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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7. 송진우 암살의 진실, 그는 찬탁론자였는가?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1년 6월 7일 방송
김구의 신화 (7)
송진우 암살의 진실
그는 찬탁론자였는가?
2021. 6. 7 (월)
정안기
김구는 몇 명을 살해했는가!
1) 민필호 왈 "김구 선생은 상해 일본 영사관의 주구 노릇을 하는 한인 밀정密偵이 프랑스 조계 근처에 오기만하면 비밀리에 체포하여 미리 준비한 장소(상해시 변두리 셋집)로 끌고 가서 처치해 버렸고, 그 수가 30여 인에 달한다!
2) 민필호(1898)는 누구? 민치헌 4남, 1911년 상해 망명, 예관 신규식 선생의 사위, 1940년 임정 판공실장 등, 김준엽의 장인(부인 민영주)
3) 김준엽 편 (1995), 『석린 민필호傳』 나남출판, 75~76쪽
개요
◆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57세) 암살, 원서동 자택, 괴한 침입 13발 난사, 6발 피탄!
◆ 암살범은 한현우(29), 유근배(20), 김의현(22), 김인성(22), 이창희(19)
◆ 암살교사범은 임정계 大韓輔國義勇團 단원 전백(41세)과 임정 주석 김구(71세)
1. 거인의 숨결
1929년 일본 京都, 제3회 태평양회의 참석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1945년 12월 국민대회 준비회 사무실을 나서는 송진우
서울 어린이대공원 고하 선생 동상
1945년 해방 연표
●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 발족
● 8월 24일 소련군 평양사령부 설치
● 9월 1일 '임시정부환국환영회' 결성
● 9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 남북한 분할 진주 포고
● 9월 4일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결성
●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 해산 /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선포
● 9월 7일 임정봉대론 / '국민대회준비위원회' 결성
● 9월 9일 미제24군단 하지 중장 인천 상륙, 38선 이남에서 미군정 실시 포고
● 9월 12일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취임, '조선공산당' 창당
● 9월 16일 '한국민주당' 창당(수석 총무 송진우)
● 10월 14일 하지 중장, '조선인민공화국' 해체 선언
● 10월 16일 이승만 박사 귀국
● 10월 20일 한국민주당, '환국지사후원회' 결성
● 11월 16일 미군정 장관 더치 소장 취임
● 11월 23일 제1차 김구 등 임정 요인 환국
● 12월 2일 제2차 임정 요인 환국
●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 발표
● 12월 28~29일 제1차 / 제2차 경교장 회의
● 12월 30일 송진우 암살, 31일 김구 주도 반탁시위
1. 서울특별시경찰국사찰과(1955), 『査察要覽』.
2. 권오철(1962), 「첫 흉탄에 쓰러진 송진우씨」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 광화문출판사.
3. 해방20년편찬회(1965), 『解放20年』 세문사.
4. 한현우(1975 / 76), 「나의 반탁 투쟁기(1~5)」 『세대』 10~12월호 / 1~2월호.
5. 이경남(1981),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6. 브루스 커밍스(1986),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7. 브루스 커밍스(2001),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8. 조병옥(1986), 『나의 회고록』 해동.
9. 양재인(1986), 「해방정국에 있어서 정치테러」 『한국정치학보』 제20권 제2호.
10. 리차드 로빈슨(1988), 『미국의 배반』 과학과 사상.
11. 김학준(1990), 『古下 宋鎭禹 評傳』 동아일보사.
12.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편(1990), 『거인의 숨결』 동아일보사.
13.장병혜 외편(1992), 『창랑 장택상 자서전』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4. 박태균(1994),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지성사.
15. 최영희(1996), 『격동의 해방 3년』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16. 도진순(1997),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학교출판부.
17. 선우진(2008),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18. 김상구(2014), 『김구 청문회 (2)』 마법책공장.
19. 김준엽편(1995), 『석린 민필호傳』 나남출판.
의문과 질문
1) 송진우 그는 누구인가?
