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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생이 기억하는 제주 4 · 3사건]

드무2 2026. 1. 3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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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생이 기억하는 제주 4 · 3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무장 폭동을 주도한 김달삼은 현재 북한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평양 애국열사릉’ 에 안장돼 있다. 묘비에는 ‘남조선 혁명가’ 라 적혀 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에서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됐고, 6 · 25전쟁 발발 후 북한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전쟁 전 남파돼 유격대 활동 중 죽었다는 설도 있다. / 우남위키

 

 

 

'최초의 계엄령' 에는 공산당의 선거방해 내란이 있었다

 

 

 

"면사무소 계장이라고

아들 셋이 군대 갔다고

남로당이 살해 · 방화"

 

'국가폭력' 사과했지만

남로당의 내란 폭력은

누구에게 사과 요구하나

 

 

 

나는 나이 많으신 분들과 옛날 얘기 나누기를 즐겨 한다. 책으로 보는 역사와 달리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현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오사카에서 제주도 출신 할머니들과 제주 4 · 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세 분이었는데 각각 1930년생 (김모), 1935년생 (김모), 1939년생 (한모)이었고, 그 중 35년생과 39년생, 두 분은 같은 마을 출신이었다. 제주 4 · 3에 대해 이렇게 생생한 증언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9년생 : 4 · 3이라고 아세요?

 

나 : 언론에서 듣기는 했죠. 그때 제주도 주민이 많이 희생됐다죠.

 

39년생 : 많이 죽은 정도가 아니에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도 죽었어.

 

나 : 누가 죽인 거죠?

 

35년생 : (끼어들며) 이북 사람들이 죽였지.

 

나 : 이북이라고요? 북한에서 사람이 왔다는 건가요?

 

39년생 : 이북 사람이 왔다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았다는 거지. 그때는 낮밤이 바뀌는 세상이었어. 낮에는 남쪽 세상이고 밤에는 이북 지령 받는 사람들 세상.

 

나 : 왜 죽인 거죠?

 

39년생 : 그때 우리 아버지가 면사무소 계장이었어. (35년생이 끼어들며) 아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멋쟁이였어. 난 아직도 기억 나.

 

나 : 무슨 인민재판 같은 걸 한 건가요?

 

39년생 : 그런 거 없어. 그냥 죽였어.

 

39년생: 그냥 막 찔러 죽였어.

 

나 : 죽창으로요?

 

39년생 : 죽창이 아니고.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쇠꼬챙이인데, 그걸 날카롭게 갈아서. 그걸로 그냥 막 찔러. 그때 내가 아홉 살이었는데 아직도 기억 나.

 

나 : 살아남은 가족은?

 

39년생 : 우리 엄마는 살았지. 그런데 나중에 엄마도 병으로 죽었어. 그때 참 힘들었다. 형제들이 도와줘서 살았지.

 

나: (35년생에게) 할머니네 가족들은요?

 

35년생 : 우린 죽은 사람은 없어. 놈들이 온다는 걸 알고 미리 도망갔거든. 대신 그 놈들이 우리 집을 홀랑 태웠지.

 

나 : 왜 그런 짓을?

 

35년생 : 내가 오빠가 셋인데, 다들 군대 가 있었거든. 군인 가족이라고 그런 거지.

 

나 : (30년생에게) 할머니네는 괜찮으셨어요?

 

30년생 : 그때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정유소를 했어요. 대신에 우리 사촌집에서 우리를 지켜 줬어. 사촌집이 경찰서장이었거든.

 

나 : 일본에는 왜 오신 건가요?

 

30년생 : 나중에 엄마가 아빠 따라 일본으로 가고 나서 나한테도 계속 오라고 하더라고. 그때 나는 졸업하고 제주 세관에 근무했는데 (제주도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더라고. 무서워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 뉴스1

 

 

 

매년 4월 초만 되면 제주4·3 사건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거기서 4 · 3은 ‘국가 폭력’ 이라고 회자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4 · 3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될 우리 역사의 슬픈 대목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 할머니들도 ‘국가 폭력’ 의 희생자인가?

단지 아버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고, 오빠들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살던 집이 방화당하고, 단지 세관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할까 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것도 ‘국가 폭력’ 인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도 내 경찰 지서 12개를 습격했고 경찰, 공무원,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 후로도 ‘선거에 참여했다’ 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이거나 공무원과 그 가족에 대한 학살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폭동의 목적은 선거 방해였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인하며 정부 자체를 상대로 항쟁한 것이다. 4 · 3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폭동의 목적 자체는 ‘내란’ 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당시 미 군정은 군사력으로 대응했다.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4월 17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했다. 적과의 교전 내지 극도의 사회질서 교란으로 경찰력만으로 질서 회복이 어려울 때 군대를 투입하는 것. 이것이 계엄의 정의라고 한다면 당시 미 군정은 남로당의 내란 시도에 대해 계엄령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후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1948년 10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 4 · 3 진압 명령을 거부했을 때, 우리 정부 역사상 최초의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계엄의 원래 뜻을 새긴다면, 남로당의 폭동에 대응해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기 위해 미 군정이 공포한 제주도 도령 (道令)이야말로 이 땅에 선포된 ‘최초의 계엄령’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담담한 어조로 끔찍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할머니들 앞에서 난 속으로 ‘미안합니다’ 를 수십 번 되뇌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봐야 했던 그 ‘아홉 살 소녀’ 를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제주 4 · 3의 ‘국가 폭력’ 에 대해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 사과한 바 있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 할머니들이 겪은 ‘공산 내란 세력의 잔인한 폭력’ 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할까? 공산당의 무자비한 폭력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엄존하는데, 이들을 위해서는 누구 하나 사과 요구조차 꺼내는 사람이 없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25년 4월 1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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