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믈관/서화관

[서화관] 01

드무2 2026. 5. 1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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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관] 01

 

 

 

 

 

 

 

 

 

 

서화실 안내도

 

서화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글씨와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현재 위치는 서화 1실의 입구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글씨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서화 2실, 3실, 4실 순서로 이동하며 우리 옛 그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서화 3실과 4실 사이에는 박물관의 대표 서화 작품을 재현한 입체그림을 감상하고 체험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서화 書畵,

글씨와 그림에 담긴 마을

 

서화는 글씨와 그림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서화동원 書畵同源' 이라 하여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글씨와 그림에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레 담기기 마련입니다. 글씨에는 인격이 묻어나고, 그림에는 사물과 자연에 대한 뜻이 담겨 있어 시 詩와 같다고 여겼습니다.

 

서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시대의 가치와 염원을 담아냈습니다.

이곳 서화실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며 옛 사람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글씨와 그림은 하나이다

글씨와 그림은 마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서거정 (1420 ~ 1488), 「제인재시고후 題仁齋詩藁後」

 

 

 

 

 

 

 

 

 

 

 

 

 

글씨의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글씨를 아끼고 감상해 왔습니다. 글씨에는 굵고 가는 획의 변화와 붓의 흐름과 멈춤이 드러나며, 글씨를 쓰는 속도와 호흡 또한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붓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바라보는 이는 글씨를 쓴 사람의 몸짓과 마음의 흐름을 자연스레 느끼게 됩니다.

글자 하나의 모양뿐만 아니라 글자 사이의 간격과 글씨의 구성, 먹과 여백이 이루는 관계에서 질서와 변화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글씨는 점과 획이 만들어내는 조형 예술로 중국에서는 서법 書法, 일본에서는 서도 書道라 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예 書藝라 부릅니다.

 

 

 

 

 

 

 

글씨를 쓰는 사람

 

예로부터 '서여기인 書如其人' 이라 하여 글씨는 그 사람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씨를 쓰고 익히는 일은 문인이나 학자에게 학문과 인격을 닦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타고난 자질과 오랜 수련을 거쳐 빼어난 경지를 이룬 명필 名筆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김생 金生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탄연 坦然, 조선시대의 안평대군 安平大君과 한호 韓濩, 김정희 金正喜 등 시대마다 많은 명칠이 나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들도 글씨를 많이 남겼습니다. 왕이 친히 쓴 글씨는 어필 御筆이라 하는데 보배롭게 소중하게 간직되었습니다.

 

 

 

 

 

 

 

 

 

 

 

 

 

 

 

 

선조가 쓴 '적선 積善' 탑본

宣祖御筆 搨本

 

선조 宣祖 (재위 1567 ~ 1608)

조선 朝鮮 | 종이에 탑본

 

'적선 積善' 은 '선을 쌓는 집안' 이라는 뜻으로 선조가 농암 聾巖 이현보 李賢輔 (1467 ~ 1555) 가문에 내린 글씨이다. 선조는 글씨를 잘썼던 임금 중 한 명이다. 굵고 강한 필획과 속도감있는 빠른 필치, 골기가 부각되는 글씨를 썼는데 이 작품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의 글씨는 조선 중기 서예가 석봉 石峯 한호 韓濩 (1543 ~ 1605)의 글씨와 비슷하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송설체 松雪體를 지향했던 조선 왕실의 서풍 書風은 조선 중기에 글자의 뼈대가 부각되는 양식으로 변화하였는데 여기엔 선조의 역할이 컸다. 이와 같은 대자 大字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선조의 딸 정명공주 貞明公主 (1603 ~ 1685)의 글씨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적선 積善

선묘어필 宣廟御筆

 

소장품번호 구 2372                                                                                                                         전시기간 2026. 5. 4. ~ 8. 2.

