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구 신화 부록

김구 신화 부록 7편 안중근 동생, 안공근 암살의 진실

드무2 2021. 8. 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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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 부록 7편 안중근 동생, 안공근 암살의 진실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1년 8월 23일 방송

 

 

 

 

 

 

 

 

 

김구 신화 부록 (7)

 

안중근 동생, 안공근 암살의 진실

 

2021년 8월 23일 (월)

 

정안기

 

 

 

          1. 개요와 자료          

 

 

 

 

 

 

 

 

 

 

          개요          

 

● 안중근 둘째 동생, 모스크바 유학 / 6개 국어 구사, 임정 유력자, 이봉창 / 윤봉깅 투탄 및 여러 암살 사건 기획자, 김구의 오른팔

● 1938년 5월 7일 남목청 사건(3당 요인 저격사건), 1938년 7월 한국국민당 / 김구파 축출, 토사구팽, 박찬익 재등장

● 1939년 5월 중경, 안공근 행방불명 / 암살, 암살 사주범 = 김구, 암살자 = 정화암, 사체처리 = 유진동(김구 주치의)

 

 

 

 

 

 

 

 

 

          안중근 집안          

 

● 1919년 10월 임시정부, 안중근 유족, 상하이 이주 권유, 생활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함, 유족들은 중국 각계 지원을 받아 생계 유지

● 독실한 카톨릭 집안, 두터운 신앙심, 상하이 중국 카톨릭 관계자들과 두터운 교류, 가족들 대부분은 머리가 좋았고, 다들 몇 개의 외국어 구사

● 자녀들 대부분, 해외 유학 및 대학 진학, 풍부한 재능(외국어, 스포츠, 미술, 선박학) 등

 

          김자동(2012), 『상하이 일기』, 196쪽          

 

 

 

 

 

 

          1938년 7월 이전 <비서 3인방>          

안공근

엄항섭

박찬익

 

 

 

           1938년 7월 이후 <비서 3인방>           

엄항섭

박찬익

민필호

 

 

 

 

 

 

 

長江日記

정정화 지음

 

● 東農 김가진의 며느리

● 부군은 성엄 김의한

● 장남은 김자동

 

 

 

 

 

 

 

南坡 朴贊翊 傳記

 

 

 

          2. 안공근은 누구인가?          

 

 

 

          이력 (1)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 안테훈 / 조마리아 3남 1녀의 3남

1897년 천주교 세례, 세례명 요한, 호는 신암(信庵)

1899년 일어학교 입학

1906년 부친 사망, 진남포 이주, 삼흥학교(영어)

1907년 경성사범학교 속성과(6개월) 수료

1908년 진남포보통학교 교사(부훈도 / 판임관)

1909년 9월 안중근 사건, 안공근 체포 / 구금

1910년 2월 안중근 공판 참석

1910년 3월 25일 안중근 면회, 학업재질 / 독려

1910년 5월 북간도 / 블라디보스톡 이주

1912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 러시아어 공부

1914년 4월 니콜리스크 귀환, 상점 경영(자본금 4,000원)

1914년 말 밀정 강정국 처단

1919년 니콜 리스크 농장 개설, 최초 벼농사 성공(250석 수확)

1920년 1월 상해 임정, 모스크바 외교 특사 선임

 

 

 

          이력 (2)          

 

1920년 5월 상해 도착 / 7월 러시아 대사 취임

1921년 4월 상해 임정 의정원 의원, 외무차장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 임시정부 독립운동 보고

1925년 7월 프랑스조계 공무국, 임시정부 유력자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 탄핵 추진

1926년 상해한인교민단장, "8인단" 조직, 황해도 기호파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집행의원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연맹(무정부주의) 결성

1932년 한인애국단 결성, 이봉창 / 윤봉길 투탄사건 기획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 독립군" 창설, "김구혁명40주년" 기념식 기획 / 거행

1935년 2월 학생훈련소(특무대예비훈련소) 학생 총감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 창당, 임시의정원 의원

1937년 5월 남목청 사건 발생 / 7월 한국국민당 퇴출

1939년 중순경 중경에서 실종 / 암살(김구 소행)

 

 

 

          주위의 평가          

 

● 김구의 입과 머리, 참모 / 대리인, 김구파 혁명공작 기획 / 실행, 중국 정부의 임정 지원금 수령 / 배분

● 적극적인 성품, 백범의 오른팔, 가장 신임하는 동지, 현상금 걸린 김구, 활동의 부자유, 서투른 중국어, 안공근 지원과 협력이 불가결

● 고서화 및 골동품에 높은 안목, 1월짜리 물건을 28원에 팔아 넘기는 사업수완, 상해에서 형 안중근 일로 말썽, 공금 챙겨 잠적, 재주가 많고 말 잘하는 사람