2) 송진우는 찬탁론자인가?
3) 송진우 암살은 未濟사건인가?
4) 김구는 민족통일의 아이콘인가?
3. 송진우는 누구인가
- 民族不滅, 日帝必亡, 獨立必至 -
● 1890년 전남 담양 출생
● 1896년 서당 공부
● 1904년 정읍, 유씨와 결혼
● 1906년 담양, 창평의숙, 신학문 학습, 김성수 인연
● 1908년 군산, 도일(김성수), 正則영어학교 입학
● 1909년 동경, 금성중학 입학
● 1910년 동경, 와세다대학 입학
● 1911년 동경, 메이지대학 법과 전입학
● 1915년 동경, 메이지대학 법과 졸업
● 1916년 경성, 중앙학원 인수(김성수) 교장
● 1919년 경성, 3 · 1운동 민족대표 참가구속(3년형)
● 1920년 경성, <동아일보> 창간, 제1차 정간
● 1921년 경성, <동아일보사> 창립, 정간 해금
● 1922년 경성, <동아일보사> 사장 취임
●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 사임 / 고문 취임
● 1925년 <동아일보사> 주필, 김성수 사장 취임
● 1926년 제2차 정간 / 구속, 편집국장 이광수 취임
● 1927년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 취임
● 1930년 제1회 동아마라톤 개최, 제3차 정간
● 1931년 브나로드 운동 / 만보산 사건 취재보도
●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 제4차 정간
● 1940년 강제 폐간 / <동아일보> 청산위원
● 1945년 국민대회준비회 결성, 한국민주당 창당 / 환국지사후원회 결성, 12월 1일 <동아일보> 속간, 민족진영 4당 합동 추진, 12월 28~29일 경교장 회의, 30일 오전 6시 15분 피격 / 사망
● 1946년 1월 5일 한국민주당 / 국민대회준비회 / 동아일보 합동장, 망우리 공동묘지 안장
4. 임정봉대론 허실
후원금 不淨財論爭
◆ 1945년 11월 23일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 환국 송진우 등 보성계 주도, 임정봉대론 = 人共타도!
◆ 임정요인 환국 이전, '還國志士後援會' 결성, 애국지사 생활구호, 최창학 소유 경교장, 송진우 마련
◆ 제1차 금융단 및 실업계 후원금 900만 원, 제2차 경성방직 김연수 500만 원 전달
◆ 후원금 淨財論 논쟁,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 임정 재정부장 조완구 수령 거부, 주먹과 흥분 아수라장, 송진우 질타!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엔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다. 이런 큰 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1945년 12월 당시 좌익세력
●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박헌영) 전국 조직
●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50만 명
● 전국농민조합연맹(전농) 3백 30만 명
● 부녀총동맹(부맹) 80만 명
● 전국청년단체총동맹(청총) 72만 명
● 여운형 인민당, 인민당원 약 2만 명 가운데 70퍼센트 공산당 프락치
● 인민당 중앙위원 5분의 3 공산당원
박갑동(1991),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친일파 숙청론
◆ 임정봉대론 = 민족진영 규합 / 국민운동 모색, 환국지사환영준비회
◆ 1945년 12월 중순 / 국일관 회합, 12월 1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준비회 개최
◆ 술좌석, 임정계 내정부장 신익희, 지청천, 조소앙 등 친일파 숙청 발언!
◆ 장덕수 왈 "그러면 나도 숙청감이군!" 해공 신익희 "어디 설산 뿐인가!" 일본 유학 동기!
고하 송진우의 질타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 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들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 · 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관계지, 노형들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이봉창 / 윤봉길 사건)! 국외에서는 배가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거 아니야.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5. 찬탁, 반탁, 訓政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신탁통치, 충격과 반향
◆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최장 5년 조선의 신탁통치 발표
◆ 1946년 1월 1일 정당 / 사회단체 맹렬한 반탁운동, 철시와 미군정 업무 거부, 미군정 당황!