 

 

 

 

 

 

 

 

 

 

송시열이 쓴 '존주대의'

尊周大義

 

송시열 宋時烈 (1607 ~ 1689)

조선 朝鮮 1664년 | 종이에 먹

 

송시열은 대의명분에 따라 강직한 삶을 살았던 17세기 문신 文臣이자 대학자이며 사상가였다. 해서체로 크게 쓴 글씨는 석봉 石峯 한호 韓濩 (1543 ~ 1605)를 따른 굳세고 두터운 서체가 특징이다. 당시 조선이 주 周나라의 정도를 잇는 정통성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천명한 것으로 한족 오아조인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굳게 지키면서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를 배척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송시열의 소신과 17세기 조선의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조선 (해동)의 하늘과 땅에서, 주나라를 높이는 대의를 이어받는다

명 숭정갑진년 (1664) 5월 5일 은진 송시열 씀.

海東乾坤 尊周大義

歲皇明崇禎甲辰五月天中 恩津宋時烈書

 

인문 印文 「송시열신 宋時烈信」

 

소장품번호 덕수 5279                                                                                                                     전시기간 2026. 5. 4. ~ 8. 2.

 

 

 

 

 

 

 

 

 

 

 

 

 

 

 

 

 

 

 

행서 대련

行書對聯

 

이하응 李昰應 (1820 ~ 1898)

조선 朝鮮 1881년 | 종이에 먹

1981년 이홍근 기증

 

북송 北宋 문인 소식 蘇軾 (1037 ~ 1101)의 「석창서취묵당 石蒼舒醉墨堂」의 시 구절을 쓴 것으로 그의 거처였던 운현궁 노락당 기둥을 장식한 주련에도 쓰여 있다. 석파 石坡 이하응은 고종 高宗 (재위 1864 ~ 1907)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으로 봉해졌으며,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다. 필획이 힘차면서도 모난데 없는 형태미가 특징인 그의 글씨는 김정희 金正喜 (1786 ~ 1856)와 중국 청나라 옹방강 翁方綱 (1733 ~ 1818) 서예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내 글씨는 뜻으로 쓰는 것이지 본래 법식이 없다. 我書意造本無法

이 늙은이 가슴 속에도 시가 깃들어 있다. 此老胸中亦有詩

윤선생님의 부탁으로 썼으니, 바로 잡아 주십시오. 書應尹雅方家疋正

62세 석파 노인 石坡六十二臾

 

인문 印文 (제1폭) 「산부재고수부재심 山不在高水不在深」

                (제2폭) 「대원군장 大院君章」, 「석파 石坡」

 

소장품번호 동원 3533                                                                                                                     전시기간 2026. 5. 4. ~ 8. 2.

 

 

 

 

 

 

 

 

 

 

 

 

 

 

 

 

 

초서 대련

草書對聯

 

정학교 丁鶴喬 (1832 ~ 1914)

20세기 초 | 비단에 먹

 

정학교는 19세기 말 개성적인 글씨를 선보였던 서예가로 초서 草書와 예서 隸書에 뛰어났다. 이 초서 대련은 청 淸나라 유수 鈕琇 (1644 ~ 1704)가 지은 「음원우집계 吟園偶集啓」라는 글의 일부를 쓴 것으로, 속세와 단절된 삶을 즐기는 내용이 담겨있다. '칠십유년몽중 七十有年夢中' 이라는 인장으로 보아 그가 70대의 나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의 짜임새가 긴밀하고 행과 행 사이를 넓게 했으며 전체 여백도 넉넉하게 배치하였다. 리듬감이 풍부한 변화와 공간 표현, 글자의 마지막 부분을 가늘고 길게 처리하는 것은 정학교 글씨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소장품번호 본관 8228                                                                                                                     전시기간 2026. 5. 4. ~ 8. 2.

 

 

 

 

(제1폭)

작은 돌이 산을 이루니                        拳石爲山

어찌 길이 읍만 하고 절하지 않으랴       容有長揖不拜

화분의 꽃이 곁에서 도와주                  盆花作供

미인과 이웃이 된 줄 벌써 알겠네         已覺美人成鄰

 

몽인 정학교            夢人丁鶴喬

 

인문 印文

「몽중몽 夢中夢」「장학교인 丁鶴喬印」「칠십유년몽중 七十有年夢中」

 

(제2폭)

여덟 말을 마시고자 하니                        唫來八斗

구름이 술 실은 배를 감추었고,                雲封載酒之船

두 마리 오리가 날아오니                        飛到雙鳧

비가 꽃을 찾는 나막신 자국을 지웠네       洗問花之

 

몽인 정학교            夢人丁鶴喬

 