●굉장히 협잡꾼들이지만 수완이 능하고 국제정보에 능한 사람, 김구 선생을 둘러메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김구 선생 접근을 차단

 

 

 

          3. 기억의 분식          

 

 

 

 

 

 

          <백범일지>           

 

● 1937년 11월(남경 ㅡ> 장사)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김아려)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362쪽)

● 1938년 7월(장사 ㅡ> 광주) 김구 홍콩 출장, 상해 안중근 부인 / 가족의 이주 大問題, 그들(안정근 / 안공근)이 난색을 표명, "양반의 집에서 불이나면 사당의 신주부터 옮겨내 온다는데, 우리가 혁명가로 의사 부인을 적치 구역에서 구출하는 것 이상으로 긴급한 일은 없다"며 호통을 쳤다.(374쪽)

 

          김구(2012), 『백범일지』, 362 / 374쪽.          

 

 

 

          4. 진상의 파편들          

 

 

 

          백찬기 증언          

 

김구는 매월 남경정부로부터 大洋銀 2,500원을 받고 있다. 상당히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김구와 안공근 등이 적당히 하는 모양이며, 의외로 혁명운동에는 돈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안공근은 금년 55~56세 항상 주거지를 숨기고 있다. 김구파 제1세력가이고, 가장 인기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김구의 참모이자 또한 김구의 대리로서 일체를 처리한다. 김구파의 혁명운동은 모두 이 안공근의 의도에서 나온다고 한다. 한 달에 인력거 비용만 40원이나 된다는 소문으로 생활의 호화로움을 알 수 있다. 김구파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니 자연스럽게 부하의 신망도 엷어진다. 이 점에서 의열단과는 정반대이며, 의열단은 운동을 위해서는 상당한 돈을 쓴다고 한다.

 

          백찬기(2000),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3)』, 208쪽.          

 

 

 

          정화암 증언 (1)          

 

● 옥관빈 처단, 서간단 성명서, 백범의 대립 / 갈등, 양여주(노종균) / 엄형순 자신의 조직에서 빼내 '한인애국단 데려가는 공작 획책, 양여주 문제를 둘러싼 안공근의 획책

● 우리 남화연맹과 임정 사이에 안공근의 장난이 작용했어요. 백범 밑에서 누가 춤을 추었는가 하면 안공근이 주었어요. 백범하고 그렇게 사이가 가까운 임정의 박남파와 백범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했던 것도 안공근입니다. 백범을 둘러메고 모든 것을 하겠다는 이런 야심을 갖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배타적이었지요.

● 내(정화암)가 살인청부업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백범이 누구(박남파)를 죽이라 시켰다고 해서 그런 행동을 하겠소? 안공근이 또 개입해요.

 

          이정식 편 (1988),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408~414쪽.          

 

 

 

          정화암 증언 (2)          

 

안공근의 전횡과 관련해서 "한인애국단의 양여주와 김동우가 나를 찾아와 백범과 임정의 실태를 자세히 털어 놓으며 그쪽에 실망했으나 뜻 맞는 청년들과 같이 남화연맹으로 합류하겠다는 겁니다. 백범은 완전히 뒤에 앉아 있고 안공근이 앞에 나와 좌지우지 하는 통에 정말 총 들고 목숨 걸고 행동하는 자신들의 존재가 없더라는 겁니다. 양여주와 20여 명의 젊은이들, 대개는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이었고, 한인애국단에 들어갔다가 실망해서 집단으로 탈퇴해서 상해로 왔습니다. 양여주는 우리가 끝내 안 받아주니까 김원봉의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36년 3월 상해의열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국내 서대문 감옥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정식 편 (1988),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408~412쪽.          

 

 

 

          정화암 증언 (3)          

 

김구는 비로서 나와 안공근이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황이 바뀌자 안공근은 나름대로 다른 공작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정부 정보기관 藍衣社의 대립(戴立)이란 사랑과 손잡고 김구를 몰아내고 자신의 형 안정근을 내세우려 계략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김구는 즉시 안공근이 맡았던 중국정부와의 모든 연락과 교섭업무 일체를 성암 이광에게 맡겼다. 그리고 안공근의 모든 활동을 봉쇄하고 그가 쓰던 집까지 몰수해 버렸다. 그 후 안공근은 중경에서 병원을 경영하던 교포 유모 집에 자주 내왕했는데 그 뒤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정화암 (1992), 『정화암 회고록』, 177쪽.          

 

 

 

          박찬익 증언          

 

● 1933년 5월 중순 항주, 윤봉길 사건 이후 제1회 국무회의, 외부 후원금을 둘러싼 암류 / 의혹, 중국 조야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금의 행방, 대한교민단에 보낸 성금의 행방, 상해시상회가 헌금한 윤봉길 / 안창호 가족 생활보조비 행방 등

● 1933년 5월말 임시정부 임시판공처 습격사건(항주사건) 발생, 김철 조카 김석 안창호 비난 성명서 / 자금횡령, 박창세 / 김동우 / 안경근, 김철 / 조소항 / 김석 등 구타 / 자금몰수, 1933년 1월 한국독립당 출당, 1934년 6월 백범계 축출

● 1938년 7월 장사 ㅡ> 광주 이동, 백범 사과, 중국과 교섭, 안공근 잘못된 일 처리, "사람 잘못 쓴 죄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담배를 끊기로 작심했소" 임정 복귀!

