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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10. 1948년 남북협상의 불편한 진실, 김일성이 폭로한 김구의 정체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1. 6. 28 방송
김구의 신화 (10)
1948년 남북협상의 불편한 진실
김일성이 폭로한 김구의 정체
2021. 6. 28 (월)
정안기
1. 1948년 남북협상
1944년 좌우합작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김일성과 김두봉 앞으로 남북합작을 제의하는 서신에서 1944년 중경에서 연안의 김두봉에게 좌우합작을 제안한 역사적 경험을 간곡하게 언급했다. 안우생에 따르면 김구는 김두봉과 별개로 김일성과도 합작을 모색한 바 있었다. "1944년 말이었다.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지던 때라 백범 선생의 가슴속에서는 조바심이 부쩍 있었다. 광복의 최후 결전에 참가하여 당당하게 환국해야 하는데··· 백범 선생은 이러한 실정에서 몇몇 측근들과 숙고함 끝에 김일성 장군께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의 밀사 파견은 주변 분위기를 고려하여 백범, 조완구, 나(안우생) 이렇게 몇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백범 선생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출발한 리충모는 산서성 태원에 이르러 동북으로의 통로를 탐색하느라 지체하면서 8 · 15를 맞고 말았다."
안우생 (1986), 『인민들 속에서』, 조선로동당출판사
1948년 남북협상
● 1948년 4월 19일~26일,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4월 27일~30일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협의회' 그리고 이른바 '4김회의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를 총칭.
● 소련 군정 (레베테프)의 치밀한 기획과 관리
● 1948년 2월 16일 김구 / 김규식 남북협상 서신
● 1948년 3월 25일 김일성과 김두봉 답신
● '답신 아닌 답신' = 새로운 제안 / 초청장 형식!
● 김구 (반탁 / 반공) 참석 = 미소공위 결렬 미국 책임 / 공산당 = 인민의 전폭적 지지 / 북한정권 = 정통성 확보
● 1948년 4월 23일 소련군정, '성공적'이라 평가!
이정식 (2006),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비장한 일성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 하는 것을 명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일지라도 그것이 정도라면 그것을 택해야 하는 것이요. 진실로 이것만이 인도(人道)인 것이니, 여기에 있어서는 현실적이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 외의 문제일 것입니다.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없는 자주독립을 전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명령에 복종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망명생활을 삼십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임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명령이므로 그것을 택한 것입니다.
엄항섭 편(1948), 『김구 주석 최근 언어집』, 삼일출판사
남북협상의 일정
1. 4월 7일 안경근, 대북 밀사 파견, 10일 귀환
2. 4월 18일 문화예술인 108명 남북회담 지지성명
3. 4월 15일 경교장, 북행기자회견
4. 4월 19일 경교장, 북행반대학생시위대 연설, 15시 30분 출발
5. 4월 20일 황해도 금천 출발, 오후 16시 평양 도착
6. 4월 21일 오후 김규식과 함께 방북 성명서 발표
7. 4월 22일 모란봉극장, 남북연석회의, 단선 / 단정 반대 성명
8. 4월 23일 미소 양국에 보내는 결의서 채택
9. 4월 25일 평양시청 앞, 연석회의 축하 군중대회 참석
10. 4월 26일 대보산 영천암 방문
11. 4월 27일 만경대 '혁명가유가족학원' 방문, '15인회담' 참석
12. 4월 30일 '4김회담' 참석,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 공동성명
13.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 '조선인민군 열병식' 참석
14. 5월 2일 강양욱 안내, 김재선 목사 예배 참석
15. 5월 4일 평양출발, 황해도 남천 도착 / 숙박
16. 5월 5일 13시 48분 38선 도착, 20시 30분 서울 도착
시위대를 향한 훈계
학생들은 미래의 주인공이다··· 내가 장덕수 사건으로 억울하게 미군 법정에 섰을 때는 제군들은 어더한 태도를 취했다. 나는 그때 너희들이 과연 비겁한 것을 알았다. 참으로 정의의 깃발 밑에서 학도라면, 아니 나 김구를 진심으로 믿고 따른다면 어째서 시위운동 한번도 못했는가··· 너희들은 내가 함정에 빠져 갖은 억울한 욕을 다 보고 있을 때에는 낮잠만 자고 있다가 내가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하니 도대체 무엇들이냐!··· 한번 간다고 했으면 나 김구는 가고야 마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책이라도 한 장 더 보라!
백범 사상 연구소 (1973), <백범어록>, 273쪽
'협의회' 성명서
1. 외군의 즉시 동시 철군할 것. 조선 문제 해결의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외군 철군 이후 내전 발발은 없다는 사실과 통일에 배치되는 무질서 발생을 허용할 수 없다.
