일제의 비호하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때 김구는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매사를 상의하였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금서패라는 담배를 사들고 와서 우리 동지들에게 권하고···
● 옥관빈의 안하무인격 행동에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상해에서 유명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기 때문이다.
● 호화스러운 저택,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김구가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김구가 보여 주었던 죄상 18가지는 고사하고 독립운동가를 모욕하는 그의 언동만으로도 그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 옥관빈은 그대로 놔두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나와 김구와 안공근 세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옥관빈을 처단하기로 합의했다.
● 임정은 홍구사건 이후 중국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돈은 있었으나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없었고, 南華聯盟은 사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臨政의 財力과 南華聯盟의 人力이 합작하기로 했다.
● 그 자리에서 김구는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임정과 남화연맹이 공동보조를 취한가는 것은 우리 셋만 알고 있습니다" 왜 백범은 그 당연한 소리를 강조하는 것일까? 만일 실패했을 경우 임정의 개입을 회피하려는 자기방어책이구나 하는 불쾌감이···
● 백범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자전거를 몇 대 사가지고 옥관빈의 신변과 활동범위 등 동정조사를 착수했다. 그의 집은 일조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2개월이 넘는 추적 끝에 필요한 자료가 갖추어지게 되어 계획을 짰다.
● 망지로의 끝 북영길리와 남영길리로 나누어지는 곳에 불란서공무국에 다니는 옥관빈의 사촌동생 옥성빈이 살고 있었다. 집 뒤쪽 정자칸방에 흥사단의 李某가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 이모는 漢口에 조그만한 세발자전거 공장을 경영하고 있어 셋방에는 그의 처만이 살고 있다. 옥관빈은 이모의 처와 불륜의 정을 통해 오고 있어 1주일에 한 두번 정도 남몰래 드나들고 있었다. 이 곳이 그를 처단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 양여주(오면직)와 엄형순이 살해의 실행책임을 맡았다. 1933년 8월 1일 저녁 9시 옥관빈이 차에서 내려 그 집에 들어갔다··· 엄형순은 권총을 감추어 쥐고 내려가고, 양여주는 그 옆집 2층 창문에 폭탄을 놓고 옥관빈이 나올 그 집 뒷문쪽을 눈으로 지켰다.
● 12시가 넘은 깊은 밤··· 옥관빈은 정사에서 느꼈던 쾌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잔인하리만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잇문을 닫고 발길을 옮겼다··· 이때다. 엄형순의 권총 탄환은 옥관빈의 가슴을 명중시켜 버렸다···
● 엄형순은 구둣발로 옥관빈의 몸뚱이를 제치고 절명한 것을 확인한 다음··· 인파 속에 묻혔다. 다음날 신문에는 옥관빈 피살사건이 크게 보도되었다··· 옥관빈의 피살보도는 우리 교포들에게는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 옥관빈의 죄상발표를 '鋤奸團(?)' 명의로 합의하였다. 발표문에 옥관빈의 죄목을 나열하고··· 피살을 당연한 것으로 규정짓는다··· 만일 그의 非行을 비호하거나 두둔하는 등 輕擧妄動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도 같은 방법으로 처단되어야 한다는 경고까지 붙였다.
● 옥관빈은··· 서간단이라는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에 의해 漢奸으로 취급되어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서간단이 임정 계통의 단체인지 남화연맹 계통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 그러다가 차츰 서간단이 남화연맹 단체라는 것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임정 측의 입장은 난처했다. 재정적 후원을 했는데도 아무런 공이 없게 되버렸기 때문이다··· 하루는 김구가 "애국단과 남화연맹의 공동명의로 성명서를 다시 발표하자"고 제의해 왔다··· 불응하였다···
● 임정 측은 사건의 실행을 담당했던 양여주(오면직)와 엄형순을 남화연맹에서 애국단으로 빼내 가려 했다. 김동우가··· 종용했다. 결국 양여주는 애국단으로 복귀했고, 엄형순은 가지 않았다. 뒤에 김구는 돈을 전해 왔다. 생활이 옹색할테니 생활에 보태 쓰라는 것이다.
오면직과 김구
● 1933년 10~11월 嘉興 임정, 김구 초청,
● 1934년 비밀결사 한국독립군 특무대 결성, 특무대장 = 김구, 참모장 = 안공근, 비서 = 오면직
● 오면직, 중앙군관학교 입학예비생 약 30명 예비교육 / 통솔관리
● 1935년 말 김구 / 안공근, 독재 / 전제 / 私利私慾, 조직원들 薄待! 김동우 / 오면직 등 이탈!
● 1936년 오면직 / 김동우, 비밀결사 猛血團 결성! 한인실업가 조상섭 등 협박 / 활동자금 모금!
8. 마무리
● 옥관빈 / 옥성빈 / 옥승빈 암살의 주범은?
● 옥관빈은 밀정인가, 독립운동가인가?
● 살해된 한인들은 전부 민족반역자인가?
● 김구는 독립운동이란 미명으로 몇 명의 한인 동포를 살해 / 사주했는가?
● 김구는 민족의 巨星, 희대의 살인마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tpUcFIwGd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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