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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9

[연애의 법칙]

[연애의 법칙]    일러스트 = 이철원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하얀 발가락으로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 선수처럼 ㅡ 진은영 (1970 ~)    향기가 백 리를 간다는 백리향 잎을 만지던 손가락으로 연인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어 만지는, 이 시의 도입부는 감미롭고 아름답다. 그 향기는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의 빛나는 시간에 은은하게 머..

[둘레]

[둘레]    일러스트 = 김하경    둘레 산은산빛이 있어 좋다먼 산 가차운 산가차운 산에버들꽃이 흩날린다먼 산에저녁 해가 부시다아, 산은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ㅡ 박용래 (1925 ~ 1980)   요즘 산빛이 참 좋다. 풀이나 나무에 새로 돋은 싹은 미려 (美麗)하다. 완두콩 빛깔이다. 그렇다고 산빛이 한 가지의 빛깔만을 띠는 것은 아니다. 산벚꽃은 피어 산빛을 보탠다. 송화는 피어 산빛을 보탠다. 작은 풀꽃도 산빛을 보탠다. 봄의 산빛은 샘물이 솟아 나오는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새뜻한 기운이 찰찰 넘친다. 그에 맞춰 그늘도 자리를 차차 넓히며 산내 (山內)를 흐른다. 시인은 가까운 산과 먼 산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꽃이 봄바람에 이쪽저쪽으로 날린다. 산등성이엔 아름다운 잔광 (..

[돌멩이들]

[돌멩이들]     일러스트 = 양진경     돌멩이들 바닷소리 새까만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책상 위에 풀어놓고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혼자 매인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낮달처럼저나 나나살아간다는 것이,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ㅡ 장석남 (1965 ~)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까만 돌의 표면에는 물결무늬가 흐르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몽돌이며 모서리가 덜 깎인 돌, 그리고 조각돌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돌로 책장을 눌러놓거나 집 안 살림에 쓰는 물건의 평형을 맞추려고 아래를 받치기..

[농담 한 송이]

[농담 한 송이]    일러스트 = 양진경    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끝끝내 서럽고 싶다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살고 싶다 ㅡ 허수경 (1964 ~ 2018)    비탄에 잠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설움이 괴어 있다. 마음의 동굴에는 비애가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다. 빛이 차단된 우묵한 곳. 시인은 그 사람 마음의 공간을 바꾸려고 애쓴다. 그와 나 사이에 오가는 한마디 농담을 통해서. 화사한 꽃송이 같은 농말의 언어를 던지고 건넴으로써. 다른 시에서 썼듯이 그것을 “가장 마지막까지 반짝거릴 삶의 신호” 로 여겨서. 갓 딴 농담은 생것이므로 비릿할 테다. 게다가 농담은 곧 시들 것이다. ..

[성주 (城主)]

[성주 (城主)]    일러스트 = 김성규    성주 (城主)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그가 되었다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당신의 고독은 깊어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겸허히 기도하라 ㅡ 김남조 (1927 ~ 2023)    김남조 시인은 2020년에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 를 펴냈다. 시인의 열아홉 번째 출간 시집이었다. 이 시는 그 시집에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에게 시 (詩) 혹은 시심 (詩心)은 “한 덩이의 작은 흙이었으면서 기적처럼 풀씨가 돋아나는 신비를 보여..

[오 따뜻함이여]

[오 따뜻함이여]    일러스트 = 이철원    오 따뜻함이여 군밤 한 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어버스를 타고 무릎 위에 놨는데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갓 구운 군밤의 온기 ㅡ 순간나는 마냥 행복해진다.태양과 집과 화로와정다움과 품과 그리고나그네 길과······오, 모든 따뜻함이여행복의 원천이여. ㅡ정현종 (1939 ~)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큰눈이 오고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질 때 세상은 눈덩이와 얼음 속에 갇힌 듯해도 우리는 온기를 아주 잃지는 않는다. 시인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군밤 한 봉지에서 기쁨과 흐뭇함을 느낀다. 그러면서 이런 감정을 맛보았던 순간들을 떠올려 적는다. 동트는 빛이며 살림의 가옥이며 놋쇠 화로며 선심 (善心)이며 심지어 정처 없음까지도. 내게도 따뜻함을 안겨준 것이 많다. 꽃..

[눈과 강아지]

[눈과 강아지] 일러스트=양진경 눈과 강아지 지그재그로 발자국을 찍으며 강아지 한 마리 눈 위로 겅중겅중 달린다 컹컹컹컹 달린다 한 골목을 지나 또 다른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강아지는, 강아지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이제 강아지의 앞발도 보이지 않는다 ㅡ 최하림 (1939 ~ 2010) 최하림 시인은 ‘이슬방울’ 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슬 / 방울 / 속의 / 말간 / 세계 / 우산을 / 쓰고 / 들어가 / 봤으면”이라고 짧게 썼는데, 이 시에는 그야말로 ‘말간 세계’ 가 있다. 설레어서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동심도 들어 있다. 강아지도 흥분되어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강아지가 눈 위에 찍은 발자국을 보아도 그렇다. 펄펄 날리는 눈송이처럼 좌우로 뛴다. ‘겅..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일러스트 = 박상훈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녘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ㅡ 김종삼 (1921 ~ 1984) 김종삼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때는 등단한 지 서른 해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거의 서른 해 동안 시를 썼지만 시인은 정작 시를 모르고, 시인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겸손의 말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지만 시행을 따라가며 읽..

[눈보라]

[눈보라] 일러스트 = 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ㅡ 문태준 (1970 ~) ‘눈보라’ 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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