3. 외군 철군 이후 전조선 정치회담 소집,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일반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한 통일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4. 남조선 단독선거와 그 결과를 결코 승인할 수 없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3일자
하지와 이승만의 반응
● 하지 : 요청서는 무척 흥미롭게 읽었으나, 이것 역시 현재까지 본관에게 제출된 수 백통에 달하는 공산주의자 진정서와 다른 것이 없다. 같은 진정서에 서명한 자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외국(소련)에 팔아 넘기기를 원하는 자들의 일람표다. 공산당과 그 여당만이 참석한 회의에 불과하다.
● 이승만 :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하는 결과 이외에 하등의 결과도 없을 것이다. 단선 주장측에서는 선거를 연기하고 방해하고자 하는 술책에 불과하다. 정부수립 이후 북한대표를 만나겠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6일자
2. 김일성의 폭로
세카이(世界)는?
● <세카이(世界)>는 일본 굴지의 출판사이자, 문화권력 이와나미 쇼덴(岩波書店)이 발행하는 월간 잡지
● 전후(戰後) 일본의 진보좌파 지식인들을 대변했고, 매달 국내외 시사문제를 취급하는 잡지.
● 1972~1991년 김일성과 9차례의 독점 인터뷰를 게재, <세카이>는 북한에 우호적 보도를 해온 친북 지식인들의 본거지
김일성 독점 인터뷰
(1) 金日成, 美濃部亮吉 (1972. 2), 『金日成首相会見記』
(2) 金日成, 安江良介 (1972. 12), 『金日成首相会見記』
(3) 金日成, 縁川享 (1973. 11), 『金日成主席会見記』
(4) 金日成 (1976. 2), 『革命と建設の道程』
(5) 金日成, 安江良介 (1976. 6), 『朝鮮の平和と統一』
(6) 城戸又一 (1977. 1), 『ピヨソヤソ再訪-1-金日成主席会見記』
(7) 金日成, 安江良介 (1979. 1), 『朝鮮の統一と囯際情勢』
(8) 金日成, 安江良介 (1985. 8), 『解放四十年を迎えて』
(9) 金日成, 安江良介 (1991. 12), 『歷史の転換を求めて』
※ 金学俊 (1986. 2), 『金日成主席会見記』への反論』
김구의 정체(1)
● 백범은 광복 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반공주의자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백범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
● 해방 후 김구는 비서를 통해서 만나자는 편지를 전해왔고, 나는 만남을 환영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는 방북 전에 과거 자신의 죄과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문의해 왔다. 그래서 나는 지난 일은 백지로 돌렸다고 답신했다.
● 1948년 4월 김구는 38선을 넘어 방북했다. 우리가 소집한 남북연석회의는 이승만계 정당을 제외한 남북한 대부분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했다.
김구의 정체 (2)
● 1948년 평양에 온 김구는 "상해에서 空論으로 밤을 새웠지만, 장군은 무기를 들고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반대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사죄했다.
● "북조선 공산주의자는 자신이 알아왔던 공산주의자와 전혀 다르다. 당신과 같은 공산주의자라면 손을 잡고 조국통일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 남북연석회의 종료 이후, "김구는 북조선에 남고 싶지만, 그러면 반동분자들이 북조선이 자신을 억류햇다고 비방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귀환해서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의 정체 (3)
● 김구는 남조선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서 "(1) 북으로 돌아오게 되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과수원이라도 하나 마련해주면 좋겠다. (2) 나이가 들었지만, 공부하고 싶다. 공책과 연필을 선물로 가져가고 싶다. (3) 남조선 연백평야 농민들을 위해 관정용수 공급을 재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 그래서 나는(김일성) 김구가 요구하는 (1), (2), (3)의 요청 전부를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 김구는 남조선으로 돌아가서 얼마 안되어 암살되었다. 미 제국주의자와 하수인들이 미국을 따르지 않는다고 살해한 것으로 집착된다.
3. 어리석은 김구
김일성에게 놀아난 김구
당초 김일성은 김구의 강한 반공투쟁과 반동성(반탁, 반공, 반소) 때문에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김두봉 등이 "김구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에 만날 필요가 있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했기 때문에 역제한 방식으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수용하였다. 김일성은 김구를 북한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호재로 철저히 이용했다. 평양회담을 다녀 온 김구는 현실정치에서 뒤처지면서 정치적 입지를 잃었고, 세력이 계속 약화되었다.
오인환 (2013), 『이승만의 삶과 국가』, 나남, 237쪽
정치적 자살!
1948년 9월 조병옥이 대통령 특사로 유엔 총회에 참석차 파리로 가는 길에 중국 남경에 들렸고, 국민당 총재 장제스가 오찬을 베풀었다. 국민당 수뇌부들은 각별한 사이였던 김구와 김규식의 근황을 물었다. 조병옥은 "두 사람은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북한과 남북협상차 평양에 갔다 온 사실로 말미암아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정치적 자살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발언했다.