◆ 미군정 성명서 발표, "탁치는 침략이 아닌 독립 정부 수립까지 원조 / 후견 / 자문 역할, 한국민 거부권 인정!"
◆ 임정계 / 시민들, "탁치와 후견 반대, 오직 자주독립! 포스담과 카이로 선언 즉각 이행하라!"
12월 28일 제1차 경교장 회의
◆ 김구 왈,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고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다"며 흥분! 31일 국민동원대회 개최, 초강경론 = 정치활동 재개 / 주도권 장악 호기!
◆ 송진우 왈,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漁父之利를 얻는다! 무력으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하려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共産主義者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중론 = 신탁통치 = 訓政期 (손문, 민주주의 3단계론 / 軍政 - 訓政 - 民政)
28일 경교장 회의, 송진우의 호소
여러분의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경박해서는 안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 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우리가 그들의 합의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있겠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擧國的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냉정히 생각해 봅니다.
28일 경교장 회의, 장준하의 증언
● 28일 밤 각 정당 사회 단체들이 경교장에서 반탁운동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대표 중에는 흥분해서 미군정을 엎어버리고 임정이 독립을 선포,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울분과 분노로 흥분할 뿐 반탁방법에 관해서 차근차근하게 말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 12시쯤 송진우 선생이 김준연 장택상 씨를 대동하고 경교장 회의실에 들어오셨습니다. 특유의 망토를 입고 단장을 짚으면서 회의장에 들어온 송진우 선생은 흥분한 대표들에게 "내가 지금 하지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신탁통치라는 것이 여러분이 흥분해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다. 반탁을 하되 미군정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다시 여유를 가지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집어 치우라"고 하면서 세찬 반발이 일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72년 2월 17일자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 고하는 스탈린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 삼상회의 결정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북한은 소련 것이 되고 말며, 우리 힘으로 반영구적으로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탁통치'라는 불명예스러운 '통치'라도 5년간만 눈 딱 감고 받자고 했다. 여운형도 같은 입장이었다.
● 사실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미국인데도 불구하고, 전국적 반탁운동의 불꽃 속에서 우익 보수진영에 이렇게도 송진우의 식견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가 안타까웠다.
● 당시 연합국들은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지도자들을 우리 안에 넣어 서로 물어뜯지 못하게 조정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행정, 입법, 사법 등을 가르치며 훈련시켜, 근대국가가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 신탁통치의 내용이지,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해서 조선을 다시 식민지로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박갑동(1991),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원칙 반탁, 현실 찬탁
● 임정, 즉시 민족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미군정을 인수하자! 신탁통치 수용 = 임정 법통 상실!
● 송진우, 대대적인 국민운동 / 반탁을 주장하는 한편, 미군정과 충돌을 피해야 한다! 반탁방법론의 문제!
● 여론 형성과 반탁의사 표시, 신탁통치안 취소 가능, 한국 독립 지지 중국의 존재!
● 임정의 미군정 부정 / 독립 선포 /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충돌, 반드시 혼란 / 갈등, 좌익의 漁父之利 = 공산화가 불가피, 원칙 = 반탁, 현실 = 찬탁
6. 신새벽의 총성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송진우를 처단하라!
