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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 취소 검토 박진경 대령 주요 쟁점들 '팩트 체크' 해보니]

드무2 2026. 1. 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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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 취소 검토 박진경 대령 주요 쟁점들 '팩트 체크' 해보니]

 

 

 

제주 4 · 3사건 수습 임무를 받고 부임한 박진경 (맨 오른쪽) 9연대장이 참모들과 함께 촬영했다. / 조선일보 DB

 

 

 

박진경이 '제주 30만 희생' 발언? "암살범 외엔 그런 증언한 부하 없어"

 

 

 

제주도 근무 기간은 불과 '43일'

부대 정비에도 빠듯한 기간

미군 모르게 단독 작전 불가능

 

남로당, 처음부터 박 대령 암살 계획

'부임 나흘 뒤 숙청 모의' 증거 있어

집무실 야전 침대서 취침 중 저격당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1948년 제주 4 · 3 사건 초기에 수습을 맡았던 박진경 (1920 ~ 1948) 대령의 국가 유공자 지정 취소 검토를 지시한 것에 대해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부임 한 달여 만에 남로당의 사주로 암살당한 박 대령을 ‘학살자’ 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시 제주 4 · 3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세력이 박 대령 암살에 성공한 후 그를 악마화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무현 정부 때 나온 ‘제주4 ·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와 나종삼 (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 · 박철균 (예비역 육군 준장, 박 대령의 손자) 공저 ‘제주 4 · 3 사건과 박진경 대령’, 제민일보 취재반의 ‘4 · 3은 말한다’ 등의 자료를 근거로, 박진경 대령과 관련한 쟁점 다섯 가지에 대해 짚어 본다.

 

 

①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희생시켰나?

 

근거 없는 말이다. 박진경 대령은 4 · 3 사건 수습 임무를 맡아 제주도에 조선경비대 (국군의 전신) 9연대장으로 부임했다가 숙소에서 남로당 세포 조직인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야전 침대에서 취침 중 총에 맞았다. 그가 9연대장으로 활동한 기간은 1948년 5월 6일부터 6월 18일까지 43일에 불과했다. 이 기간 경비대가 남로당 무장대를 사살한 인원은 14명뿐이었다. 경찰과 합동 토벌을 벌인 작전까지 더해도 25명이었다 (‘4 · 3은 말한다’). 이 기간 비무장 민간인 살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4 · 3 당시 민간인 피해가 아예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암살범 중 한 명인 손순호는 법정에서 자신들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려고 ‘5월 1일 오라리에서 남녀노소의 시체를 봤다’ 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박 대령 부임 전의 일이었다. 4 · 3 당시 민간인 피해는 1948년 10월 전남 여수 14연대 반란 이후 군의 ‘초토화 작전’ 이 본격화된 이후 주로 발생했다.

연구자들은 부임 후 부대 정비를 하고 작전 임무를 수행하기도 빠듯했을 그 기간에 ‘양민 학살’ 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고 본다. 당시는 미 군정 시절이었기 때문에 경비대의 작전은 미군의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박 대령이 브라운 대령 모르게 양민을 상대로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② 박 대령이 ‘30만 도민을 희생해도 좋다’ 고 말했다는데?

 

박 대령이 ‘폭동 진압을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고 했다는 ‘30만 희생설’ 은 암살범 중 한 명인 손순호 하사의 법정 진술에서 나온 말이다. 손 하사는 위생병 신분으로 암살에 가담했다 (자유신문 1948년 7월 13일 자). 연대장인 박 대령이 이와 같은 작전 방침을 세웠고, 이를 위생병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대대장 · 소대장 등 지휘관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박 대령과 같이 근무한 채명신, 이세호, 김종면, 류근창 등 부하들의 증언 어디에서도 ‘30만 도민 희생’ 발언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암살 주범인 문상길 중위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김달삼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30만 도민을 위해서 박 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 말했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4일 자) 연구자들은 이것을 손순호가 박 대령이 한 말로 바꿔 진술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③ ‘토벌 지휘자’ 로서 제주도민을 공격한 게 아닌가?

 

박 대령이 부임한 시기는 4 · 3 발생 초기였다. 그는 도민을 탄압하기 위해 부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남로당 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 · 10 총선거를 방해하려고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선거 방해를 위해 민간인들을 강제로 산으로 데려갔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채명신 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박 대령은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고 증언했다.

 

 

④ 미군 정보 보고서에 ‘5000여 명이 체포됐다’ 고 나온다는데?

 

정확히는 1948년 7월 2일 주한 미 육군사령부 민간인 고문관 제이콥스의 보고서 ‘제주도 소요 사태’ 로, 박진경 대령 재임 기간 경찰과 경비대에 체포된 주민이 3000여 명이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대부분 군 · 경 · 미군 합동 심문팀에 의해 조사받고 석방됐다. 유격 부대에 대한 정보 획득과 대공 용의점 등을 파악하기 위한 합동 심문은 당시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절차였다. 대부분 5 · 10 선거를 보이콧하려는 남로당에 의해 강제로 입산했다가 미처 하산하지 못한 주민들이었다.

 

 

⑤ 암살범들은 ‘박진경 대령으로부터 도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거사한 것’ 이라고 했는데?

 

박진경 대령이 부임한 지 불과 나흘 뒤인 5월 10일, 남로당 측의 ‘제주도 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 는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썼다. 처음부터 박진경 대령의 암살을 획책했던 것이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12월 1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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