인문 印文

「몽중몽 夢中夢」「장학교인 丁鶴喬印」「칠십유년몽중 七十有年夢中」

 

 

 

 

 

 

 

 

 

 

돌에 새긴 영원한 글씨

 

옛사람들은 뛰어난 글씨를 돌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했습니다. 붓으로 쓴 명필의 글씨는 장인의 망치와 끌로 돌에 새겨집니다. 돌에 남은 글씨는 다시 종이에 먹으로 떠낸 탑본 搨本으로 제작되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예술적 생명을 이어 왔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남겨진 비석의 옛글씨를 탐구하면서 새로운 글씨를 모색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새겨진 수많은 미석은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이자 시대의 기록입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탑본

靈通寺 大覺國師碑 搨本

 

글 김부식 金富軾 (1075 ~ 1151) | 글씨 오언후 吳彦侯 (생몰년 미상)

새김 석종 碩從 (생몰년 미상)

비석 고려 高麗 1125년 | 종이에 탑본

 

고려 전기 화엄종의 고승이자 문종 文宗 (재위 1046 ~ 1083)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 義天 (1055 ~ 1101)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세운 비석의 탑본이다. 비문은 인종 仁宗 (재위 1122 ~ 1146)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이 지었고, 오언후가 단아한 해서 楷書로 글씨를 썼다. 의천이 출가한 영통사는 고려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개성에 있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폐사되었다.

비석도 오랫동안 방치되고 무분별한 탑본으로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왕실 출신 고승의 비석답게 크고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며 글자 수도 고려 고승의 비석 중 가장 많다.

 

소장품번호 덕수 5161                                                                                                                     전시기간 2026. 5. 4. ~ 8. 2.

 

 

 

 

 

 

 

옛 글씨의 벽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비석에 새겨진 다양한 글씨를 모아 만든 벽입니다.

비석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우리 글씨의 역사입니다.

 

 

 

 

 

 

 

 

 

 

 

 

 

 

 

 

 

 

 

 

 

 

 

 

 

 

 

 

 

태자사 낭공대사비 太子寺 朗空大師碑

 

글 최인연 崔仁渷 (868 ~ 944)

글씨 김생 金生 (711 ~ ?) 행서 집자

고려 954년

보물

 

통일신라의 선승 禪僧이자 국사 國師였던 낭공대사 郎空大師 행적 行寂 (832 ~ 916)을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 光宗 5년 (954)에 세워졌다. 비석의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승려 순백 純白이 남긴 후기 後記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최치원의 동생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인연 崔仁渷이 지었고, 글씨는 낭공대사의 제자인 승려 단목 端目이 신라 제일의 명필로 꼽히는 김생 金生의 여러 글씨를 모아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김생은 '해동 海東의 서성 書聖' 이라 불릴만큼 뛰어난 명필로 인정받았다. 비석의 글자는 각 획마다 힘과 생동감이 살아 있어, 김생의 글씨를 깊이 이해하고 새긴 승려 단목의 뛰어난 안목과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비석은 원래 경상북도 봉화 지역 태자사에 있었으나, 절이 사라진 뒤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중종 4년 (1509)에 영천군수 이항 李沆 (1474 ~ 1533)에 의해 영천의 관아로 옮겨졌다. 이 사실이 비석 측면에 조선 전기 문신 박눌 朴訥 (1448 ~ 1528)의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태자사 낭공대사비 太子寺 朗空大師碑

 

 

 

비석의 내용

 

 

 

고려시대 954년에 세워진 비로,

높이 218㎝, 폭 102.7㎝, 두께는 25.5㎝입니다.

 

 

 

귀부와 이수없이 비의 몸체만 있으며

몸체 중간에 깨진 흔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비문 제목은 비석 앞면 가장 오른쪽에 적혀 있습니다.

 

 

 

제목에서 낭공대사 (832 ~ 917) 행적 行寂을 위해

세운 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낭공대사는 이름 높은 선승으로 신라 효공왕 (재위 897 ~ 912)과

신덕왕 (재위 912 ~ 917)의 존승을 받았습니다.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5세요,

승랍 僧臘은 61이었다.

 

916년 낭공대사는 85세 나이로 입적했습니다.