오인환 (2013), 『이승만의 삶과 국가』, 나남, 239쪽
김신의 증언 (1)
인민군의 훈련이 무척 잘되어 있음을 다시한번 느꼈다. 중국 군대와 미국 군대의 경험에 비추어 열병식 정도만으로도 훈련의 정도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인민군은 우리의 국방경비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인민군은 따발총으로 불리는 소련제 PPSH-41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포 전력도 대단해 보였다. 북한 인민군 주요 간부들은 중공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이라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설명할 수 없는 공포와 위기감이 마음 한쪽에 깊은 그늘로 자리잡았다.
김신 (2013), 『조국의 하늘을 날다』, 돌베개, 129쪽
김신의 증언 (2)
만찬장 뒤쪽에 서 있는 군인(대좌)들 가운데 아는 얼굴들이 제법 있었다. 난징 시절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했지만 아무도 응대해 주지 않았다··· 6 · 25때 남침해 들어온 사단장들, 서울시 부시장, 이들이 다 그때 있던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훈련시킨 놈들이 다 여기 와서 일하고 있구나"라고 했어요. 김일성이 연설하고 아버님께서 연설하셨어요. "난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키 위해 여기 왔다"고 하니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김신 (1986),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69쪽
선우진의 증언 (3)
당일 (5월 1일)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타오르는 듯 붉은 말을 탄 최용건이었다··· 보병들은 양손을 앞뒤가 아닌 좌우로 흔들고 다리는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일자로 걷는 소련식 걸음으로··· 쩌벅쩌벅하는 군화 소리가 광장을 흔들었다. 착검된 소총은 밑부분에 둥근 탄창이 달린 작은 다발총과 위에 탄창이 달린 큰 다발총 두 가지였다. 나는 6 · 25전쟁 때 이 소총들을 다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이 남북협상의 끝을 이 같은 호전적 분위기로 마무리 지은 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이 순간 동족상잔의 비극은 잉태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백범 선생은 입을 꽉 다문 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사열의 의미를 모를 분이 아니었다.
선우진 (2008),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166쪽
4. 반역자 김구
어차피 적화될 나라!
유엔한국위원단 중국대표 유어만, 1948년 7월 11일 경교장 김구 면담, 이른바 "유어만 보고서"의 요지
● 이승만이 제안한 부통령직 수락, 남한 단독정부 수립 동참, 세계 공산화에 공동 대항!
● 이승만은 한민당 포로, 더러운 정치판, 반미주의자 건국 참여, 미국 지지 냉각, 국가 불이익 (원조)!
● 남북협상, 북한군 열병식 참관, 남조선 공산화는 시간 문제, 어차피 적화될 나라의 부통령?
유어만劉馭萬 보고서
붉은 김구 (1)
● 김구는 국제적 승인하의 UN총회 결의에 따른 5 · 10총선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하자 자파일색의 정권욕에서 이를 단선 / 단정이라 반대 불참해서 민족 단결의 파열을 발생시켰다.
● 1948년 4월 19일 소위 제1차 남북협상에 참가하여 赤都 평양의 이른바 '남북정치지도자연석회의'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및 미군 철퇴 결의를 일사천리로 통과시키는 등 반동한 사실이 있다.
● 평양 김두봉 자택에서 김일성, 김두봉, 김규식, 김구가 비밀리 화합한 이른바 '4김회의'에서 김구는 완전히 광복투쟁 노선을 청산하고 적색 도당 진문에 투항, 그의 羽翼으로 암약할 것을 맹약한 사실이 있다.
서울특별시사찰과, <査察要覽> (1955년)
붉은 김구 (2)
● 김구는 제2차 남북협상 (1948년 8월 해주회의 / 해주인민대표자회의) 당시에는 민중의 여론 공세를 피하기 위해 직접 참가하지 않고 당원 강훈 외 4명을 밀파하여 괴뢰집단 결성에 전폭지지 협력한 반민족적 죄과가 있다.
● 때를 같이하여 이른바 구국투쟁위원회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등 반동단체에 가입하여 민국정부 수립 전후 不執 행동을 감행한 사실이 있다.
● 김구는 김학규를 앞세워 그의 부하 안두희로 하여금 이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안의 번의(飜意)로 1948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도리어 피살되었다.
서울특별시경찰국사찰과, <査察要覽> (1955년)
이승만 암살 (1)
1948년 3월 30일자 이승만 서신, 이 박사에 따르면, 김구가 자신과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유엔위원단 의장인 메논은 이 박사에게 위험한 상황을 감안하여 선거를 연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박사는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았다. 그의 목숨을 노린 분명한 시도가 세 번이나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만약 암살자가 차로 돌진하는 경우에 이 박사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로버트 T. 올리버 지음 (2013),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이승만 암살 (2)
1948년 4월 22일 프란체스카 서신, 어차피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쉴 새 없이 위험에 처한다면 상황에 관해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이 박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 암살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도 그들은 우익 지도자들을 공격할 것이라 합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입니까?
로버트 T. 올리버 지음 (2013),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갈무리
1. 남북분단 원흉!
2. 김일성 하수인!
3. 민국의 반역자!
https://www.youtube.com/watch?v=imkssmh1M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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