● 12월 28일 경교장, 반탁 '국민총동원위원회' 결성
● 위원장 권동진, 부위원장 안재홍 / 김준연 등 좌우 포함 76명 중앙위원 선정
● 1945년 12월 30일 국민총동원위원회 9대 강령 발표
● (1) 신탁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하자
(2) 대한임시정부를 절대 수호하자
(3) 외국 군정의 철폐를 주장하자 등
암살 前夜
◆ 12월 28일 하지 방문, 제1차 경교장회의
◆ 12월 29일 새벽 4시 경교장회의 종료, 귀가 / 2시간 취침 / 조식, 오전 한민당 출근, 오후 제2차 임정회의 참석, 오후 7시 귀가 석식, 10시경 內從질 양중묵(54세)과 취침
◆ 12월 30일 새벽 5시 기상 / 흡연 / 담화 / 취침, 6시경 괴한 침습 / 13발 총격, 안면 1발 / 심장 2발 / 복부 2발 / 다리 2발
◆ 1946년 2월 13일 김일수 체포 / 심문
◆ 2월 14일 신동원 / 백남석 / 김의현 체포
◆ 4월 9일 한현우 / 유근배 / 박문식 체포
7. 수사, 체포, 심문
노덕술의 활약
●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 특명 / 노덕술 수사과장 결단, 강력계 6인조 수사팀 투입, 서북청년단 / 조선공산당 추적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 윤봉상(31)과 환자 패거리 백남석과 연애, "송진우를 죽인 것은 우리 편이 한 것" 자랑 / 협박!
● '46년 2월 13일 패거리 김일수 / 해안경비대 입대, 체포 / 심문, '46년 11월말 송진우 경호원 사직, 김의현 대면 / 당황한 반응, 형사대 백남석 / 신동원 검거 / 심문
● '46년 4월 8일 미행 / 잠복, 범행아지트 / 신당동 한현우 자택 급습 / 살인범 및 공모자 5명 일만타진
● 한현우 아내 진술 / 원천불명 거액생활비 / 권총 휴대 / 사격연습 / 정체불명 청년들 출입, 배후 사주자 = 전백 체포!!!
암살 주범 한현우
● 1918년 11월 평북 중강진, 중농층 가계, 4남 / 장남
● 1941년 3월 와세다대학 정경과 졸업
● 1942년 1월 일본 통신사 입사
● 1943년 5월 국수주의자 中野正剛 / 조선독립동맹 결성
● 1943년 9월 東條英機 수상 암살 미수 / 체포
● 1944년 3월 징역 10개월 / 집행유예 4년
● 1944년 4월 국제 평론사 입사 / 편집장
● 1945년 2월 귀국, 啓蒙義塾 개설 / 청년계몽운동 / 결혼
●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암살테러
● 1946년 1월 3일 엄항섭 지시, 한현우 / 유근배 / 백남석 평양행, 조선민주당 조만식 방문
● 1946년 1월 17일 서울 귀환
● 1946년 4월 9일 체포 / 구금 / 심문
● 1946년 5월 9일 살인 / 포고령 위반 기소
● 1946년 7월 4일 제1심 공판 시작
● 1946년 8월 말 제1심 판결, 한현우 / 유근배 무기징역, 나머지 단기 5~장기 10년 징역형
● 1946년 12월 옥중서간 압수 (중요단서)
● 1947년 2월 말 대법원 판결, 한현우 징역 15년, 김인성 / 김의현 징역 10년, 유근배 / 이창희 단기 5년~장기 10년형)
● 1950년 7월 14일 북한군 마포형무소 석방, 12월 渡日 / 밀항
● 1993년 일본인 처 / 자식 3명, 동경 目黑 거주, 新亞통신사 번역 (북한방송 / 연합통신), 박대통령 후의 전과말소 / 1988년 올림픽 보도 = 장관 표창등!
오염된 기억
1. 송진우는 우리 민족이 근대국가와 민주정치를 가져 보지 못하였음으로 信託統治는 선진국의 지도를 받는 訓政의 의미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용납될 수 없는 妄想이다.
2. 한민당과··· 오늘날까지 그(송진우)가 신탁통치에 찬성한 사실이 없었다고 부정··· 송진우는 3국외상회의의 결의가 정식으로 알려지기 전부터 우리 민족이 신탁통치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3. 송진우는 그(여운형)에 대항하기 위해 임정을 중심으로 한 독립체제를 만드는 것이 順理··· 그런데 임정 용인들의 환국하여 독립체제의 조직운동을 시작하자··· 反臨政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4. 3국외상회의가···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을 때 그가 그 결의에 찬성하고 협조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3국외상회의에 찬성하고 협조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3국외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의를 듣고 즉시 그 결의 지지 수락을 한민당의 黨意로서 결정하였다.
