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꿈꾼 화가 모딜리아니 / 현대 조각의 아버지 브랑쿠시]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마지막 연인을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 (1918). / 노턴사이먼 미술관
두 거장은 왜 밤마다 지하철 공사장을 누볐을까
브랑쿠시式 추상성 영향
아프리카 미술 소개받아
독자적인 인간상 완성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작업
호흡기 악화로 접었지만
붓의 조각으로 화단 우뚝
미술사에서 ‘거장’ 이라는 수식어는 독보적인 조형 언어를 창조한 예술가에게만 수여되는 훈장과도 같다.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만의 철학을 작품에 구현했다는 뜻이고, 독창성은 시대를 넘어 감동과 영감을 전하는 힘이 된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 ~ 1920)가 그런 예술가에 해당한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그림 사이에 걸려 있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잔 에뷔테른을 모델로 한 초상화 앞에서도 곧장 느낄 수 있다. “아, 모딜리아니 그림이다!” 화면 속 인물은 실제 인체 비례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실물보다 훨씬 길게 늘어져 있다. 가늘고 긴 코, 비대칭 아몬드형 눈, 가면 같은 타원형 얼굴. 이 모든 요소는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을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고유한 표식이다. 특히 눈을 주목하자. 눈동자가 없다. 그 대신 신비한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다. 생전의 모딜리아니는 잔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 전해진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됐을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겠다.”
영국 미술 비평가 존 버거가 “20세기 미술 중 가장 감동적인 그림” 이라고 극찬한, 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내면 깊은 곳을 응시하는 고요한 눈길. 모딜리아니는 어떻게 이토록 독특하고 강렬한 인물상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에는 현대 조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 (1876 ~ 1957)와의 만남이 있다.
차가운 돌 속에 감춘 열망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마지막 연인을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 (1918). / 노턴사이먼 미술관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미술학교에서 아카데미 회화와 인체 드로잉을 공부했다. 가슴에서 야망이 꿈틀거렸다. 예술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로 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예술가에게 파리 외에는 집이 없다” 는 말을 즐겨 쓰던 그는 1906년 꿈에 그리던 파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1907년 살롱 도톤느에 작품을 출품하고 이듬해 앵데팡당전 (展)에도 도전했지만 무명 화가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힘겨운 시간 속에서도 그가 끝내 놓지 않았던 꿈은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다. 다만 가난한 유학생에게 조각 재료와 도구는 감당하기 힘든 사치였다. 모딜리아니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젊은 의사였던 폴 알렉상드르가 1909년 무렵 브랑쿠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후 그는 브랑쿠시가 살던 몽파르나스의 예술가 공동체 시테 팔기에르 (Cité Falguière)로 거처를 옮겼고, 그림을 잠시 중단한 채 조각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웃사촌이 된 그가 브랑쿠시에게 배운 것은 조각 기법이 아니었다. 대상의 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사물의 본질을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하는 수행이었다.
더하지 말고 빼라

브랑쿠시 ‘잠자는 뮤즈I’ (1909 ~ 1910). / 허쉬혼미술관
여기서 잠시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브랑쿠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다. 그는 한때 조각의 신이라 불렸던 로댕의 조수였지만 “큰 나무 그늘 아래서는 어떤 나무도 자랄 수 없다” 는 말을 남기고 독립의 길을 택했다. 당시 조각가들은 찰흙으로 먼저 모형을 만들고, 실제 돌이나 청동으로 옮기는 작업은 기술자에게 맡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브랑쿠시는 찰흙 모델링으로 형태를 붙여나가는 로댕식 제작 방식을 진흙투성이라며 거부했다. 그 대신 직접 망치와 정을 들고 재료를 즉각적으로 깎아나가는 방식으로 재료 안에 숨어 있는 형태를 찾아냈다.

콘스탄틴 브랑쿠시
돌은 돌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본연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의 예술을 상징하는 ‘직접 조각’ (Direct Carving) 철학이었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순수한 형태를 추구하는 브랑쿠시의 작업 방식은 당시 조각계에서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의 직접 조각의 정수가 담긴 초기 걸작이 ‘잠자는 뮤즈 I’ 이다. 브랑쿠시는 인체의 해부학적 세부 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머리 부분을 달걀 모양으로 표현했다. 그에게 달걀은 생명의 근원이자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였다. 이목구비는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고 가느다란 선과 윤곽으로만 남아 있다. 얼굴은 대리석을 곱게 갈아내 피부의 윤기를 극대화했다. 머리카락은 상대적으로 거친 질감으로 표현해 얼굴의 매끈한 표면과 대비를 이루게 했다. 단순한 타원형 머리, 고요히 닫힌 눈이라는 절제된 형태를 통해 잠든 자의 평온함과 침묵, 깊은 휴식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붓 대신 망치, 5년의 수행

