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구 신화 부록

김구 신화 부록 2편 제왕을 꿈꾸는 김구

드무2 2021. 8. 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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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부록 2편 제왕을 꿈꾸는 김구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1년 7월 19일 방송

 

 

 

 

 

 

 

 

 

          1. 제왕의 귀환          

 

 

 

 

 

 

          김구, 제왕을 행세하다!          

 

● 환국 후 김구가 머무르는 경교장은 당시 서울에서 제일가는 호화주택이었다. 나는 심산 김창숙의 소개로 경교장 2층의 백범 방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경교장 2층 백범 방은 황금색 비단으로 도배한 방이었다.

 

● 백범은 정말로 입담이 없는 사람이었다. 홍명희는 학식이 많아 화제가 풍부하고 이야기도 잘했다. 백범은 화제가 별로 없고 어찌하면 대한임정의 법통을 이 나라에 확립할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양복을 잘 안 입고 늘 한복을 입고 있었다.

 

          박갑동 (1991),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64쪽          

 

 

 

 

 

 

 

 

 

 

          숙망하던 황제 노릇!          

 

● 임정 요인들이 분열을 조장하고 있고, 王家式的, 專制君主的 생활 분위기에 있다. 근로대중과 접촉하라!고 질타하였다. <해방일보> 1945년 12월 14일자

 

●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북한의 거리와 골목에 뿌려진 "살인강도단 두목 김구를 타도하자!"는 삐라, "삼천만이 다 죽더라도 숙망이던 황제 노릇해 보고야 말겠다"는 만화가 삽인된 비방 벽보

 

          조규하 외 (1972), 『남북의 대화』, 韓얼문고, 334쪽          

 

 

 

 

 

 

          한독당 당원을 석방하라고!          

 

1948년 5월 3일, 김구 / 김일상 회담

 

김구 : 감옥에 있는 우리 당원들을 석방시켜라.

 

김일성 : 한독당 당원이어서 체포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테러분자들이다.

 

김구 : 태러분자들이라면 석방시키지 말라.

 

          김영중 편 (2016), 『레베데프 비망록』, 해동인쇄, 132쪽          

 

 

 

          제왕으로 귀환한 김구!          

 

● 1945년 11월 24일 여운형의 경교장 방문, 수위대의 불법 침입자 간주, 신체 수색과 재입장, 임정요인을 면회, 대부분 수모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 이후 몽양을 다시 경교장에 갈 용기와 열심히 없었다. 그 후 하지 처소에서 김구를 만나서 "해외 풍상에 머리가 희었다"고 정답게 인사를 하였지만, 김구의 태도는 냉담하였다.

 

● 그 후 김구가 각 정당 대표를 만날 때 김구는 몽양더러 "다른 사람들이 날더러 그대를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내가 특별히 생각하여 그대를 만나 주노라" 하였다.

 

          이만규 (1946), 『여운형투쟁사』, 민주문화사, 258쪽          

 

 

 

          그레고리 핸더슨의 증언          

 

1948년 늦은 가을 서대문 근처에 자리잡은 한 벼락부자의 정원은 커다란 바위로 꾸며져 있었다. 이집 주인 최창학 씨는 광산을 발견해서 일본 사람들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집과 주인은 어쩐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상민임을 과시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를 뵙는 장소로는 어쩐지 이상한 곳 같았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나타났다. 그의 조용한 자태는 방안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의 너무도 흰두루마기는 주단으로 덮인 벽과는 아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마치 해가 지는 바다에서 보는 흰 돛 같았다. 이런 소박한 옷 위로 크고도 검은 머리가 목도 거의 없이 솟아 있었다. 그것은 곧 천둥을 칠 먹구름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1948년"이라는 시점에서도 그와 정면 대좌할 미국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 명성 있는 암살자가 나에게는 아무런 두려움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972년 8월 6일자          

 

 

 

 

 

 

          2. 제왕의 셈법          

 

 

 

          이정식 교수의 주장          

 

시종일관 임시정부의 명목을 유지해온 인물을 꼽는다면 역시 김구이다. 복잡다단한 해외운동에서 임시정부의 명목을 지속한 것만으로 애국심을 측정할 수는 없으나, 김구의 두드러진 불요불굴성은 그의 책임감과 의리감을 잘 보여 준다··· 그의 굳센 의리감과 책임감이 그를 민족분열 영구화 반대의 길로, 그리고 남북협상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이정식 (2006),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400쪽          

 

 

 

 

 

 

          3천만 동포에거 泣告함 (1948. 2. 10)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를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매국 매족의 일진회식의 선각자일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몰아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유 3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1987), 『김구주석최근언론집』, 8쪽          