5. 미독립 상태 우리나라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것은 매국노에 지나지 못하는데 그 매국노를 숙청한 애국청년에게 무슨 죄가 있나··· 무죄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6. 마포형무소 간부직원들을 초대하여 김구 주석은 나를 의열청년이라 찬양하고 법률상 죄인이라고 하나 그 정신은 알아줘야 한다··· 잘 봐주라 부탁하였다.
《동아일보》 1993년 2월 24일자
암살교사범 전백
● 경남 양산군 출생, 본명 전병구,
● 중국 건국광동대학 문과 / 철학과 졸업
● 중국 국민당 정부 "藍의사" 소속 활동
● 1945년 12월 永和기업사(해운) 사장
● 1945년 10월 서울, 한현우 / 전백, 첫대면 / 의기투합,
"정치적 야심가를 제거해서 정치풍토를 바로잡자"
여운형 / 박헌영 암살, 29일 계획변경 송진우 암살!
● 1945년 12월 29일 신당동 전백 자택, 실행자 등 8인 회합, 거사자금 10만 원 / 99식 권총 지급
● 1946년 7월 5일 수사과장 노덕술 수사대 점거
● 1946년 9월 3일 제1회 공판 / 9월 13일 제2회 공판
● 1946년 10월 선고공판, 살인방조 / 무기 불법 소지죄 5년형 선고 / 상고, 대법원 선고 5년형
강원룡 목사
해방 정국에 엄청난 충격을 준 그의 암살사건은 임정계에서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소문을 퍼뜨리던 차에 일어난 것으로서 분명히 경교장회의에서 그가 한 발언과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사실 비난을 받던 송진우같은 사람이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합리적인 판단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데 내 생각이다··· 만약 그때 우리가 굴욕을 참고 식탁통치를 받아들였다면 분단상황도 극복하고 탁치가 끝난 후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웠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리처드 로빈슨
국립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미국인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손에 취하여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덕망있는 혁명가이며 '무수한 암살음모의 장본인'인 김구는 무력과 폭력을 신뢰하였다. 그의 금욕적이며 엄격하고 얽은 얼굴 모습은 가죽과 같이 어두운 얼굴 빛을 가진 대초원의 인디안의 모습과 닮았다.
《미국의 배반》 1988년, 78 / 115쪽
브루스 커밍스
김구는 송진우로 하여금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전히 미국 치하의 후견 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 어쨌든간에 회답은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저력을 받았다(29일 ?). 송진우를 죽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김구는 중국에서의 공적때문에 여기저기서 '刺客(killer)'이라 불렸다. 그러나 하지는 김구에게서 별로 감명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김구의 첫 번째 중요한 행동은 한국민주당 당수인 송진우의 암살을 공작함으로써 '자객'이라는 칭호가 사실무근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한국전쟁의 기원》 1986년, 286~287쪽
도진순
12월 29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을 불러 자제를, 하지는 그가 신뢰하는 자문위원 송진우를 불러 임시정부에 대한 설득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하지의 특사격인 송진우는 그 이튿날 새벽 암살되었고···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1946년 정초(1월 1일) 김구에게 임시정부식 반탁운동을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1977년, 64쪽
7. 갈무리
1) 송진우! 그는 찬탁론자였는가? 김구 = 반탁 / 반미, 송진우 = 반탁 / 친미(訓政), 人共타도 = 經世家적 반탁론자!
2) 송진우! 그는 인물인가? 친일 내셔널리스트, 친미 반공주의 이념 창시자, 보수 우익의 거두, 대한민국 건국의 대부!
3) 송진우 암살, 未濟사건인가? 주범은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교사한 암살 테러!
4) 김구, 민족통일 운동의 아이콘인가? 맹목적인 반탁운동, 남북 분단의 원흉, 북한 정권 성립에 기여
https://www.youtube.com/watch?v=vlWISF3mE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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