아프리카 가봉 쓰고족 가면.
브랑쿠시는 모딜리아니에게 아프리카 조각과 원시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 세계를 열어준 안내자이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시의 권유로 파리 트로카데로 (Trocadéro) 민족지 박물관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가봉의 팡족 · 쓰고족 (族) 가면, 코트디부아르 바울레족 조각을 비롯해 아프리카와 비서구권에서 온 다양한 원시 미술 유물을 접하게 된다. 그중 하나인 ‘가봉 쓰고족 가면’ 을 살펴보자. 늘어진 얼굴, 길쭉한 삼각형 코, 과감하게 생략된 눈매, 기하학적이면서도 단순한 형태에 모딜리아니는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깨달았다. 인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선과 형태만으로도 인간의 근원적 에너지와 영적인 순수함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모딜리아니 ‘여인의 두상’ (1910 ~ 1911). / 워싱턴DC 국립미술관
이제 모딜리아니가 직접 돌을 깎아 만든 조각품 ‘여인의 두상’ 으로 시선을 옮겨보겠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훗날 모딜리아니 회화의 핵심이 되는 특징을 미리 만나게 된다. 우아하게 흐르는 윤곽과 추상성은 브랑쿠시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원시 조각에서 발견한 꾸밈없는 생명력이 모딜리아니만의 감각으로 녹아들어 있다. 이 돌 조각이야말로 훗날 우리가 사랑하게 될 모딜리아니 화풍의 뿌리인 셈이다. 유대인 박물관 큐레이터 메이슨 클라인은 모딜리아니의 조각에서 아프리카 예술뿐 아니라 크메르 미술,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로마 미술, 비잔틴 예술의 상징적 요소까지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딜리아니의 위대한 조각 실험 과정은 고달팠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붓을 내려놓고 정을 손에 쥐었지만 조각 재료를 살 돈조차 없었다. 값비싼 대리석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작업에 필요한 돌을 구하는 일 자체가 생존의 문제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브랑쿠시는 가난한 모딜리아니를 위해 기꺼이 공범이 돼줬다고 한다. 두 예술가는 밤에 파리 시내 지하철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석회암 블록이나 철도용 침목 (枕木)을 몰래 주워 왔다고 한다. 프랑스 문인 앙드레 살몽이 이를 도둑질이라 기록했을 만큼 재료를 구하는 과정은 처절했다. 역설적으로 가난과 열악한 조건이 모딜리아니만의 독창적 양식을 낳는 밑거름이 됐다.
조각에서 다시 회화로

모딜리아니 ‘학생의 초상’ (1918 ~ 1919). / 구겐하임미술관
1914년 무렵 모딜리아니의 뜨거웠던 조각 실험은 멈추게 된다. 작업 중 발생하는 돌가루는 그의 고질병이었던 결핵을 악화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지하철 공사장에서 얻던 돌마저 구하기 어려워졌다. 지독한 가난과 쇠약해진 몸으로 인해 그는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후퇴는 아니었다. 그는 조각가의 눈을 지닌 화가로 거듭나 있었다. 조각을 통해 익힌 조형 감각이 붓끝에서 되살아났다. 모딜리아니의 생애 마지막 무렵 그려진 ‘학생의 초상’ 은 조각적 양식이 독창적 회화로 완성됐음을 보여준다. 작품 속 모델은 평범한 학생이지만 모딜리아니의 붓을 거치며 개인의 얼굴은 지워지고 내면의 깊은 곳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영원한 인간상으로 승화됐다.
길게 늘어난 신체 비례, 가면 같은 얼굴,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눈, 형태의 단순화···. 이 모든 특징은 스승 브랑쿠시에게 배운 본질을 찾는 태도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의 강렬한 정신성이 회화 속에서 다시 태어난 결과물이었다. 1920년 1월 24일 모딜리아니의 서른여섯 짧았던 생은 멈췄지만 그가 창조한 독창적 화풍은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다. 그의 인물화는 ‘캔버스 위에 구현된 조각’ 으로 불리며 인간 본연의 존엄과 신비를 전하고 있다. 고독하지만 평온한 얼굴로···.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5월 16일 자]

'이명옥의 아트 & 멘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몽환적 초현실주의 화가 샤갈 거장으로 밀어올린 아내 벨라] (1) | 2026.05.08 |
|---|---|
| [인생의 좌우명을 일깨우다 영혼의 사제, 밀레와 고흐] (0) | 2026.03.26 |
| [황실이 사랑한 괴짜 궁정 화가 '초현실주의 할아버지' 아르침볼도] (0) | 2026.03.22 |
| [불굴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스승이자 원수, 디에고 리베라] (1) | 2026.02.15 |
|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 이론 화폭에 옮긴 화가 달리] (1) | 2026.01.22 |