 

 

 

 

 

 

          백강 조경한의 증언          

 

하루는 일파(一波) 엄항섭(嚴恒燮)이 찾아와 하는 말이 남북협상을 해야겠다고 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첫째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면 장덕수 피살사건 여파로 한독당이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에 도저히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 정치적 출로(出路)로 남북회담이 요청되고, 둘째 양 김 (김구 · 김규식) 명의로 유엔에 절략서(節略書)를 보냄과 동시에 김일성에게 남북 총선거를 제의하면 남북한을 통한 총선거가 가능하며 그렇게 되면 김구 선생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으니 남북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더니 임정 주불(駐佛) 연락원으로 있었던 서영해(徐嶺海, 월북 행방불명)라는 사람이 김구 선생을 찾아와서 김일성도 협상에 찬성하며 독립운동 경력이 짧아서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자꾸 종용하고 있다는 말까지 털어 놓아요.

 

          조규하 외 (1972), 『남북의 대화』, 韓얼문고, 356쪽          

 

 

 

          3. 어리석은 제왕          

 

 

 

 

 

 

          유진오의 회고          

 

당시의 남북협상은 공산주의를 모르고 벌인 일종의 도의적 구국운동으로 밖에 볼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의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아마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도 협상이 성공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갔을 것입니다. 성공은 안될 줄 알면서도 통일에 대한 노력을 표기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분들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또 김일성의 책동에 의해 공산주의자와는 어떠한 타협도 이루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보아도 협상이 성공할 수 없었지요.

 

          조규하 외 (1972), 『남북의 대화』, 韓얼문고, 357쪽          

 

 

 

 

 

 

 

          이철승의 서글픔          

 

전학련(全學聯)에 관계하고 있을 때인데 남북협상이 있기 직전 하루는 이박사가 불러서 이화장에 들어 갔었어요. 나를 보더니 곧 5 · 10총선거가 실시되는데 문맹이 많으니 선거 계몽운동을 펴 달라고 요청해요. 그때까지 전학련(전국학생연맹)은 민족 진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다 같이 추종하고 있었는데 이박사의 말에 따라 선거 계몽운동에 나서면 결과적으로 남한만의 단선 단정을 찬동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에 대해서는 반대하게 되는 결과가 됐습니다. 그래서 두 지도자 중에 어느 한 분을 택해야 되는 기로에 서게 됐는데 한민당 인사를 통한 이박사의 설득도 있고 해서 이박사 노선을 따라 1백여 학생들을 시골로 내려 보냈지요. 해방 후 3년간 한결같이 모시던 두 분이 남북협상을 계기로 분열된 것을 피부로 느끼고 서글펐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조규하 외 (1972),  『남북의 대화』, 韓얼문고, 358쪽          

 

 

 

 

 

 

 

 

 

          이승만 박사의 장탄식!          

 

1948년 4월 남북협상과 관련해서 이승만은 "남북회담 문제는 세계에서 소련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술책에 불과한 것으로 간파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지도자 (김구와 김규식)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 회담을 지금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蒙昧)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일자          

 

 

 

 

          이승만의 눈물!          

 

하루는 김활란 박사와 함께 이화장에 들렸더니 이박사가 오른손 장지를 호호 불고 있었어요. 그분은 급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손을 부시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보고는 또 무슨 난처한 일이 생겼구나 직감했지요. 한참 눈물을 글썽거리고 계시더니 하시는 말이 남북 협상이 논의되고 있는데 지식층이 저쪽 편을 많이 들어 잘못하면 고립될 위험이 있다. "나라고 왜 통일 정부를 원하지 않겠나. 그러나 지금 김일성이는 진짜 김일성이가 아닌데 백범이 가서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약을 잘못 썼다간 상반신조차 마비된다"고 말씀하신 후 적화통일되면 소련의 노예 생활을 하면 시베리아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한다는 등의 말을 해요. 남북협상에 대해서 나로서는 확고한 견해가 없었던 때인데 그날 이박사의 눈물을 보고서 나도 남북 협상은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조규하 외 (1972), 『남북의 대화』, 韓얼문고, 297쪽.          

 

 

 

 

 

 

          갈무리          

 

● 1945년 11월 23일 환국 이래 상놈본색 김구는 '제왕의 귀환'을 행세하고 거들먹거렸다.

 

● 1948년 남북협상은 어리석은 김구가 연출하고 주연했던 희대의 정치적 막장극에 불과했다.

 

● 테러의 수괴 김구를 민족의 거성이요, 민국의 국부로 환상하는 한국인들, 제 정신들이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4_JrC7-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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