 

          남파박찬익전기간행윙원회 (1989), 『남파 박찬익 傳記』, 221쪽          

 

 

 

2021년 8월 3일자 대담 영상

 

 

 

          남목청 사건          

 

● 1938년 5월 6일 중국 長沙 南木廳 2층(조선혁명당 당사, 김구(한국국민당), 현익철 / 유동열 / 이청천(조선혁명당), 저격사건

● 범인은 조선혁명당 제명자 이운환의 단독 범행, 범행 동기는 생활비 배분을 둘러싼 백범계와 비백범계의 차별대우

● 임정 내홍 / 사건 수습, 생활비 차등배분의 책임자 색출 불가피, 희생양 만들기 = 안공근!

 

 

 

          김자동 회고 (1)          

 

1939년 여름 밤, 백범 주치의 유진동 선생 부인 강영파 여사가 찾아와서 어머니와 이야기와 나누었던 이야기이다. "언젠가 일단의 한인 청년들이 밤에 유진동 병원으로 안공근의 시신을 들고 왔는데 유 선생이 중국인 내연녀와 함께 그 시신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유 선생은 백범의 주치의이자 백범과 각별한 사이였다. 변사체를 아무렇게나 '처리'해주는 병원은 그 어디에도 없다. 특수관계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안공근의 시신을 처리한 후 유 선생은 백범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 역시 일종의 공범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안공근 살해 동기는 아마도 돈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김자동 (2018),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106~107쪽.          

 

 

 

          김자동 회고 (2)          

 

지난 60여년 동안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2년 전(2000년)으로 기억하는데 6월 26일 백범 선생 기일에 참배하려 효창공원 안으로 올라가던 중 두 사람을 중간에서 만났는데, 나에게 "안공근씨의 시신을 유진동씨 병원에서 처리했다는 것을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무척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네요"하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김자동 (2012), 『상하이 일기』, 216쪽.          

 

 

 

          구익균 증언 (1)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이가 왜 죽었나요? "이 사람이 굉장히 좀 협잡꾼들이지만 수완이 능하고 국제정보를 능한 사람인데, 김구 선생을 둘러 메고 다녀, 다른 사람은 김구 선생을 찾아가려고 해도 갈 수 없어. 김구 비서 3인방(엄항섭, 박남파, 민필호)이 무정부주의자한테 넘겨서 안공근을 청부살인을 했어. 김인이가 이 내용을 안단 말이야. "그(안공근)가 굉장히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하고 했어" 노백린의 아들 노태준이 김구의 맏아들 김인에게 들었다고 했어. "정화암은 자기가 하지 않지만, 무정부주의자가 맡아 가지고 청부살인을 했다는 그런 얘기야. 이것은 비화인데 딴 사람은 몰라"

 

    국사편찬위원회(2013), 『독립운동과 징병, 식민경험의 두 갈래 길』    

 

 

 

          구익균 증언 (2)          

 

그래서 암살방법은요? "그거야 가장 상대방의 가까운 사람을 이용해서 같이 저녁을 먹자 그래 가지고 하는데, 중국 집에 가서 중국 방을 하나 얻는다 말이야. 그래 가지고 술 먹고 아주 좋게 지내는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에는 너 좀 보자고 끌어내어서, 딴 걸고 목을 매달아 죽이지. 문 앞에 들어오면 뭐 돌로 쌓아놓은 길이 있는데, 그걸 미리 파놓아 가지고 사랑하나 묻고 나오는 거야."

 

    국사편찬위원회(2013), 『독립운동과 징병, 식민 경험의 두 갈래 길』    

 

 

 

          6. 마무리           

 

 

 

● 안중근 둘째 동생, 임정 유력자, 김구 오른팔 안공근, 1939년 5월 중경, 행방 묘연, 행방불명이 아닌 명백한 암살사건!

● 암살 사주범 = 김구 / 비서3인방(엄항섭 / 박찬익 / 민필호), 실행범 = 남화한인연뱅 맹주 정화암(살인청부업자), 사체 처리 = 유진동(김구 주치의)

● 암살 동기, 1937년 5월 7일 남목청 사건, 생활비 차별 배분, 안공근 축출조치, 안공근 반발 / 모종의 획책, 김구의 선제적 대응(살인)

● 김구 = 단순 / 무식 / 과격의 재확인, 김구 리더쉽 = "군림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ufXrTrTCE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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