 

 

 

나 仁渷은 진실로 사양하였지만

끝내 면하지 못하고 다만 명에 따라서

나름대로 변변치 못한 문장을 지어

삼가 스님이 남긴 공덕을 찬양한다.

 

이듬해인 917년 경명왕 (재위 868 ~ 944)은 최치원의 동생이자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인연에게 낭공대사 탑비의 비문을 짓게합니다.

 

 

 

뒷면에는 낭공대사의 제자인

승려 순백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하법손 門下法孫

석순백 釋純白 지음

 

뒷면에는 낭공대사의 제자인

승려 순백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큰 비석을 태자산에 세운 것은

정말로 좋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낭공대사가 입적한 지 38년이 지난

954년 태자산에 비석을 세운 경위가 적혀 있습니다.

 

 

 

좌측면에는 조선시대 16세기에

봉화의 어느 사찰터에서 비석을 발견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1509년 영주 군수 이항이 발견한 경위를 적었고

글씨는 박눌이 썼습니다.

 

 

 

비석의 글씨

 

 

 

비문은 승려 단목이 신라 최고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입니다.

 

 

 

집자란 글자를 모아 짜맞추는 작업입니다.

 

 

 

김생의 필적을 모은 뒤 필요한 글자를 찾고

 

 

 

각각의 글자 크기, 모양을 고려하며

글씨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신라의 예술적, 문화적 황금기인 8세기에 활동한 김생은

신라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삼국사기』열전에 의하면,

김생은 어려서부터 서예에 능했으며

 

 

 

조선시대에도 김생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높았습니다.

 

 

 

영주 군수 이항이 낭공대사 비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김생의 글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항은 일찍이 《비해당집고첩》에서 김생의 글씨를 보았고,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누워 있는 기세를 느꼈다고 합니다.

 

 

 

김생은 여러 서체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비석에서도 행서체와 해서체를 볼 수 있습니다.

 

 

 

 

 

 

 

 

 

 

 

 

 

 

 

 

사택지적비 탑본 砂宅智積碑 搨本

 

비석 백제 百濟 654년

종이에 탑본

 

백제의 귀족 사택지적 砂宅智積 (생몰년 미상)이 노년에 절과 탑을 짓고 이를 기념해 세운 비석의 탑본이다. 사택 가문은 백제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으며 사택지적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었던 대좌평 大佐平을 지냈다. 비문의 내용에는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탄식과 불교에 의지하려는 정서가 담겨 있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 南北朝와 수 隋의 서풍이 섞인 해서 楷書이며 힘차면서 유려한 백제의 미감을 잘 보여 준다.

 

소장품번호 산수 8001                                                                                                                     전시기간 2026. 5. 4. ~ 8. 2.

 

 

 

 

김생 金生 글씨에 대한 평

 

아침이슬 맺히고 저녁연기 피네

성난 규룡 虯龍이 뒤엉켜 꿈틀대고 신령한 봉황이 뛰네

김생인가 왕희지인가

몸은 비록 다르나 솜씨는 같다네

마음과 손이 상응하니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

신비하다 기이하다

말로 전하기 어려운 바라

 

이규보 (1168 ~ 1241) 「동국제현서결평논서 東國諸賢書訣評論序」

 

 

 

 

 

 

 

 

 

 

태자사 낭공대사비의 탑본첩

太子寺 朗空和尙白月棲雲塔碑 搨本帖

 

편찬 김광국 金光國 (1727 ~ 1797)

조선 朝鮮 18세기

종이에 탑본

 

전시실 중앙에 자리잡은 채자사 낭공대사비의 탑본을 모은 첩으로 의관 醫官이자 서화 수장가로 이름 높았던 석농 石農 김광국이 엮은 것이다. 첩의 앞부분에는 김광국이 비문의 원문을 해서로 옮겨 쓴 글이 실려 있으며, 이어서 낭공대사비 비문의 탑본이 편집되어 수록되어 있다. 통일신라 최고의 명필 김생 金生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매우 드물어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탑본으로 그의 글씨를 접할 수 있었다. 이 탑본첩은 전설처럼 전해지던 김생의 글씨를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수집하고 전승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소장품번호 구 5316                                                                                                                         전시기간 2026. 5. 4. ~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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